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제빵왕' 신유경의 숨겨진 악역 본능, 변화가 시작되다 본문
'제빵왕 김탁구' 11회는 주인공들에게 있어 삶의 전환점이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김탁구(윤시윤)와 구마준(주원)이 정면승부를 시작하며 본격적인 제빵인의 길로 접어들었다는 점을 들 수 있겠지요. (관련글 : 구마준이 김탁구에게 이길 수 없는 이유) 이 젊은이들의 대결에서 이미 승자와 패자는 정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만, 뻔한 듯한 구도임에도 결코 뻔하지 않게 끌고 가는 작가의 능력 때문에 앞으로의 전개가 충분히 흥미로울 거라고 기대되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팔봉 선생의 손녀 양미순(이영아)은 역시 할아버지를 닮아 사람 보는 눈이 날카롭더군요. 처음에는 구마준의 고상한 허우대에 반해서 호감을 가졌지만 차츰 그의 표리부동한 실체를 깨달으면서 마음이 멀어지는 모양입니다. 구마준의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를 보며 직감적으로 제빵실을 뒤엎은 범인이 그라는 것을 깨닫는 장면도 보였지요. 이제 그녀 못지않게 단순하고 순수한 김탁구에게로 관심이 끌리기 시작합니다. 엄마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앞으로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탁구를 바라보는 미순의 표정은 사랑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다른 한편에서 조용히, 한 여인의 무서운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자칫 놓치기 쉬운 부분이었는데, 제가 요즘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지켜보는 배역이라서인지 자꾸만 그녀의 표정과 대사들을 되짚어 보게 되더군요. 그러다가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 동안 너무도 아름다운 첫사랑의 이미지와, 정의감에 불타는 운동권 대학생의 이미지로 강하게 어필하다보니, 처음부터 신유경(유진)의 캐릭터가 악역이었다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던 거예요.
"유경아, 세상을 바꾸려고 하지 마. 정 억울하고 답답하면, 네가 바뀌면 되는 거야. 네가 가진 자, 있는 자가 되면 세상도 너를 따라 자연히 바뀌게 되어 있어. 세상 이치가 그래."
운동권 학생을 체포해다가 취조하면서, 과연 저렇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주는 형사들이 있었는지는 경험을 안해봐서 모르겠습니다만, 충분히 달콤한 유혹이었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비록 전형적인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이긴 하지만, 그만큼 현실적이니까요. 세상을 바꾸는 것보다야 자기를 바꾸는 것이 더 쉽고 편하고 안전한 길이지요. 형사의 차분한 목소리가 신유경의 마음을 흔들어 놓은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녀의 눈빛이 순간 심상치 않게 번뜩이는 것을 보았거든요.
신유경의 내면에서 잠자고 있던 악역 본능이 이제 깨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녀를 마음을 돌아서게 했을 몇 개의 장면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유경은 어려서부터 자기를 편들어 주고 웃게 해 주던 든든한 남자친구, 첫사랑 탁구에게 숨어들고 의지했으나, 현실적으로 힘없는 자에 불과했던 김탁구는 그녀를 지켜주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바라보기만 했습니다. 사랑만으로 살아가기에 이 세상은 너무나 험악한 곳임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것입니다.
취조실 앞에서 마주친 구자림은 신유경의 단짝 친구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를 외면한 채 비서실장 한승재의 비호를 받으며 석방되어 나가 버립니다. 취조실로 끌려 들어가며 공포에 질린 유경이 "자림아~ 자림아!" 하면서 애타게 불렀으나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있는 곳을 발설한 죄책감 때문에 차마 유경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거겠지요. 그러나 자림의 속마음을 알지 못하는 유경은 상처를 받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형사도 말합니다. "자림이 그 아이, 있는 집 딸이라며? 그것 봐라. 힘 있으니까 바로 풀려나지 않니?"
이마에 멍이 들고 입술은 터져서 피가 흐르는 채, 차가운 감옥 바닥에 쓰러져 있던 신유경은 문이 열리자 간신히 고개를 들어 눈부신 햇빛 속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봅니다. 언제나 자기가 '겁쟁이'라고 부르며 비웃던 구마준이 거기에 있습니다. 하나도 잘난 것 없는 겁쟁이 녀석 주제에, 있는 집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렇게 폼나게 서 있습니다. 자기가 그 녀석보다 훨씬 똑똑한데, 자기는 힘 없어서 이렇게 비참한 몰골로 바닥에 쓰러진 채 그 녀석을 올려다 보아야 합니다. 외면하고 스쳐 지나가는 구자림을 보았을 때처럼, 자기를 구해 주러 들어온 구마준의 모습도 유경에게는 상처가 되었을 것입니다.
힘 없는 자들은 마음대로 사랑도 못합니다. 유경은 아직도 탁구를 사랑하는데, 탁구는 앞으로 2년 동안이나 자기를 만나지 않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유도 모르는 채 눈물의 키스로 첫사랑과 헤어졌는데, 알고 보니 구마준이 시킨 거였답니다. 그 잘난 집안의 힘을 이용해서, 자기를 구해 주는 댓가로, 치사하게 탁구에게 그런 조건을 걸었다 합니다.
"그래, 있는 자가 되어야만 사랑도 할 수 있고, 힘을 가져야만 내가 원하는 것들을 이룰 수 있단 말이지! 좋아, 그렇게 해 주겠어." 그들의 애틋한 키스는 사실, 아름다운 신유경이 무섭게 변화하는 첫걸음이었습니다. 못 가진 자로서 겪어야 했던 억울한 일들에 대한 사회적 복수심도 있겠지만, 가진 자로서의 힘을 어설프게 휘두르며 자기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고 첫사랑과 헤어지게 만들어 버린 구마준에 대한 복수심이 더 크지 않을까 짐작합니다. 믿었던 친구 구자림에 대한 배신감도 한몫 더했을 것이구요.
이제 신유경은 거부할 수 없는 팜므파탈의 매력으로 구마준에게 다가서겠군요. 그녀가 겨누는 창끝이 거성가(家)를 향하고 있으니, 신유경의 존재는 앞으로 온갖 분란과 돌풍의 씨앗이 될 것입니다. 그 와중에 진심으로 사랑하는 김탁구에게도 피할 수 없는 상처를 주겠지요. 김탁구는 그녀에게서 사랑의 배신을 당할 뿐만 아니라, 거성 구일중의 아들로서 그녀의 공격을 막아내기까지 해야 할테니, 그의 앞날에는 극심한 고통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가슴 아프지만, 정확히 예정된 길로 걸어가는 이 드라마의 캐릭터들은 더할 수 없이 매력적입니다. 짧게 지나가는 장면 하나에도 가볍지 않은 의미가 부여되고 매사에 인과관계가 확실하니, 그들의 행동에는 시청자가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는 설득력이 확보되거든요. 선역과 악역을 막론하고, 그 누구 하나 진심으로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드라마 '제빵왕 김탁구'는 후반으로 갈수록 그 기대감을 더해 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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