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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가던 '나가수'를 살려낸 정엽, 아름다운 퇴장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죽어가던 '나가수'를 살려낸 정엽, 아름다운 퇴장

빛무리~ 2011. 3. 28.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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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한 주간 '나는 가수다'는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느 기사에는 '뇌사 상태'라는 표현도 등장했습니다. 그만큼 회생 불가의 상태로 보였고, 다시 일어서서 노래하는 모습은 상상조차 힘들 정도로 무너진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두번째 경연에서 그들은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 '나가수'가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술의 생명은 결코, 그리 쉽게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른 방법이 아닌 '노래'로써 온 세상에 증언해 주었습니다. 단지 노래가 있다면 다른 말은 필요치 않음을, 노래 이외의 다른 이유 때문에 이 무대를 사라지게 할 수는 없음을, 그래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첫번째로 퇴장하게 된 정엽, 지극히 아름다웠던 그의 모습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혼신의 힘을 기울여 공연에 임한 7명의 가수들 모두 공을 세웠다 할 것입니다. 특히 압도적으로 1위를 차지한 김범수의 무대는 저의 영혼을 가장 깊숙히 흔들었습니다. 중간 평가 단계에서부터 그랬어요. 몽환적 느낌의 이소라와는 전혀 다른, 정직하고 올곧은 음색으로 '제발'의 애절한 멜로디가 쭉쭉 뻗어 올라가는데, 순간 충격으로 마치 얼음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가슴이 서늘해지더군요. 과연 왜 그리도 많은 전문가들의 김범수의 가창력을 최고로 인정하는지, 절실하게 체험할 수 있는 순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순위를 매긴다면, 김범수 다음으로는 윤도현과 박정현의 무대를 꼽겠습니다. 1위 발표가 있기 전에 나름대로 제가 생각했던 후보가 저 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공교롭게도(?) 박정현은 1회 공연에서, 윤도현은 2회 공연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사람이더군요. 그들에겐 이미 경험이 있고, 이번에는 김범수의 무대가 약간 앞선 임팩트를 뿜어냈다고 느꼈기에 저는 내심 그의 우승을 확신했는데, 과연 예상대로 이루어졌습니다.

확실히 우승자는 괜히 뽑히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범수, 윤도현, 박정현은 매번 긴장하면서도 진심으로 그 무대를 즐긴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그들은 가장 멋진 공연을 만들기 위해 직접 동료 뮤지션들을 초빙해 반주를 부탁하기도 했고, 인터뷰를 할 때면 "이 무대에 오래 서고 싶으니 꼴찌만은 면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램을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적극성이 공연에 그대로 표현되어 청중을 매료시킨 것입니다.


사실 김영희 PD가 경질되고, 그를 복귀시켜 달라는 요청은 거절당하고, 맏형 김건모는 자진 사퇴 의사를 밝힌 상황에서, 나머지 가수들이 모여 "우리도 집단 사퇴를 해야하나?" 의논했다는 기사를(혹은 뜬소문을) 접했을 때 우리는 또 한 번 분노했었습니다. 일의 진행 과정이 자기들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해서, 어찌 시청자와의 약속은 팽개치고 못된 집단행동으로 프로그램을 무너뜨리려 하는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김범수, 윤도현, 박정현의 무대를 보니 그 생각이 완전한 오해였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 무대에 진심으로 오랫동안 서기를 원하는 그들의 간절한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앞서 언급한 세 사람 만큼의 열정은 제게 느껴지지 않았지만 이소라, 백지영, 김건모, 정엽의 공연도 모두 좋았습니다. 이소라와 백지영은 그녀들 특유의 애잔함을 십분 발휘해 청중의 가슴을 흔들었고, 저번에 지나친 경박함으로 꼴찌를 해놓고도 승복하지 못하는 오만함을 드러내 불쾌감을 자아냈던 김건모 역시, 이번에는 진지하고 겸허하게 최선을 다해 노래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나중의 인터뷰에서 김건모는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이 자신의 인생에 터닝포인트가 되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는 노래를 부르는 내내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게 퍼포먼스를 할 수 있을까?' 하면서 노래를 끝내고 립스틱 칠할 생각에만 빠져 있었노라 말했었지요. 그렇게 딴생각에 잠겨서 노래를 했으니 감정이 텅텅 비었을 수밖에 없고, 그 부실함은 곧바로 청중에게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부터 오랫동안 타성에 젖어, 노래하는 것을 직업으로만 생각해 왔다는 그는 이번 기회에 어떤 자세로 노래해야 하는지를 깊이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엽의 탈락은 어쩌면 미리부터 예정되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자기만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이룬 좋은 가수이며 훌륭한 예술가이지만, 가창력 면에서는 함께 출연한 다른 가수들에 비해 한발 뒤처진다는 느낌이 줄곧 들었거든요. 첫번째 공연에 이어서 이번에도 그가 최하위를 차지할 것임을, 저는 거의 확신에 가깝게 미리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정엽의 무대에는 조용히 스며드는 아름다운 감성은 있었지만, 소름끼치는 가창력으로 충격을 주었던 다른 가수들에 비한다면, 강렬함이 많이 부족했습니다. 


청중평가단의 결정에 의한 탈락은 정당했으며, 그것을 담담하고 쿨하게 받아들이는 정엽의 자세는 최고였습니다. 그는 자기의 매니저가 되어 준 김신영에게, 편곡을 비롯해 여러모로 자신의 무대를 도와주었던 친구들에게, 담당 카메라맨을 비롯한 스탭들에게 모두 진심어린 고마움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같은 무대에서 3주 동안 노래하며 진한 동료애를 느꼈던 다른 가수들과도 일일이 포옹하며 그 동안 수고했노라고, 함께 하는 시간이 정말 행복했노라고, 다정한 인사를 잊지 않았습니다. 아름답다는 말로 표현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모습이었습니다.

이로써 정엽은 "어떻게 퇴장해야 하는가?"의 정석을 보여주었습니다. 미안해하는 동료들을 다독이기 위해, 오히려 무거운 짐을 벗어 홀가분하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사실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겠지요. 중간평가에서도 꼴찌를 했던 그는 충격을 받고 어떻게든 만회하려고 최선을 다했으며, 그 결과 본 경연에서는 훨씬 발전된 무대를 이루어냈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냉정했고, 그는 깨끗이 승복했습니다. 더 이상 함께 할 수 없다는 아쉬움을 감추려고는 하지 않았으나, 물러나야 할 때임을 알기에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지난 번에 김건모가 '나쁜 예'를 보여줌으로써 온갖 혼란을 초래했다면, 이번에 정엽은 '좋은 예'를 보여줌으로써 후배 탈락자들의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일단 정엽이 가장 모범적인 자세로 선례를 남겼으니, 다음부터는 꼴찌를 차지한 사람들도 조금은 덜 민망하게, 조금은 더 가벼운 마음으로 결과를 받아들이고, 그가 남긴 발자국을 따라 아름답게 퇴장할 수 있겠지요. 이렇게 해서 정엽은 죽어가던 프로그램 '나가수'를 되살리는 데 가장 큰 공로자가 된 것입니다.

'나는 가수다'는 정통 음악프로그램이 아니라 예능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서바이벌 형식을 유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서바이벌 규칙을 없앤다면 너무나 밋밋해져서 예능적 의미는 완전 퇴색되고 말 테니까요. 그런데 가수들의 자존심으로 과연 탈락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습니다. 첫번째 탈락자로 김건모가 지목되었을 때 모든 가수들은 예상보다 훨씬 큰 충격을 받았고, 심지어 김건모는 구차스런 재도전을 결정했고, 그래서 엄청난 후폭풍이 몰아쳤습니다. 앞으로도 순조로운 진행은 어려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정엽이 쿨하게 결과를 받아들임으로써 탈락이 결코 불명예가 아님을 증명했으니, 이로써 '나가수'라는 프로그램은 별탈없이 존속할 수 있게 된 셈입니다.


정엽의 모습에 감동받은 사람들은 '정엽은 가수다'라는 말로 그를 칭송했습니다. '나는 선배다'라는 말로 조롱당했던 김건모와는 크게 대비되는 현상입니다. 더 이상 김건모를 비난할 필요는 없겠으나, 이번 일로 우리 모두가 커다란 교훈을 얻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알고 떠나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라는 싯귀가 어렴풋이 떠오르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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