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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김지숙의 '로젤', 상처입은 영혼을 흔들다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강심장' 김지숙의 '로젤', 상처입은 영혼을 흔들다

빛무리~ 2011. 5. 25.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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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부터 연극무대에 평생을 바쳐 온 배우 김지숙의 토크가 이번 주 '강심장'으로 선정된 것은 매우 흐뭇한 일이었습니다. 역대 '강심장' 중에서도 거의 최고의 일화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무엇보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자기 가족 이야기를 털어놓는 토크가 '강심장'이 되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제 그것보다 더 식상한 아이템은 없거든요. 듣기 좋은 꽃노래도 하루이틀이라는데, 어쩌면 '강심장'에는 매주마다 그런 소재의 토크를 들고 나오는 연예인이 끊이지 않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특히 최악의 낚시는 박규리가 눈물 흘리는 장면을 편집해서 내보냈던 예고편이었습니다. 자막이 큼직하게 '박규리, 리더의 눈물' 이라고까지 나왔기 때문에 그 장면을 본 사람은 누구나 최근 핫이슈였던 '카라 사태'와 관련된 이야기를 했을 거라고 짐작할만 했지요. 그런데 뚜껑을 열어 보니 생뚱맞게도 돌아가신 할머니를 그리워하는 눈물이었습니다. 정말 황당하더군요.


이번 주 출연자 중에서 단연 눈길을 사로잡은 사람은 연극배우 김지숙이었습니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에서 오스카(윤상현)의 어머니 역할로 출연했던 그녀는 요즘에야 비로소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하고 있다더군요. 35년 동안 쉬임없이 연극무대에 섰지만 거리에서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는데, 요즘은 심심찮게 "오스카 엄마?" 하면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입니다.

완벽한 연기를 향한 그녀의 열정은 끝이 없었습니다. 1988년에 선배 유인촌과 함께 '햄릿' 공연을 할 때는 예상외로 햄릿의 어머니 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노부인 연기를 만족스럽게 해낼 수 없어서 스스로 엄청난 고민을 하다가 정신병원까지 찾아갔었다고 합니다. "제가 아무리 노력해도 연기가 너무 안되는데요, 이건 미친 게 아닌가요?" 라고 물었다니, 아닌 게 아니라 좀 미쳤던 게 맞는 듯도 싶습니다. 언젠가는 1인 12역에 도전한 적도 있었는데 그 12가지 배역 중엔 남자 역할도 있었다지요. 김지숙은 그 작은 배역을 위해 남자로서의 기분을 체험해 보고자, 매일 밤마다 남장을 하고 "나는 남자야" 자기 최면을 하며 거리를 쏘다녔다고 합니다.

그녀의 배우 인생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작품을 꼽는다면,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 동안 3000회 이상을 공연했던 모노드라마 '로젤'이었다고 합니다. 주인공 '로젤'은 바이올리니스트의 꿈을 꾸던 소녀였는데, 수차례의 잘못된 만남과 사랑으로 인해 잔인한 운명의 길을 걷게 됩니다. 로젤은 첫사랑에 실패했고, 두번째 사랑에서는 임신을 했으나 잔인하게 낙태까지 당했습니다. 결혼을 했으나 끝없는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이혼을 했고, 이혼 후에 만나서 사랑에 빠진 남자로부터도 처절한 배신을 당합니다. 특히 마지막 사랑은 그녀에게서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으로 모든 것을 빼앗았기에, 충격을 이기지 못한 로젤은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가 또 견디지 못하고 도망쳐 나옵니다. '로젤'은 모노드라마(1인극)이니 배우 김지숙은 공연을 할 때마다 이처럼 잔인한 여자의 일생을 반복적으로 체험하며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함께 출연한 원로배우 이정섭이 나서서 말하길, 대한민국 연극계에는 여섯 여배우의 6대 모노드라마가 금자탑으로 존재하는데 김지숙의 '로젤'은 그 중의 한 작품이라고 합니다. (나머지 다섯 작품은 박정자의 '그 여자', 손숙의 '셜리 발렌타인', 윤석화의 '위트', 김성녀의 '벽 속의 요정', 양희경의 '늙은 창녀의 노래'입니다) 그만큼 작품성을 인정받는 '로젤'인데, 김지숙은 15년 동안 '로젤'이 되어 살다보니 정체성의 혼란이 오면서 '내가 김지숙인지 로젤인지' 헛갈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렇게 심신이 지쳐가던 어느 날 여자 교도소에서 '로젤' 공연을 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무심히 관람을 시작했던 여성 수감자들은, 구구절절 자신들의 처지와 비슷한 '로젤'의 인생에 빠져들며 여기저기서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연극의 클라이맥스는 로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준 친구에게 하는 마지막 대사였습니다.

"정말 고맙다. 너 같은 사람이 꼭 하나 필요했었어. 아무도 단 한 번도 지금까지 내 진실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어. 나는 죽기 전에 꼭 한 번, 누군가에게 내 진실을 다 말하고 싶었어. 그것뿐이야. 아무것도 없어. 너한테 다 말하고 나니까 너무 행복해. 정말 살 것 같아... 너 늦었다고 했지? 이제 됐어, 빨리 가!"

토크 중간에, 그렇게 삽시간에 깊이 몰입할 수 있다니 정말 대단하더군요. 위 대사를 읊을 때 김지숙은 어느 새 다시 로젤이 되어서 울먹이고 있었습니다. 대사 자체는 그저 평범했는데 그녀의 실감나는 연기력에 빨려들어가 주변의 다른 게스트들도 울기 시작했고 제 눈시울도 살짝 젖어들었습니다. 그렇게 로젤이 친구를 보내려 할 때, 객석에서 수감자 한 명이 벌떡 일어서더니 "가지 마!" 하고 소리를 질렀답니다. 다음에 이어질 내용은 아마도 친구를 보내고 나서 로젤이 죽을 결심을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가지 마, 죽지 마! 나는 너보다 더 비참하고 잔인하게 살았어. 지금은 죄를 지어서 여기까지 와 있지만, 그래도 난 용기를 잃지 않고 있어. 나 지금 기술도 배우고 있고, 여기서 나가면 새로운 삶을 시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정신차리고 죽지 말고 열심히 살아!"

그 수감자의 외침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울음을 터뜨렸고, 무대에서 연기하던 김지숙조차도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간신히 연극을 끝내고 무대 뒤편에 홀로 앉아있는데, 자기 몸 안에서 뭔가가 쑥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답니다. 그 이전까지는 '로젤'을 너무나 슬픈 여자라고 생각했기에 3000회 동안 매번 울면서 힘들게 공연해 왔는데, 세상에는 로젤보다 더 아프고 힘든 사람들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김지숙은 수감자들과의 교감을 통해, 한동안 깊이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던 로젤의 아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로젤보다 더 비참하고 잔인한 삶을 겪어왔으면서도 다시 힘차게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던 그 분들, 지금도 그 마음 잊지 않고 어디에선가 행복하시기를 바란다는 말로 김지숙의 토크는 마무리되었습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혼자 감당해야만 했던 여자의 아픔... '로젤'이라는 연극은 바로 그녀들의 속풀이를 대신 해주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죽기 전에 꼭 한 번, 누군가에게 내 진실을 말하고 싶었다는 로젤의 절규는 아마도 그녀들 모두의 것이었겠지요.


바로 이틀 전, 고통스런 심경을 오죽하면 트위터에 호소하다가 싸늘한 시선들에 더욱 상처만 받은 채 결국 세상을 등지고 말았던 송지선 아나운서의 일이 있었기에, 김지숙의 '로젤' 이야기는 더욱 진한 안타까움으로 다가왔습니다. 아주 작은 귀기울임이 때로는 누군가의 죽음을 삶으로 바꾸어 놓는 기적을 일으킬 수도 있음을 다시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껏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는 임재범의 말에, 후배 가수들이 놀라지도 않고 다들 고개를 끄덕끄덕거리던 모습도 떠오르는군요. 결국은 그들도 다 마찬가지였던 겁니다. 누구나 자기의 진실을 털어놓을 친구가 절실히 필요하지만, 정작 찾아보면 한 명도 없는 거예요. 세상엔 이토록 많은 사람이 있건만, 저마다 참으로 깊은 외로움을 견디며 살고 있음을 느끼는 요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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