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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이 들리니' 차동주, 그 남자의 이야기 -1- 본문

드라마를 보다

'내 마음이 들리니' 차동주, 그 남자의 이야기 -1-

빛무리~ 2011. 4. 24. 0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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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속을 혼자 거닐면 정말 이상하다. 덩쿨과 돌은 모두 외롭고, 나무들도 서로를 보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다. 내 삶에 밝은 빛이 비추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그 누구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 살아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혼자다."    - 헤르만 헤세


헤세는 안개 속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세상을 노래했다. 하지만 나는 들리지 않는 세상으로 바꾸어 노래한다. 내 삶에 온갖 소리들이 존재할 때엔, 세상은 사랑할 사람들로 가득차 있었다. 하지만 이제 조용한 안개가 내려와 두 귀를 막으니 소리와 함께 모든 것이 사라져 갔다.

아빠는 내 친아빠가 아니었지만 그런 것쯤은 별 상관이 없었다, 내 나이 13살, 운명의 그 날까지는. 엄마와 외할아버지가 그렇듯 아빠도 항상 내 편이었고,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활짝 웃었다. 나는 매일 넓은 집과 정원을 뛰어다니며 놀았고, 병석에 누워 있는 외할아버지의 침대에서도 뒹굴며 놀았다. 나의 세상에 어둠이란 존재하지 않았다. 윙윙거리는 바람소리와 새들의 지저귐을 아직 내 귀로 들을 수 있던, 마지막 그 날까지는.  


말썽을 부린 벌로 3층 내 방에 갇히게 되었지만, 나는 친구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창문으로 방을 나섰다. 아홉 살인데 학교에도 다니지 않는다던 그 여자아이... 이상한 긴 드레스 차림으로 온 동네를 나풀나풀 뛰어다니던 그 아이... 이름을 물었지만 자기는 아직 이름이 없다며, 이름이 생기면 제일 먼저 나에게 알려주겠다던 그 아이를 만나 피아노를 가르쳐 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내가 선물한 멜로디언을 받고 무척 기뻐하던 그 아이.

나는 수십 번도 더 오르내렸던 줄사다리를 다시 창 밖으로 늘어뜨리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려가 2층 외할아버지의 창문 앞에 도착했다. 그 순간 방바닥에 쓰러져 있는 외할아버지와, 그런 외할아버지를 내려다 보며 싸늘히 웃고 있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외할아버지 곁에 산산히 흩어져 있던 하얀 종이조각과 빨간 장미꽃잎들... 나는 꿈이라고 생각했다.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이 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거였다.


아빠는 산소호흡기 연결선을 뽑아들고 외할아버지에게 말했다. "그 동안 내가 참고 산 세월에 비하면 아주 짧고 편할 거야." 그러더니 연결선을 창문 쪽으로 세게 던졌다. 그 바람에 출렁이는 커튼 틈 사이로 줄사다리에 매달려 있던 내 모습이 드러났다. 아빠는 무서운 얼굴로 내게 달려오려 했지만, 쓰러져 있던 외할아버지가 필사적으로 아빠의 다리를 붙잡고 내게 다가오지 못하게 했다. 나는 수없이 할아버지를 불렀지만, 산소호흡기를 잃은 할아버지의 숨결은 잦아들고 있었다. 원수의 다리를 움켜쥐고 나를 바라보던 애달픈 눈동자, 내가 사랑한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의 힘 빠진 손을 뿌리치고 내게로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이리 와!" 하지만 그 순간 아빠의 손에 붙잡히는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은 없었다. 뱀처럼 번득이는 그 눈은 내가 알던 아빠의 다정한 눈이 아니었다. 도망치려 했지만 온 몸이 얼어붙어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한 걸음 더 다가올 때 나는 줄사다리를 움켜쥔 손을 놓았고... 그렇게 이 조용한 세상 속으로 떨어져 내려왔다. 그다지 높은 곳도 아니었건만 내 머리가 닿은 곳에는 딱딱한 돌덩어리가 있었고, 13살 나의 연한 머리뼈는 봄철의 얼음장처럼 곳곳이 쩍쩍 갈라졌고, 나의 양쪽 청신경은 완전히 망가졌다.


엄마는 나를 데리고 사이판으로 떠났다. 그 곳에서 온갖 유능한 의료진을 동원해 나에게 소리를 되찾아 주려 애썼지만 헛수고였다. 그러자 엄마는 듣지 못하더라도 말을 해야만 한다고 매일 눈물로 나를 다그쳤다 하지만 나는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빠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끔찍한 세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막막한 세상... 14살에 나는 삶에 대한 희망과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었던 거다.

말하지 않는 나를 엄마는 절벽으로 끌고 갔다. 그 때는 내가 아직 독순술을 익히기 전이었지만, 그래도 엄마의 입술은 읽을 수 있었다. "죽어~ 죽어~!" 엄마는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진짜로 밀어 떨어뜨리려는 듯 엄마의 힘은 완강했다. 바닷바람과 소금기에 버석해져 있던 바위가 엄마의 맨발에 짓밟히며 산산이 부서져 바다로 떨어져 내려갔다. 풍덩~ 소리도 들리지 않던, 죽음보다 적막했던 그 바다.


순간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눈 속에서 외할아버지를 보았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나를 바라보던 그 애끓는 눈동자가 거기에 있었다. 그 때 내가 정신을 차리고 사다리를 내려와 사람들에게 알렸더라면, 할아버지는 살 수도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손을 놓쳐 버렸고, 할아버지를 구할 수 없었다. 할아버지의 마지막 눈과 꼭 닮은 엄마의 절박한 눈을 보며, 나는 어떻게든 엄마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엄마, 엄마!" 나 자신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나는 외쳤고, 그 소리를 들은 엄마는 기쁨에 못이겨 나를 껴안았다. 혹시 엄마는 알고 있을까? 그 때 내가 살려달라고 말한 사람은 나 자신이 아니라 엄마였다는 사실을.

이전까지와는 아주 다른 새 삶이 시작되었다. 모든 사람이 희망과 행복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님을 나는 알게 되었다. 외할아버지를 죽이고 엄마와 나의 모든 것을 빼앗아간 사람... 십여년간이나 아빠라고 불렀던 최진철에 대한 복수심이 내 삶의 이유가 되었던 거다. 지금은 그가 모든 것을 움켜쥐고 있는 듯 보이지만, 우경그룹 창업주의 유일한 혈손인 나 차동주가 살아있는 한 세상은 그의 권리를 온전히 인정하지 않을 것이니 얼마든지 기회는 남아 있었다.

나는 후계자로서 완벽한 인간이 되어야 했기에, 독순술을 철저히 익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청각장애를 숨겼다. 상대방의 음성을 문자로 바꿔주는 기능을 이용해 휴대폰까지 사용하지만, 남들이 보는 앞에서는 그런 방식의 통화를 할 수 없기에 나는 거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리고 통화가 가능한 시간에 내가 전화를 건다. 정확히 입모양을 주시하지 않으면 남의 말을 들을 수 없기에 핑계삼아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닌다. 쩍쩍 갈라졌던 머리통이 아직도 다 낫지 않아서 툭하면 밀려오는 통증과 구역질에 시달리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여러 사람이 모이는 자리를 피한다. 이러다 보니 차동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거만한 녀석이라고 소문이 났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드디어 때가 왔다. 엄마와 나는 최진철이 빼앗아간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16년만에 그의 곁으로 돌아왔다. 나는 우경그룹 30주년 행사장에 조용히 파고들어, 현란한 피아노 연주 솜씨로 시선을 집중시키고 난 뒤, 최진철을 향해 "아버지!" 라고 불렀다. 유일한 후계자가 전격 컴백했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서프라이즈 이벤트였다. 기자들은 "차동주다, 차동주다!" 하면서 삽시간에 내 주위로 몰려들었고, 놀란 최진철의 안색은 하얗게 질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외할아버지가 처음으로 우경을 일으키셨던 그 땅에서 꼭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엄마는 말했다. 엄마의 애틋한 감상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현실적으로도 그것은 썩 훌륭한 계획이었다. 내가 처음부터 그룹의 중심 사업인 반도체로 뛰어들겠다 하면 최진철의 경계심만 자극할 뿐이니, 회사 경영에 관심없는 듯 파락호 흉내를 내며 시골에서 노닥거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렇게 내려간 시골에서 그 아이를 다시 만났다. 긴 치마를 입고 신나게 멜로디언을 불어대던, 이름도 없던 그 여자아이가 알고 보니 장준하 형의 여동생이었구나. 힘겨웠던 시간 동안 내 곁을 지켜준 유일한 친구 준하형... 그와 함께 있는 동안에는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 그는 나의 귀가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나는 그가 한때 봉마루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서로의 비밀을 공유하며 지난 16년간 우리는 분신처럼 가까워졌는데, 나에게 콩주머니를 선물해 준 그 여자아이가 준하형의 동생이었다니 참 신기한 일이다.

새엄마의 딸일 뿐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아이라고 준하형은 말했지만, 가족이 아니라면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애타게 오빠를 찾지는 않을 것이다.
준하형은 그 아이를 만나지 말라고 내게 말했다. 봉마루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어린 시절을 지워버리고 싶어하는 준하형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화장품 개발연구원 강민수에게서 부탁받은 것이 있었다. 그 아이의 꽃 그림을 구입해서 케이스의 디자인에 활용하고 싶은데 계속 거부하고 있으니 설득해 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그 핑계로 말을 듣지 않자, 준하형은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 아이의 죽은 엄마, 청각장애인이었어!" 그 말에는 내 가슴도 철렁했다. 하지만 "왜 이런 말까지 하게 해, 16년 동안 그 고생을 해놓고 일 시작도 하기 전에 들키고 싶어?" 라는 준하형의 말에는 다시 오기가 치밀었다. "이 정도로 들킬 거였으면 시작도 안했어. 안 들킬 자신 있어!"


그런데 정말 나는 자신이 있는 것일까? 사실 그 아이는 매우 위험하다. 그 아이 때문에 준하형의 비밀과 나의 비밀이 동시에 깨져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일은 끝장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이 위험한 아이를 멀리하고 싶지가 않다. 고작 이어폰을 꽂는 습관 하나와 개미똥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나를 잃어버린 자기 오빠 봉마루라고 철석같이 믿는 이 녀석은 예전처럼 단순하고 터무니없이 밝기만 한데.


차동주라는 내 이름만 듣고서도 너는 모든 것을 기억해 냈다. 피아니스트를 제멋대로 바꿔 부르던 단어 피아노스트... 내가 선물했던 멜로디언... 그리고 우경. 내가 한없는 외로움 속을 헤매던 긴 세월 동안, 너는 나를 잊지 않고 있었구나. 사고 이전의 기억을 모두 잃은 것으로 되어있는 지금, 나는 너를 기억하면서도 모른체 해야 하지만 모든 일이 끝나면 너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

피아노를 가르쳐 주러 오겠다는 약속을 내가 어겼지만, 봉우리... 너도 이름이 생기면 가장 먼저 나에게 알려주겠다던 약속을 어겼으니 그건 비긴 셈 치자. 나는 왠지 오랜만에 숨을 쉬는 기분이다. 이 시원함과 편안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정말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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