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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생뎐' 장주희, 산산이 부서진 중년의 꿈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신기생뎐

'신기생뎐' 장주희, 산산이 부서진 중년의 꿈

빛무리~ 2011. 5. 15.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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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승자박(自繩自縛)이란 곧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싶을 만큼 한심한 인물이 '신기생뎐'에 등장합니다. 어찌 생각하면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너무 세상 물정을 모르고 단순해서 저지른 일이라고도 볼 수 있기에, 한편으로는 안타깝기도 합니다. 그 사람은 바로 금병원 원장 금어산(한진희)의 아내였다가 지금은 초라한 이혼녀가 되어버린 장주희(이종남)입니다.


장주희는 이십대 초중반의 나이에 집안끼리의 약속으로 금어산과 정략결혼을 했는데, 결혼 전에 이미 난관의 이상으로 임신 가능성이 매우 낮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비 시가에서도 모두 그 사실을 알게 되었지요. 그런데도 금어산의 부친 금시조(이대로)는 장주희를 기꺼이 맏며느리로 받아들였고, 장주희는 그런 시아버지의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20여년간의 결혼 생활을 지탱해 왔다고 나중에 남편에게 말합니다.

한편 금어산의 동생인 금강산(이동준)은 대학생 신분으로 연애하다가 사고를 쳐서 애인 신효리(이상미)를 임신시키는데, 금시조는 기품없고 천박한 신효리가 며느릿감으로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아마도 자식을 갖지 못할 맏아들 내외를 위해 생각을 바꿉니다. 낳게 될 아이를 형님 댁에 입양시키는 조건으로 결혼을 허락한 것이지요. 금병원집 둘째며느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혹한 신효리는 냉큼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몇 달 후 태어난 금라라(한혜린)는 금어산과 장주희의 딸로 입적되어 25살까지 그 사실을 모르고 자라게 됩니다.


정략결혼에 친자식도 없는 금어산과 장주희 부부는 서로에게 예를 갖추며 정도 없지만 싸우는 일도 없이 조용하고 순탄한 결혼생활을 지속합니다. 어린 라라를 핑계로 자꾸만 자기 남편을 부추겨 시아버지의 재산을 뜯어내려고 찾아오는 철딱서니 동서 신효리만 아니면 골치썩을 일 하나 없는 평온한 생활이었습니다. 그러나 집안 권력의 중심이었던 시아버지 금시조가 돌연 사망하면서 이 모든 평화와 질서는 깨어지게 됩니다.

장주희는 금시조의 장례식을 끝내자마자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그저 차분하고 담담하고 기품이 넘치는 중년여인으로만 보였던 장주희가 사실은 가슴속에 뜨거운 불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평화롭지만 애정 없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지금껏 시아버지의 은혜를 갚기 위해 살아왔지만 이제는 더 늦기 전에 여자로서 자기를 정말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서 떠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남편 금어산은 잠시 놀람과 당황과 배신감을 느끼는 듯 했으나 곧바로 담담함을 회복하고 그녀의 요구를 선선히 받아들였습니다. 완벽해 보이던 중년부부의 이혼은 그토록 쉽게 이루어졌지요.

알고 보니 장주희는 얼마 전, 대학시절의 첫사랑이었던 김장신 변호사를 다시 만났던 것입니다. 마침 김장신은 상처한 홀아비 상태였고, 두 사람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첫사랑을 아련한 그리움으로 품고 있던 차에 다시 만나자 그 사랑을 이어가게 되었던 것이지요. 장주희가 이혼하자 두 사람은 곧바로 결혼 계획을 잡았고, 장주희는 김장신의 죽은 전처가 남긴 아이들까지 살뜰히 챙기며, 이제 드디어 여자로서 사랑받으며 살 수 있게 되었다는 행복감에 젖어듭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도 순진한 착각이었습니다.


50대의 김장신은 더 이상 청년 시절처럼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더없이 기품있고 점잖은 신사였으나, 단 둘이 있을 때면 TV를 보다가 욕설도 서슴지 않았고 걸핏하면 야한 농담을 해댔습니다. 식당에서 서빙하는 아가씨를 보고 "계집애, 남자들 살살 녹이겠는걸" 하면서 게슴츠레한 시선을 던지기도 합니다. 깔끔하던 청년 김장신은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씻는 것도 싫어하고 밥 먹는 습관도 지저분한 중년 남자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장주희는 김장신의 이런 모습에 몹시 실망합니다. 어쩌면 그 정도의 변화는 당연한 일이건만, 장주희로서는 상상도 못했던 일입니다. 남편 금어산은 비록 자기를 여자로 사랑해 주지는 않았으나, 단 둘이 있을 때도 언제나 깔끔하고 단정하고 기품있는 남자였거든요. 그런 남편의 아내로서, 부잣집 마나님으로서만 살아 온 장주희는 견고한 테두리 안에서 너무 철저히 보호받고 있었던 것이지요. 한 번도 다른 세상이나 다른 남자를 접해 본 적이 없으니 세상 물정에 어둡고 순진합니다. 늦게나마 첫사랑을 이루고 함께 살면 좋기만 할 줄 알았는데, 생각지도 않은 어려움들이 닥치자 적응하지 못합니다.

장주희는 김장신의 사소한 결점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잔소리만 늘어갔고, 김장신은 그런 장주희를 피곤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시달리던 김장신은 푸념처럼 이런 말을 내뱉고 맙니다. "중매쟁이들이 나한테 얼마나 달라붙는지 알아? 소개하겠다는 여자들도 죄다 30~40대 전문직 노처녀들이야. 그런 젊고 쟁쟁한 전문직 여자들을 마다하고 나는 자기를 택했어.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나한테 좀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면 안 돼?" 장주희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다른 질문을 합니다. "그렇게 밥 지저분하게 먹는 거, 죽은 애들 엄마는 안 싫어했어?" 그러자 김장신은 큰 소리로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전혀! 내가 남긴 밥 싹싹 긁어 먹었어!"


이쯤 되면 위험수위를 넘었습니다. 속으로는 생각할지언정 입밖으로 꺼내서는 안되는 말을 김장신이 해 버렸거든요. "나는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능력있는 30~40대 전문직 노처녀와도 결혼할 수 있다. 그런데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50대 이혼녀인 너를 택했다. 너는 나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자존심 강한 장주희가 저런 말을 듣고도 두 사람의 관계가 지속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게다가 그녀가 지적하는 결점을 고칠 생각은 추호도 없고, 오히려 죽은 아내는 자기가 남긴 밥까지 싹싹 긁어먹었다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이 말들을 연결시켜 보면 김장신이 원하는 결혼생활은 서로에게 맞추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일방적으로 자기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하는 아내 위에 주인처럼 군림하며 사는 거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김장신을 썩 괜찮은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그를 잘못 보았더군요. 그가 장주희를 선택한 이유는 첫사랑 시절의 순수함이 남아서가 아니라, 젊고 쟁쟁한 전문직 노처녀를 상대하는 것보다 훨씬 만만할 듯 싶어서 그랬던 모양입니다. 중매쟁이를 통해서 젊은 여자와 결혼하면, 아무래도 애들 딸린 홀아비라는 점 때문에 자기 쪽에서 여자에게 미안해하고 고마워해야 하는 입장이라, 자연히 큰소리도 못 치고 군림하지도 못할 테니까요.

하지만 김장신의 예상과 달리 장주희는 그렇게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었습니다. 매사에 꼬장꼬장 그렇게 살면 피곤하지 않느냐고 계속 몰아붙이는 김장신에게 장주희는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우리... 괜히 다시 만났어, 그렇지? 그냥 그리움에서 끝낼 걸... 없던 일로 해." 김장신은 한숨만 쉴 뿐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들의 관계는 이미 끝났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쓸쓸히 집으로 돌아온 장주희는 홀로 앉아서 헤어진 남편 금어산을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느닷없이 이혼을 하자며 들이대는 마누라가 밉기로 말하면 얼마나 미웠을 텐데, 금어산은 한 마디 원망도 없이 그녀를 편하게 보내 주었지요. 자기는 아무 잘못 없이 일방적인 아내의 요구로 헤어지는 것인데도, 금어산은 그 동안 당신이 잘 하고 살았으니 위자료는 당연히 받아야 한다면서 넉넉히 챙겨 주었고, 진심으로 그녀의 행복을 빌어 주었습니다.

그 때는 김장신과의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너무도 그리워서 붙잡을 수만 있다면 무엇도 아깝지 않을 만큼 간절했지만, 이제 붙잡고 보니 거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렸습니다. 멀리서 바라볼 때만 아름다운 무지개처럼, 뒤늦게 다시 만난 첫사랑도 그런 것임을 미처 알지 못했던 탓입니다. 그에 비해 예전에는 허울 좋은 껍데기일 뿐이라고 여겼던 남편과의 결혼생활이, 이제 와 생각하니 그렇지만도 않았음을 깨닫습니다. 뜨거운 애정은 없었어도 남편은 언제나 그녀를 존중해 주었고 배려심이 깊었습니다. 어쩌면 금어산의 아내라는 위치는 까다로운 장주희에게 가장 맞춤형의 행복이었습니다. 스스로 박차고 나오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여전히 금원장댁 사모님이며 라라의 엄마로서 화려하고 안정적이고 평온한 삶을 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젠 후회해도 늦었지요. 금시조가 사망할 무렵, 금어산에게도 첫사랑(?)이었던 한순덕(김혜선)이 나타나 이 목석같은 남자의 마음이 처음으로 흔들리던 참인데, 때마침 장주희가 나서서 이혼을 제안함으로써 그를 자유롭게 해 준 셈이었거든요. 금어산과 한순덕의 사랑은 오히려 훨씬 더 무난하고 부드럽게 발전되어가는 중입니다. 더구나 금어산과 한순덕 사이에는 25년 전에 잃어버린 친자식이 있습니다. 아직은 만나지 못했지만, 그 아이가 바로 이 드라마의 여주인공 단사란(임수향)입니다.


그러니 이제 와서 장주희가 되돌아올 자리는 없습니다. 라라를 키워주긴 했지만 친엄마도 아닐 뿐더러, 결혼 앞둔 딸자식을 나몰라라 팽개치고 자기 사랑을 찾겠다며 매정하게 집을 뛰쳐나왔으니 라라 엄마로서의 권리도 주장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장주희는 이제 할 줄 아는 일도 없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늙은 이혼녀가 되었습니다. 누구나 부러워하던 금원장 사모님의 인생이 삽시간에 이토록 외롭고 초라해졌군요. 가슴속의 열망을 가두지 않고 분출시킨 장주희의 선택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우리에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남겨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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