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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작품의 완성도 면에서 보자면 많이 허술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악역 조관웅(이성재)의 너무 쉬운 몰락과 최후는 실소를 금할 수 없을 만큼 허탈했다죠. 이제껏 그 놈 하나 때문에 얼마나 긴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이 모진 고통을 받아 왔는데, 막상 이순신(유동근)이 좌수영 군사들을 이끌고 백년객관으로 들이닥치자 속수무책, 저항다운 저항 한 번 못 해보고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기 바쁘더군요. 물 건너 일본에서 왔노라며 마치 끝판왕이라도 되는 양 온갖 폼을 다 잡던 궁본 사람들, 재령과 가케시마 노조도 별 수 없었습니다. 분노한 이순신의 한 방에 강아지처럼 겁 먹고 짐 싸서 다시 물 건너 도망쳐 버렸죠. 이렇게 쉬운 거면 왜 그토록 오랫동안 상처입고 피 흘리면서 그들의 온갖 악행을 견디어 왔던 건지...
조관웅(이성재)은 '구가의 서'에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악역입니다. 그와 손잡고 악한 일을 꾸미는 기타 등등의 작은 악역들이 있긴 하지만 존재감이 미약해서 거의 눈에 띄지도 않죠. 그런데 드라마 자체가 지나칠 만큼 선악의 구분을 뚜렷이 정해 놓은 탓에, 가만히 살펴보면 캐릭터들이 촌스럽기 이를 데 없네요. 그 옛날 콩쥐팥쥐 식으로 착한 애 못된 애가 처음부터 구분되어 있으며, 아무 이유도 없이 착한 애는 원래 착한 애고 못된 애는 원래 못된 앱니다. 더불어 권선징악의 메시지도 거의 동화 수준으로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지요. 그러나 과도한 명확함에서 비롯되는 이 촌스러움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현실적 리얼리티를 살린답시고 선악의 구분을 모호하게 해놓은 캐릭터들은 보면 볼수록 머리가 아파지거든요. 그런 인물들이 ..
초반 1~2회의 애절함에 너무도 푹 빠졌던 나머지 3회부터는 오히려 적응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나라를 구하러 나서는 이순신(유동근)의 모습이 비칠 때면 이보다 더 장중한 드라마는 없는 것 같다가도, 주인공 최강치(이승기)와 그 주변 인물들이 나오면 갑자기 무게감이 절반으로 줄면서 아무리 비감한 장면이 나와도 별로 슬프지 않았거든요. 코믹한 와중에 진지함인지, 진지한 와중에 코믹함인지, 제가 보기에는 두 가지 분위기가 적절히 어우러지지 못하고 제각각 따로 노는지라, 좀처럼 몰입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전개 과정 중에 납득하기 어려울 만큼 작위적인 설정들까지 보이면서 제 마음은 조금씩 멀어져 갔었는데, 이를테면 박무솔(엄효섭)이 최강치를 대신하여 조관웅 수하의 칼에 찔려 죽..
인간의 딸을 사랑하여 인간이 되고자 했던 신수(神獸) 구월령(최진혁)의 간절한 소망은 '구가의 서' 제2회에서 꺾이고 말았습니다. 전설의 여주인공으로는 너무도 현실적이었던 윤서화(이연희)의 사랑은 구월령의 정체를 알게 되자마자 무너져 내렸고, 그녀의 배신은 절망의 또 다른 이름이었죠. 만일 윤서화의 뱃속에 잉태된 생명이 없었다면, 구월령이 담평준(조성하)의 칼에 찔리는 그 순간 모든 희망은 사라져 버렸을 것입니다. 구월령은 '구가의 서'를 얻어 인간이 되기 위해 꼬박 90일 동안이나 무사히 금기를 지켜 왔지만, 경솔하게도 혼자 나물을 캐러 나갔던 윤서화는 관군에게 붙잡혀 버렸고,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금기를 깨지 않을 수 없었죠. 꿈을 이룰 수 있는 100일을 불과 열흘 앞둔 시점이었지만, 처참히 끌려..
'구가의 서'(九家의 書) 제1회에서 주인공 최강치(이승기)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의 비극적 운명은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최강치는 아직 이 세상에 첫 숨결을 내뱉기도 전이건만, 아비 구월령(최진혁)의 마음속에 어미 윤서화(이연희)에 대한 사랑이 싹트는 순간, 이미 그의 모진 운명은 잉태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태초부터 미리 계획된 일이었는지 모릅니다. 가장 뜨거운 용기와 긍정의 힘으로 절대 금기를 넘어 사랑을 이루는 최강치의 모습을 통해, 신은 이 땅의 나약한 인간들을 깨우치려 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지요. 이 세상의 어떤 금기(禁忌)도 장벽도 사랑보다 강한 것은 없음을, 신분의 고하도 남녀의 차별도 심지어 인간과 짐승의 구별조차도 사랑보다 우선할 수는 없음을, 이 세상에 태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