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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사회 권력자들의 성추행을 고발하는 미투(me too) 운동이 들불처럼 확산되고 있다. 현직 검찰 내부의 성추행을 과감한 방식으로 세상에 드러낸 서지현 검사의 폭로는 이 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동안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어 왔던 수많은 성추행과 성폭력들이, 피해 여성들의 용기에 힘입어 잇달아 세상에 폭로되기 시작한 것이다. 미투(me too) 운동으로 고발당한 가해자들은 모두 막강한 명성과 권력을 지닌 사회 저명인사들이다. 정치, 문화, 연예계는 물론 종교계까지도, 그 어느 곳에도 성역은 없었다. 권력의 이름으로, 절제 못한 욕망을 핑계로, 약자들을 짓밟고 죄책감조차 없이 살아온 범죄자들은 어느 곳에나 존재하고 있었다. 사진 출처 : 연합뉴스 서지현 검사에게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최근 배우뿐만 아니라 감독으로서도 활동을 전개하고 있는 조재현의 영화 '나홀로 휴가'가 개봉되었다. 이 영화의 개봉을 앞두고 조재현은 출연 배우들을 이끌고 각종 예능에 출연하는 등 홍보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다. 평소 호감을 갖고 있는 배우였기에 나 역시 그 영화에 적잖은 관심이 있었는데, 우연처럼 조재현의 인터뷰 기사 하나를 읽은 후에는 모든 마음이 달라졌다. 이런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인 줄도 모르고 그 동안 좋아해 왔다는 사실이 통한스러울 뿐이다. 뭐 팬이라고 할만큼 열정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의 섬세하고도 묵직한 연기를 보면서 탄복하고 존경까지 해 왔던 세월이 어언 몇(십) 년이던가? (해당 인터뷰 기사 링크) 이후로는 인터뷰 내용을 한 단락씩 인용하면서 그에 관한 내 생각을 말해 보도록 하겠다..
'아빠를 부탁해'라는 예능을 나는 처음부터 전혀 보고 싶지 않았다. 표면상 기획의도는 '무뚝뚝한 아버지와 어른이 된 딸 사이의 어색함을 따스함으로 바꾸어 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거라지만, 그 내포된 의도는 '방송인이 되고 싶어하는 딸의 꿈을 이루어 주기 위한 방송인 아빠들의 팔자에도 없는 생고생 프로젝트'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특히 조재현과 조혜정 부녀는 딸이 배우의 꿈을 키우며 공부 중이라는 사실을 가감없이 밝혔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의혹의 중심에 서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를 부탁해' 출연은 그것과 무관하다고 모든 출연자 및 관계자들이 입을 모았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과 무관할래야 결코 무관할수 없는' 상황이었다. '아빠를 부탁해'가 방송되기 시작할 무렵까지만 해도 조혜정은 단지 이름없는 지망생..
어쩌면 자업자득이었을 것이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8살 예린이(김지영)는 그토록 사랑하고 믿어왔던 아빠가 뜻밖에도 올바르게 살아온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말았다. '부정입학'이라는 단어의 뜻조차 모르는 어린아이였지만, 이 똘똘한 녀석은 신문기사의 전체적인 맥락을 썩 잘 이해했다. 자기를 국제초등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서 아빠가 나쁜 일을 했고, 그래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아빠를 비난하고 있으며, 친구들은 자기 엄마로부터 "예린이와 놀지 말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는 뼈아픈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다. 예린이는 울며 소리쳤다. "할머니, 아빠 불쌍한데... 미워!" 박정환(김래원)은 한 달 남짓한 인생의 마지막 시간 동안, 잘못 살아 온 지난날을 조금이나마 만회하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온갖 나쁜 ..
박경수 작가의 '펀치'를 보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절실하게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 예전과는 참 많이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당연히 정의로운 여주인공 신하경(김아중)을 가장 멋진 캐릭터로 여기고 응원했을 것이며, 이태준(조재현)을 비롯한 악역들의 파렴치함에 솟구치는 분노로 몸을 떨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힘이 부족한 줄을 뻔히 알면서도 고집스레 정의와 원칙을 지키려는 신하경의 모습을 보며, 내 마음속에는 칭찬과 응원이 아니라 답답함과 안타까움이 가득 차오른다. 반면 이태준과 윤지숙(최명길) 등의 힘센 악역을 볼 때는 뜨거운 분노보다 앞서 차가운 두려움이 솟구친다. 어쩌면 대다수의 연약한 인간들에게 있어, 세상과 현실을 조금씩 더 많이 알게 된다는 것은 이처럼 조금씩 더 겁쟁이가 되어간다..
2012년 '추적자 THE CHASER'의 신선한 충격은 박경수 작가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와 기대를 한껏 높여주었다. 비록 2013년 '황금의 제국'은 전작만큼의 화제성과 시청률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인간의 내면을 무섭도록 냉정하고 끈질기게 파헤치는 작가의 묵직한 필력은 매니아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 후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4년도 막바지에 이른 겨울, 드디어 고대하던 '펀치'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100편이 넘는 드라마가 제작되었으나 그 중 깊은 인상을 남긴 수작은 1~2편에 불과했던 2014년의 혹독한 드라마 기근에 '펀치'는 과연 단비로 내려줄 수 있을까? 첫방송을 시청한 소감을 말하자면,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전형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어 신선함은 느낄 수 없..
드라마 '정도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스릴 넘치는 극의 전개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정몽주(임호)처럼 꼿꼿한 충신이 매우 멋있어 보이고 이상적인 인간형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금 보니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어딘가 몹시 꽉 막힌 듯하여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가 차라리 연애 편지였다면 좋았으련만, 정몽주가 그토록 사모한 것은 여인이 아니라 쇠잔해가는 고려 왕조였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만 있다면 임금의 성이 왕씨든 이씨든 그게 뭐 중요하다고 목숨까지 바쳤을꼬? 물론 ..
나는 드라마 '정도전'을 볼 때마다 이성계(유동근)와 이방원(안재모)의 모습에서 신비로운 감회에 젖는다. 과거 인기리에 방송되었던 '용의 눈물'과 묘하게 겹쳐지는 데자뷰 현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당시 태종 이방원이었던 유동근은 지금 태조 이성계가 되어 있고, 당시 충녕대군(세종)이었던 안재모는 현재 이방원이 되어 있다. 약 17년 가량의 세월이 흐른 후, 두 사람은 과거의 자신보다 한 세대 위의 인물인 아버지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곤룡포를 걸치면 그대로 임금이 되고 갑옷을 걸치면 그대로 장군이 되는 유동근의 당당한 풍채가 예전과 다름없는 것도 신비하거니와, 당시 20대 초반의 해사한 외모로 감수성 넘치는 세종의 청년 시절을 연기했던 안재모가 30대 후반의 장년이 되어 냉혹한 이방원으로 변신한 ..
개봉 전 기자들의 평점이 낮다고 해서 큰 기대를 품지 않고 관람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취향에 맞아서인지, 나에게 '역린'은 썩 나쁘지 않은 영화였다. 평점이 낮을 수밖에 없는 이유라면 스토리가 매우 빈약하다.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만드는 작품이라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으니 스토리보다는 각각의 캐릭터에 비중을 둔 모양인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영화를 보는 내내 추후의 전개가 거의 궁금하지 않다는 것은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스크린 속 인물들은 한껏 비장미를 뽐내며 긴박하게 움직이는데, 관객 중 몇몇은 좀처럼 몰입이 안 되는지 줄곧 킥킥대며 웃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배우들의 연기에 꽤나 몰입하고 있었다.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1777년(정조 1년)에 발생한 '정..
'백년의 유산' 후속으로 방송되는 드라마의 제목이 특이하더군요. '스캔들'이라는 자극적인 단어를 앞세워 제목이 아예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 이랍니다. 제목에서 언뜻 떠오르는 소재는 막장과 불륜과 치정 따위의 그런 것들이죠. 사실 제목만 보고는 구미가 당기지 않았어요. 그런데 무심히 포스터를 보고는 의외로 호기심이 동하더라 이겁니다. "나의 아버지는 나를 유괴한 유괴범이었다!" 이거 궁금증을 확 자극하지 않습니까? 엄마도 아니고 아버지가... 이런 설정은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었죠. 어머니의 경우라면 그와 비슷한 이야기는 수차례나 드라마로 만들어진 전례가 있습니다. 자식을 잃은 슬픔 때문에, 또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절망 때문에 순간적으로 약간 제정신을 잃었던 어머니는 남의 아이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