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제빵왕' 구일중을 바라보는 아들들의 시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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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탁구 (윤시윤)
나에게 아버지는 그리움이다. 아버지가 없는 줄 알고 어머니와 둘이 살았던 청산에서도 나는 언제나 아버지가 그리웠다. 엄마만 있으면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게 없었지만, 사람들이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놀려도 괜찮았지만, 가끔씩 다른 녀석들이 아버지의 무등을 타고 가는 모습을 보면 누군지도 모르는 아버지가 그리웠다. 내게도 아버지가 있다면 저렇게 해주실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나에게도 아버지가 생겼다. 내 아버지는 그 커다란 공장에서 산처럼 수북히 쏟아져 나오는 빵들의 주인이었고, 대궐같이 으리으리한 집에 사는 임금님이었다. 말도 안되는 소리였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어머니는 나를 그 집에 남겨두고 홀로 청산으로 돌아갔다.
나는 외로웠다. 이제껏 한 번도 사람들이 나를 그토록 미워한 적은 없었다. 나처럼 잘 웃고 노래도 잘 하고 넉살 좋은 녀석에게 끝까지 찬바람 부는 얼굴로 대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기에, 사람들은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나를 놀리다가도 잠시 후면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를 부르는 나를 보며 피식 웃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곳의 사람들은 달랐다. 내가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이유만으로 나를 진심으로 미워했다. 나는 서러웠고, 서러운 만큼 외로웠다. 그 새벽이 오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날이 밝으려면 아직도 멀었는데, 잠든 나를 깨우는 것은 고소하고 달콤한 빵 냄새였다. 청산의 빵집에서 솔솔 풍겨나오던 그 냄새가 너무도 반갑고 정겨워서 나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고, 자석에 이끌리듯이 그분의 작업실로 들어갔다. 공기중의 수분을 감지하기 위해 팔을 벌리던 그분의 모습... 능숙한 솜씨로 빵을 만들던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근사한지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그분이 바로 나의 아버지였다.
아버지의 작업실에는 절대로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그랬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고 자림이 누나가 말했었는데, 나는 들키고 말았다. 하지만 "빵 냄새에 이끌려 왔다"고 솔직하게 말했을 뿐인데, 아버지는 화를 내시지 않았다. 오히려 그 자리에 남아서 빵 만드는 작업을 지켜보아도 된다고 하셨다. 그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내 아버지는 그 새벽에 나에게 빵을 가르쳐 주셨고, 나와 함께 갓 구운 빵으로 아침 식사를 즐기셨다. 평소에 좀처럼 웃지 않던 아버지의 얼굴에 활짝 피어나던 미소를 잊을 수 없다. 김탁구라는 이름을 버린 채 구형준이 되고 싶지 않았고, 사라져 버린 어머니를 찾아야 했기에 마지막 인사조차 드리지 못하고 떠나왔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신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힘겨울 때면, 엄마를 찾아다니며 떠돌던 12년의 삶이 너무도 힘겨울 때면, 나는 가끔씩 그분과 함께 했던 따뜻한 새벽을 떠올렸다. 비록 그 집안 때문에 이 모든 일이 벌어졌기에, 내 어머니에게 몹쓸 짓을 해서 나와 헤어지게 만든 것도 그 집안 사람들이었기에, 그 집안에 관련된 일들은 떠올리고도 싶지 않은 추억이었지만, 그래서 나는 빵이 죽도록 싫었지만, 얽힌 실타래 속에서 빛나는 한 가닥의 황금실을 뽑아 내듯이, 나는 용케도 아버지와의 추억만을 살짝 뽑아냈던 것이다.
내게 주려고 하셨던 이름을 버리고 떠나온 것은 나 자신이었다. 비록 한실장 아저씨에게 속아서 그런 것이지만, 어쨌든 아버지에게 등을 돌린 것은 나였다. 팔봉 선생님 앞에서 그분과의 추억을 떠올리니 조금은 코끝이 찡했지만, 모두 지나버린 일일 뿐이다. 나는 결코 돌아갈 수도 없고 아버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겠지. 그래도 빵 냄새 가득했던 그 새벽의 작업실을 잊지는 않을 거다. 이렇게, 나에게 아버지는 그리움으로 남았다.
2. 구마준 (주원)
나에게 아버지는 두려움이다.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아무리 무서워하고 어려워해도 나는 별로 무섭지 않았었다. 일요일이면 늦잠이나 자고 싶은 나를 억지로 깨워서 청산의 빵 공장에 데려갈 때도, 그저 귀찮고 짜증스러웠을 뿐이지 무섭지는 않았다. 그때는 내가 아버지의 하나뿐인 아들, 천금같이 귀한 아들이었다.
탁구라는 아이가 나타났을 때, 생전 처음으로 나는 약간의 두려움을 느꼈다. "너 정말 겁쟁이구나!" 신유경 그 계집애가 했던 말이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나는 그게 두려움인 줄을 모르고 있었는데, 그 계집애가 귀신처럼 나의 수치스런 감정을 잡아냈던 것이다. 하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두려워한 것은 탁구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나에게만 머물러 있을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아버지의 눈길이 그 녀석에게로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시선을 잃는다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임을,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탁구가 싫었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나를 두려움의 수렁에 빠뜨린 것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가졌다고 착각하며 살아왔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아이였던 것이다. 한실장 아저씨가 내 아버지라는 것을 알고 난 후, 나는 어디엘 가서도 내가 누구의 아들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사람들 앞에서 당당히 자기의 정체를 밝힐 수 없는 삶이란, 그리 기분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익숙할 대로 익숙해졌다. 그래서 이 팔봉 빵집에서도 나는 천연덕스럽게 서태조라는 낯선 이름으로 행세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 자신을 온갖 거짓으로 덕지덕지 색칠한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은 두려움 때문이다. 탁구가 떠나고 나서도 좀처럼 나에게 예전같은 시선을 주지 않는 아버지가 나는 두려웠다. 아버지의 관심은 곁에 있는 내가 아니라, 어디에서 떠돌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김탁구, 그 녀석을 향해 있었다. 혹시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나를 믿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는 게 아닐까? 나는 가끔씩 아버지에게 멱살을 잡혀서 집 밖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꿈을 꾸다가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났다.
아버지에게서 내쳐진다 해도 어머니가 있는 한, 내가 빈털터리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아버지를 잃기가 싫었다. 나에게 아버지의 존재는 경제적 배경, 그 이상의 무엇이었기 때문이다. 탁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에 왜 그토록 화가 났었는지, 내가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왜 그토록 깊은 슬픔에 잠겼었는지, 나는 훨씬 나중에야 깨달았다. 나도 모르게 나는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있던 거였다.
지난 12년의 세월은 아버지로부터 인정받기 위한 몸부림의 시간이었다. 아버지의 시선을 내게로 돌리기 위해 나는 못할 게 없었다. 그러나 좀처럼 나를 보아 주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많이도 방황했다. 행여 사고라도 치면 돌아봐 줄까 해서 몇 차례 일도 저질렀지만, 그래도 아버지의 눈빛은 지극히 담담할 뿐이었다. 어딘가 먼 곳을 향해 있는 그 눈빛 때문에 나는 미칠 것만 같았다.
일본에서 돌아와 팔봉 빵집에 취직한 것은 회심의 카드였다. 아버지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분, 팔봉 선생께 직접 제빵 기술을 전수받는다면 어찌 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래서 이곳에 들어오기까지 나는 오랫동안 철저한 준비를 했다. 그런데... 김탁구 그 녀석이 다시 나타났다. 그놈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는데, 처음부터 이곳에 들어올 생각도 없었다는데, 어이없게도 나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이 높은 문턱을 넘은 것이다.
다시 시작인가? 12년 전에도 갑자기 나타나서 내 삶의 모든 것을 뒤집어 놓은 이 녀석, 불길하다. 하지만 이제 겨우 아버지의 마음에 들 기회를 잡았는데, 이 녀석이 또 다시 가로채어 가도록 놔둘 수는 없다. 나의 아버지는 내 것이다. 내가 그 피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더욱 아버지를 갈망한다. 그런데 그 갈망이 채워지지 않을까봐 나는 두렵다. 그 시선이 끝내 나를 향하지 않을까봐, 나는 미치도록 두렵다. 이렇게, 오늘도 아버지는 나에게 두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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