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정도전' 이성계의 애끓는 부정, 유동근의 소름돋는 열연 본문

드라마를 보다

'정도전' 이성계의 애끓는 부정, 유동근의 소름돋는 열연

빛무리~ 2014. 6. 9. 05:55
반응형

 

드라마 '정도전'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점점 더 흥미진진해지고 있다. 스릴 넘치는 극의 전개와 더불어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역사와 현실을 바라보는 나의 시각이 예전과 확연히 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다는 점이다. 어려서 국사를 배울 때는 정몽주(임호)처럼 꼿꼿한 충신이 매우 멋있어 보이고 이상적인 인간형이라 생각되었는데, 지금 보니 (그래도 멋있긴 하지만) 어딘가 몹시 꽉 막힌 듯하여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로 시작되는 '단심가'가 차라리 연애 편지였다면 좋았으련만, 정몽주가 그토록 사모한 것은 여인이 아니라 쇠잔해가는 고려 왕조였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백성의 삶이 편안해질 수만 있다면 임금의 성이 왕씨든 이씨든 그게 뭐 중요하다고 목숨까지 바쳤을꼬? 물론 그 당시의 사상으로는 임금(왕조)에 대한 충성과 국가에 대한 충성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걸 알지만.

 

 

조선 왕조가 건국되자 신권 중심의 왕도정치를 꿈꾸는 정도전(조재현)과 강력한 절대왕정을 꿈꾸는 이방원(안재모)의 세력 다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단연 정도전의 압승이다. 정현민 작가가 태조 이성계(유동근)의 성품을 얼마나 실제와 흡사하게 그려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매우 그럴 듯한 모습으로 설득력 강하게 표현되고 있다. (극 중) 조선의 태조 이성계는 단순하며 호방한 성품을 타고난 무장, 신체는 곰처럼 강인하고 위압적이지만 의외로 마음은 여리고 정에 약하다. 갖은 설득과 애원에도 끝내 정적으로 남았던 정몽주에게조차 그러하였으니, 제 곁을 지키는 신하들은 얼마나 극진히 아꼈을 것이며 더욱이 자식을 향한 애틋함이야 오죽했을 것인가?

 

높은 덕망과 인자함으로 다스리나, 지나치게 욕심이 없으니 권력자로서는 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다. 왕인 자신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기네 신하들이 정치를 하겠다는 정도전의 말을 듣고도 잠깐 분노하는 시늉만 하더니 결국은 "삼봉(정도전)이 원한다면 내 용포까지 벗어 주겠소. 어디 해보고 싶은대로 마음대로 해보소. 내 밀어주지!" 하며 모두 양보하는 임금이었다. "다만 나에게 옥새를 갖다 바치며 했던 약속, 백성들이 사람답게 살고 포은(정몽주)에게 부끄럽지 않은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던 그 약속만은 잊지 마시오!" 그러자 정도전은 "그 약속에 저의 목숨을 걸었다"고 응답함으로써 태조의 후원을 다짐받고 양 어깨에 날개를 단다.

 

 

때마침 명태조 주원장은 여진족 첩자를 명나라에 침투시켰다는 누명을 씌워 조선을 압박해 온다. 왕자들 중 한 명을 사신으로 보내 그 일을 해명하고 백배사죄하라는 것이다. 당시 조선에 비우호적이던 명의 태도로 볼 때, 사신으로 간 왕자의 생환은 결코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도전은 옳타꾸나 쾌재를 부르며 이방원을 보내야 한다고 태조에게 강권한다. 이성계는 "아무리 눈밖에 난 자식이라도 차마 사지로 내몰 수는 없다"며 거부하지만, 대뜸 명나라의 요구를 거부했다가는 국운이 풍전등화에 놓일 찰나였다. 게다가 정도전은 "정안군(이방원)이 사라져야 세자(이방석)의 자리가 안정을 찾을 것"이라며 계속 왕을 다그친다. 나는 새도 떨어뜨릴 정도전의 권세라, 이방원은 꼼짝없이 명나라로 쫓겨가게 생겼다.

 

이방원의 책사 하륜(이광기)은 "기왕에 가실 거면 자진해서 가십시오. 성심이 어지신 전하께서는 분명 대감(이방원)에 대한 앙금을 훌훌 털어버리실 것입니다. 그러면 후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라고 방원에게 권한다. 하륜의 능력에 매혹되어 제갈공명을 얻었다며 기뻐하던 이방원은 단박에 그 제안을 받아들여 부왕 이성계를 찾아가 말한다. "아바마마, 제가 가겠습니다. 가서 죽거나 볼모가 되더라도 기꺼이 가겠습니다. 저는 명나라에 가서도 아바마마와 이 조선을 한시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주원장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고, 금쪽같은 아들들 중 하나를 지목하여 사지로 보낼 수도 없어 피말리며 고심하던 이성계로서는 자발적으로 나서주는 이방원이 얼마나 고맙고 안스러웠을 것인가?

 

 

"다만 한 가지 청이 있사옵니다. 제가 돌아오든 못 돌아오든 삼봉의 사병 혁파만은 막아 주소서... 삼봉을 믿지 마시옵소서. 그 자는 임금을 부정하는 간적이옵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정도전에게 사병을 빼앗기고 권력 기반을 잃게 될까봐 계속 부왕 앞에서 정도전을 헐뜯는 이방원이다. 그러나 이성계의 귓가에는 어쩌고 저쩌고 하는 말들이 전혀 들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끄러미 아들을 바라보고만 있더니 울컥하는 목소리로 "방원아... 너 정말... 갈래?" 하고 묻는다. "어차피 저는 갈 수밖에 없는 운명 아니옵니까? 세자 저하의 앞길을 가로막는 못난 아들이니까요." 우울한 어조로 대답하는 방원의 모습에 결국 태조는 무너지고 만다.



 

"야, 이놈아, 이 바보같은 놈아... 네가 자꾸 이러면 너한테 참담한 일이 생기는 걸 모르니? 바보같은 놈... 그냥 다른 형제들처럼 꾹 참고 지내면 얼마나 좋니? 방원아, 이놈아... 방원아...!!!" 무리하게 정도전과 맞서다가 생명이 위태롭게 된 자식을 바라보며 아비는 미안한 마음에 눈물을 줄줄 쏟는다. 높은 용상에서 구르듯 내려와 찬 바닥에 엎드린 자식의 몸을 얼싸안고 꺼이꺼이 운다. "방원아... 방원아..." 유동근의 열연에 덩달아 가슴이 미어지며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이별을 앞둔 부자가 더없이 애틋하게 포옹하고 있는데, 문득 화면이 바뀌어 이방원에게 조언하던 하륜의 냉정한 눈빛이 오버랩된다. 그리고 나서 이방원의 눈물 고인 얼굴이 비춰지는데, 오호 통재라 그것은 악어의 눈물이었다.  

 

 

 

진심이 전혀 없었다면 아버지가 너무 불쌍하니까, 아들에게도 대략 10% 정도의 진심은 있었다고 쳐주자. 그러나 자기를 얼싸안고 통곡하는 아버지를 애틋이 여기는 진심이 10%였다면, 권력을 향한 욕망의 진심은 90%였다. 그렇게 명나라로 떠난 이방원은 모두의 예상과 달리 죽거나 날개가 꺾이기는 커녕, 세상을 보는 시각을 넓히고 더욱 큰 힘을 얻어서 돌아오게 된다. 훗날 성조 영락제가 될 연왕을 만나고, 혼란기의 중국 대륙을 평정해 가는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보며 제왕의 수업을 했으니 오히려 이방원에게는 천금같은 기회였던 셈이다. 더욱이 목숨을 걸고 명나라에 다녀옴으로써 잃었던 부왕 이성계의 신임을 다시 받게 되었으니, 정도전의 계산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다.

 

태종 이방원은 매섭고 강한 군주의 이미지라 부왕 이성계처럼 덩치도 크고 위압적인 모습이었을 것 같은데, 의외로 그렇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이방원이 명나라로 떠나겠다 아뢰자 태조는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없이 갔다 올 수 있겠니?"하며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이방원은 이성계의 아들들 중 유일하게 실력으로 과거에 급제했던 인물이라는데, 필시 그의 외양은 가냘프고 병약한 글쟁이 선비같았던 모양이다. 현재 이방원을 연기하고 있는 안재모의 이미지와도 썩 잘 맞아 떨어진다. 그런 외모를 해가지고 방번과 방석 두 아우를 죽였을 뿐 아니라 향후 수십년간 끝없는 살육을 거듭할 것을 생각하니 더욱 소름이 돋는다. 

 

 

여담이지만 태조 이성계의 체격과 외모를 그대로 이어받은 아들은 '허수아비 왕'으로 알려진 정종 이방과였으며, 그는 이성계를 따라 고려말의 여러 전투에 참여했던 인물로서 칼솜씨와 활솜씨도 뛰어났다고 한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정종이 허약한 문인 체질이었을 것 같고, 태종은 강골의 무장 체질이었을 것 같은데 실제로는 정반대였다니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역시 사람의 겉만 보고 그 속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도 새삼 느끼게 된다.

 

어쨌든 '파리하고 허약한' 아들 이방원을 명나라로 떠나 보내며, 행여 머나먼 그 곳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돌아오지 못하게 될까봐 맘 약한 태조 이성계는 울고 또 울었다. 아들이 떠난 후에는 아예 정사에서 손을 놓고 의형제 이지란(선동혁)을 불러 밤낮으로 술을 마시다가 얼큰하게 취기가 오르면 "방원이... 무사히 돌아오겠지?" 하면서 또 눈물을 글썽인다. 자식의 목숨을 걱정하는 아비의 애끓는 심정을 표현하는 유동근의 연기는 정말 예술 그 자체였다. (문득 세월호에 갇혀 있는 자식을 기다리던 부모들의 처절한 절규가 떠오르기도 했다.) 너무 몰입이 심하게 되어서 유동근의 연기를 보는 게 너무 힘들었는데, 하륜이 교활한 눈빛으로 나타나 천도(遷都)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안도의 숨이 훅 쉬어지며 가슴이 편안해졌다. 아, 정말 대단했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