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선덕여왕 (93)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유신(庾信), 자네를 향한 나의 믿음이 헛된 일이었단 말인가? 나의 판단이 그릇된 것이었단 말인가? 말을 해 보게. 자네의 흉중에 담긴 진정한 포부가 무엇인지를 말일세. 나 월야(月夜)의 두 어깨에는 60만 가야백성의 한과 더불어 내 아버지이신 월광태자(月光太子)의 슬픔이 깃들어 있네. 부친께서는 대가야와 신라의 결혼동맹으로 인해 태어나셨으니 명백한 신라왕실의 외손자이셨으나, 신라는 일방적으로 동맹을 깨뜨리고 장군 이사부의 정예군을 보내어 우리 대가야를 공격해 왔네. 그 당시 선봉에 섰던 인물은 화랑 사다함이었네. 배신당한 우리 대가야의 군사와 백성들은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했네. 가야산에서 흘러내려 온 우리 비옥한 땅의 내천들은 피로 물들었지. 자네는 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대가야를 점..
드라마 '선덕여왕'이 미실(고현정)의 죽음을 전환점으로 하여 제3부로 접어들었습니다. 제1부는 덕만(이요원)의 탄생과 어린시절 및 자아찾기에 골몰하던 낭도 시절까지였다면, 제2부는 공주의 신분을 회복한 덕만이 미실과 본격적으로 대결을 벌이는 시기였습니다. 이제 최대 강적이었던 미실이 사라지고 덕만은 목표였던 '왕'의 꿈을 일단 이루었습니다. 제3부는 왕위에 오르면서 새로이 시작된 덕만의 삶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드라마의 흐름을 보면 분명히 주인공인 덕만 중심으로 스토리가 흘러가고 있기는 합니다. 며칠 전, 한 독자분께서 저에게 이런 제안을 해주셨습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이 애초의 의도와는 달리 서브 캐릭터였던 미실이 너무 크게 부각되면서 주객이 전도된 양상이므로, 이제 미실이 사라지고 나서는 차츰..
친구, 자네는 알고 있었는가? 내가 왜 항상 자네의 곁에서 그림자처럼 살아가고 있는지... 자네의 어머니이신 미실 새주님께 대한 나의 충성심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말일세. 이제껏 나 자신조차도 모르고 있었지만, 어쩌면 자네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나는 이제껏 나 자신이 꽤나 처세에 능한 자라고 생각해 왔네. 최고 권력자이신 새주님께 충성하는 것은 나의 앞길을 평탄하게 하기 위함이라 여겼으며, 그분의 아들인 자네와 가깝게 지내는 것은 나의 출세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 왔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자 스스로도 몰랐던 나의 마음을 깨닫게 되었네. 나는 가식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사실은 진심으로 자네와 새주님을 신뢰하고 있었던 걸세. 나는 한미(寒微)한 가문 출신일세. 내 어린시절..
미실(美室), 그대가 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설원공께는... 미안합니다." 나는 그대의 인사를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다른 경우였다면 나는 결코 그대가 나에게 미안해하는 마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온 몸과 영혼이 오로지 그대의 것인 나에게, 그대가 미안해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의 마지막 부탁은 나에게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누구보다 나를 잘 아시는 그대가, 나의 고통을 낱낱이 헤아리실 그대가 나에게 차마 따를 수 없는 명을 따르라 하셨습니다. 나는 이제껏 그대라는 빛을 따라 살아왔습니다. 그대가 없는 세상이란 나에게 암흑일 뿐입니다. 그대는 나에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남은 자들을 인도하며 살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대..
비담, 내 아가... 이 어미를 원망하느냐? 그래, 원망하여라. 그 힘을 딛고 일어서거라. 그것이 네 어미의 운명이었고, 이제는 너의 운명이니라. 네 어미는 여인으로, 진골 성분으로, 게다가 대원신통(왕실에 색공을 바치던 여인들의 혈통)의 후예로 태어났다. 출생과 동시에 갖가지 잔인한 운명의 족쇄가 내 발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릴 적에는 외할머니에게서 색공 교육을 받으며 자라났기에, 그저 삶이란 그런 것이겠거니 여겼다. 다른 삶이 존재할 수 있다는 생각조차 내게는 반란이었다. 그러나 사다함랑을 만나면서 나는 처음으로 다른 삶을 꿈꾸었다. 차라리 몰랐어야 할 꿈이었다. 찬란한 봄날과도 같았던 그 짧은 행복은 머지않아 산산히 부서져내렸고, 네 어미의 삶은 바뀌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운명에 항거하기 시..
유신랑(庾信郞), 당신은 내 어릴 적 꿈을 알고 있나요? 나는 카탄 아저씨를 따라서 로마에 가고 싶었습니다. 자유롭게 넓은 세상을 떠돌며 많은 것을 보고 싶었지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여러가지 일들을 해보고 싶었어요. 물론 나를 구하려고 연기를 들이마셔서 얻게 된 우리 엄마 기침병도 고쳐주고 말이예요. 나는 그렇게 자유로운 삶을 꿈꾸었습니다. 그렇게 떠돌다가 저 멀리 서역 어디에선가 당신을 만났다면, 우리는 아무 거리낌없이 사랑할 수 있었겠지요? 어린 시절의 나는 두려움도 눈물도 모르던 아이였습니다. 하늘이 얼마나 높은지, 세상이 얼마나 넓은지, 그 모두가 내게는 즐거운 호기심의 대상이었을 뿐이예요. 나의 앞날은 희망과 행복으로 가득차 있을 거라고 굳게 믿었지요. 나는 그렇게 철모르고 용감한..
운상인(雲上人), 구름 위의 사람이라고 남들은 당신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젊은 시절, 낭도들과 더불어 향가를 짓고 옥피리를 불며 청유를 즐기던 당신의 모습과 참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지요. 당신의 타고난 성정에는 평생 그런 삶이 어울렸을텐데, 이렇게 나를 만나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군요. 사다함을 잃은 후, 나에게 남자란 모두 그렇고 그런 존재였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 나는 끝없는 욕망을 불태웠고, 나의 미모와 색공에 반해 기꺼이 내 앞에 무릎을 꿇는 남자들이란 나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도구들이었을 뿐입니다. 나는 아무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고,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설원랑, 당신만은 예외였지요. 갈수록 차갑게 황폐해져가는 내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나를 믿어 주었습니다. 내가 지금..
이렇게 될 줄은 몰랐는데... 칠숙랑, 당신보다 내가 먼저 떠나게 되었네요. 나는 오히려 당신에게 미안해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으니, 아파하지 마세요. 당신은 사막의 모래구덩이에서 나를 살려주었고, 이젠 나의 마지막 길에 또 하나의 커다란 선물을 주었네요. 당신이 더 이상 내 딸 덕만이를 추격하지 않고 놓아준 것은, 나의 시신을 넘겨줄 사람이 그애밖에 없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으로 충분해요. 운명은 내게 그리 가혹하지만은 않았어요. 나는 당신 덕분에 지키고 싶은 것을 지켰고, 그래서 편안히 눈을 감았어요. 살아남은 덕만이가 계림의 좋은 왕이 되어 줄 거라고, 그래서 나처럼 힘없고 약한 백성들을 든든히 지켜 줄 거라고 믿으며 떠날 수 있었으니까요. 나를 믿어서 혈육을 품에 안겨주신 폐하가 계셨고, 수십년..
영화배우 임예진이 1970년대 후반에 누렸던 인기는 그 어떤 여배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그때는 '국민여동생' 이라는 칭호가 없었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문근영이 영화' 어린 신부' 이후에 누렸던 인기보다도 훨씬 더 압도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되네요. 우선 당시에는 활동하는 여배우 및 연예인들이 지금처럼 많지도 않았었고, 여고생 임예진의 청순가련한 미모는 남학생들에겐 선망의 대상이요 여학생들에겐 부러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러던 임예진이 어느 순간부터 코믹한 이미지로 변신하기 시작했습니다. 제 기억에는 '진실게임'에 고정패널로 출연하면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진실게임에서 그녀는 언제나 송은이의 옆자리에서 콤비를 이루며, 정통 영화배우로만 보기에는 만만치 않은 내공의 코..
공주님, 힘을 내셔야 합니다. 절대로 눈물을 흘리셔서는 안됩니다. 공주님의 그 가녀린 어깨 위에 놓인 짐이 너무도 크고 무겁습니다. 힘겨우신 모습을 보면서도 항상 이렇게 다그칠 수 밖에 없는 저를 용서하십시오. 저 김유신(金庾信)은 멸망한 가야의 후예로 태어났습니다. 척박한 땅에서 나라 잃은 설움을 겪으며 고통받고 있는 가야 유민들의 앞날이 제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제 아버님 서현공께서 목숨을 걸고 어머님 만명공주와 무리한 혼인을 감행하셨던 것도 오직 연모 때문만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그런 아버님을 많이 닮았습니다. 그리고 말귀를 알아들을 나이가 되면서부터는 귀에 못이 박히도록 저에게 주어진 사명을 들으며 자랐습니다. 제 삶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기에, 저는 어려서부터 감정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