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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 독고영재의 목숨 건 추억, 독고다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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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심장'에서 영화배우 독고영재가 들려 준 70년대의 영화 촬영 이야기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아무리 일도 좋고 예술도 좋지만 우선은 사람이 살고 봐야 할 일인데, 무슨 영화를 찍자고 젊은 배우들의 생목숨을 담보로 잡았던 셈이니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어쩌면 그럴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물질적 환경이 열악했을 뿐 아니라 인권에 대한 가치기준도 지금과는 확연히 달랐던 그 무렵의 시대상을 반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979년, 신인배우 독고영재 주연으로 '전우가 남긴 한 마디'라는 전쟁영화가 만들어졌습니다. 영화 자체보다 더 영화같은 독고영재의 파란만장한 촬영 이야기는 모두 이 영화로부터 비롯되었지요. 물적, 인적 자원이 턱없이 부족했던 당시의 환경으로는 영화를 위해 특별히 제작된 소품 따위는 바랄 수도 없었기에, 총알도 실탄을 사용했고 물 속에 설치하는 폭발물도 실제 다이너마이트를 이용했답니다. 영화계에 종사하는 인구 자체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마당에 전문 스턴트맨이 있을 리 만무하니, 아무리 위험한 장면도 주연배우가 직접 뛰어들어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나마 모든 자원이 부족하니 리허설조차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연습한답시고 비싼 폭약을 터뜨려 없앨 형편이 아니었던 것이지요. 독고영재를 비롯한 몇 명의 젊은 배우들은 군인 중에서도 가장 용맹한 특공대원 역할을 맡아, 작은 고무보트를 탄 채 한탄강을 가로질렀습니다. 배가 똑바로 나아가는 물길 양 옆에는 다이너마이트가 몇 군데 설치되어 있었고, 폭파 담당자는 고무보트가 스쳐 지나기 무섭게 버튼을 눌러 아슬아슬하게 바로 뒤에서 물기둥이 솟구쳐 오르도록 계획을 세운 뒤, 리허설도 없이 행해진 촬영이었습니다.
다행히 첫번째 촬영은 무사히 끝났으나, 좀 더 멋진 장면을 뽑아내고 싶었던 감독은 재촬영을 고집했습니다. 아마도 구입해 둔 폭약이 좀 남아있었던 모양이지요..;; 배우들은 이미 온통 물에 젖어서 추위에 떨고 있었지만, 주연배우부터가 신인이다보니 거절하지도 못하고 다시 고무보트에 탑승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엔 좀 심각했습니다. 뒤에서 터진 다이너마이트의 위력이 너무 강하다 보니, 작은 보트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다가 원래의 물길에서 벗어나 버린 것입니다.
다음 번 폭발 예정인 다이너마이트가 준비되어 있는데, 독고영재가 맑은 물 밑을 내려다보니 보트는 정확히 그 위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깜짝 놀라서 "어, 지금 우리가 다이너마이트 위로 왔..." 하고 외치는 순간, 물결 저편에서 이쪽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폭파 담당자는 예정대로 버튼을 눌렀고, 다이너마이트는 사정없이 폭발했습니다.
독고영재의 몸은 똑바로 솟구쳐 몇 미터 위로 날아올랐다가 물 위로 내동댕이쳐졌습니다. 폭발 순간에 오른쪽 다리가 꺾이며 심각한 부상을 입었기에 감각도 없었고, 물에 젖은 옷과 배낭은 돌덩이처럼 무거웠습니다. 그러나 물 속으로 가라앉아 강바닥에 두 발이 닿는 순간,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그는 바닥을 박차고 죽어라 헤엄쳐 올라와 강물 위로 머리를 내밀었습니다. 강가에 모여있는 수십명 스탭들 쪽으로 손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소리쳤지만, 너무도 충격적인 장면에 놀란 스탭들은 일순간 움직이지 못하고 얼어붙어 있더랍니다.
어쨌든 죽지 않고 모두 살아서 천만 다행이었지만, 다리에 부상을 입은 독고영재를 비롯해 갈비뼈가 모두 부러진 동료도 있었을 만큼 위험천만한 상황이었습니다. 현장에 있던 사진기자가 바로 그 장면을 포착하여 찍은 사진을 보니 정말 기가 막히더군요. 엄청난 폭발력에 고무보트는 종잇장처럼 접혔고, 사람들의 몸은 CG처럼 날아오르거나 뱃전에 부딪혀 꺾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실제 사고 장면은 그대로 영화에 삽입되었습니다. 리얼 100%의 처참한 장면이었습니다.
죽음의 고비는 얼마 후 다시 찾아왔습니다. 독고영재는 불 붙은 군용 트럭을 운전하며 좁은 산기슭을 달리고 있었습니다. 실감나는 장면을 찍는다고 6.25 때 실제로 전투에 쓰이던 트럭을 준비했다는데, 1979년 당시의 기준으로서도 이미 30년 전에 사용되던 낡디 낡은 트럭이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산기슭을 달리다가 핸들이 고장나고 말았습니다. 계속해서 우측으로 곡선을 돌아야 하는데 핸들이 움직이지 않으니, 트럭은 사정없이 왼편의 낭떠러지를 향해 돌진했습니다. 길이 워낙 좁으니 순식간에 낭떠러지로 추락할 기세였습니다.
절체절명의 순간, 독고영재는 마지막 힘을 다해 핸들을 우측으로 꺾으며, 한탄강에서 다쳤던 다리에도 힘을 주어 브레이크를 밟았습니다. 그러자 죽을 운명은 아니었던지 뻑뻑하던 핸들은 다시 움직였고, 차는 그대로 우측 산비탈과 충돌했습니다. 독고영재는 눈밑을 8바늘 꿰맸을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는데, 출혈이 얼마나 심했던지 자기 얼굴에서 '삐직 삐직 삐직~' 하고 피가 뿜어져 나오는 소리를 생생하게 들었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독고영재가 커다란 드럼통 옆에 숨어서 총을 겨누고 있으면, 적군이 발사한 총알이 드럼통에 맞아서 그 안에 들어있던 물이 뿜어져 나오는 효과를 찍어야 하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했다시피 당시에는 모두 실탄을 사용했다지요. 사고의 위험을 최소화하기 위해 특등사수가 초빙되었고, 그는 독고영재 바로 옆에 있는 드럼통을 향해 실탄이 채워진 총을 겨누었습니다.
이건 무슨... 사과를 머리 위에 올려놓고 아버지의 화살을 기다리던 윌리엄텔의 아들처럼, 독고영재는 퍼렇게 눈을 뜬 채 자기 쪽으로 겨누어진 총구를 보며 열연을 했습니다. 옆의 드럼통에 실탄이 적중하여 물이 마구 뿜어져 나왔지만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특등사수의 조준이 약간만 흔들려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영화 속에서 그는 용맹한 특공대원이기에 놀라거나 두려운 표정을 지어서는 안되었습니다.
참 기막힌 상황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위험하고 열악한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열정을 불사르던 당시의 배우들을 생각하면 숙연해지기도 합니다. 배우라는 직업을 단지 돈을 벌기 위한 것으로만 생각했다면, 그토록 수없이 닥쳐오는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도 계속할 수가 있었을까요? 다이너마이트가 심겨진 강 위를 지나고, 불 붙은 낡은 트럭을 몰고 낭떠러지 위를 달리고, 실탄이 날아오는 앞에서 목숨 걸고 연기할 수 있었을까요?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영화에 대한 열정, 그 예술혼이 없다면 불가능했을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독고영재는 원로배우 독고성의 아들입니다. ('독고'라는 성은 예명으로 빌려 온 것이고, 원래 독고성의 본명은 전원윤, 독고영재의 본명은 전영재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배우라는 직업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 외교관이나 의사 등의 직업을 권했다는군요. 그러나 1973년, '빗방울'이라는 영화를 통해 독고영재는 아버지 몰래 영화계에 데뷔하고 맙니다. 이를 알게 된 독고성은 아들을 호되게 나무랐지만, 기왕에 접어든 길이니 최선을 다하라고 격려하며 아들의 작품에 카메오로 출연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독고영재는 데뷔 후 무려 20년간이나 무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촬영했던 '전우가 남긴 한 마디'도 그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지는 못했습니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영화배우 2세들로서 전영록, 박준규 등은 활발하게 활동하는데, 홀로 긴 무명 생활을 견디는 마음은 그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고통이었습니다.
드디어 1992년 영화 '하얀전쟁'으로 독고영재는 세상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지요. 아들이 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날 아버지는 손수 아들의 구두에 묻은 먼지를 털어 주었고, 수상 소식을 듣자 눈물을 흘리며 "어려운 시절은 다 갔다"고 말했습니다. 이어서 독고영재는 1993년, 드라마 '엄마의 바다'를 통해 뒤늦은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대기만성도 대를 잇는 것인지, 독고영재의 아들인 독고준(본명 전성우) 또한, 2003년에 SBS 공채 10기 탤런트로 합격하며 연예계에 데뷔했으나, 아직도 좀처럼 이름을 알리지 못한 채 오랜 무명의 세월을 겪는 중입니다. 1980년생이니 그의 나이도 32세인데 말이죠. 하지만 독고영재는 "열심히 하면 길이 보인다"며 아들을 격려하고 있답니다. 누구보다 그 마음을 잘 이해하는 아버지니까요.
중상을 입고 한탄강의 차가운 물 속에 가라앉을 때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 준 것은, 그의 머릿속에 떠오르던 가족의 얼굴들이었습니다. 지금도 아내를 팅커벨이라고 부르며 스스로 피터팬을 자칭한다는 독고영재는, 뜨거운 예술혼과 더불어 다감한 가족애를 지닌 사람이더군요. 그의 오랜 기다림이 좋은 결실을 맺었듯이, 대를 이어 쉽지 않은 길을 걷고 있는 그의 아들에게도 좋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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