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제빵왕' 구마준이 김탁구에게 이길 수 없는 이유 본문
구마준은 어려서부터 비겁했습니다. 느닷없이 집안에 끼어들어온 김탁구의 존재가 탐탁치 않은 마음이야 당연한 것이겠으나, 그를 정당하게 상대하지 않았습니다. 누나 자경의 샤프펜슬을 가져다가 탁구의 책상 서랍에 넣어두는 치졸한 방법으로 도둑 누명을 씌웠으며, 엄마를 찾으러 가는 탁구와 동행하여 집을 나갔다가 돌아와서도 자기가 훔친 엄마의 패물을 "탁구가 시켜서 그랬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자기 출생의 어두운 비밀을 알기 전에도, 알고 난 후에도 마준의 비겁한 태도에는 변화가 없었습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기가 가진 것들의 기반이 탄탄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위기의식을 느껴서인지, 구일중의 인정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다해 노력하게 되었다는 한 가지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생의 비밀을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마준을 대하는 구일중의 태도는 언제나 담담할 뿐이었고, 그는 잃어버린 친아들 탁구의 행방을 찾는 데에만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지요. 자신이 그의 핏줄이 아님을 알기에 구마준의 불안은 날로 커져만 갔습니다.
타고난 성품이 그러한 것인지, 아니면 끝없는 불안이 그의 내면적 성장을 방해했는지, 12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도 구마준의 비겁함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키는 훤칠하게 자랐고, 고등교육을 받은 청년답게 겉으로는 고상한 기품도 갖추었고, 실력으로만 따지면 팔봉 제과점의 베테랑들이 모두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제빵 기술도 갖추었지만, 오직 그의 마음만은 열 두 살의 어린아이 그대로였습니다.
자기가 받지 못한 구일중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 김탁구... 자기가 갖지 못한 천부적 후각을 지닌 김탁구... 자기에게 없는 친화력으로 모든 사람의 관심을 받는 김탁구... 이상하게도 자꾸만 신경쓰이는 계집애 신유경의 사랑을 받는 김탁구... 마준이는 이런 김탁구가 싫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래서 아주 오래 전에 누나의 샤프펜슬을 가지고 장난쳤던 그 방식 그대로, 한밤중에 제빵실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탁구에게 뒤집어 씌웁니다. 그 얕은 수법이 어찌나 뻔하고 유치한지, 오히려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예전에도 자경이 누나의 날카로운 시선에 금방 들통났던 구마준의 어설픈 범죄 행각은, 이번에도 팔봉 선생의 통찰력을 피해가지 못하고 즉시 발각됩니다. 구자경이 비밀을 지켜 준 이유는 그의 친누나였기 때문이지만, 팔봉 선생은 무엇 때문에 그에게 다시 한 번의 기회를 허락했을까요? 그 노인은 역시 좋은 스승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사업가에 불과했다면 당장 구마준을 내쫓았을 것이지만, 팔봉 선생은 한 번의 실수로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에게서 기회마저 빼앗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 비뚤어진 녀석을 밖으로 내쫓아 봐야 제대로 살아가지 못할 터이니, 오히려 자기 옆에 두고 이끌어 주려 한 것입니다. 또한 좋은 스승답게 그의 잘못을 그냥 넘기지 않고 확실한 벌을 주었습니다. 살아있는 반죽을 죽여버린 구마준의 행동은 빵쟁이로서는 결코 저지를 수 없는 범죄였고, 자기 잘못을 남에게 덮어씌운 파렴치함은 깨어진 원석처럼 뾰족하게 남을 찌르는 위험한 성향이기에, 그것을 다듬어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2년의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팔봉 선생은 판단한 듯 합니다.
2년의 수련 기간 동안, 구마준이 어떠한 변화를 겪을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까지는 스승의 가르침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음이 확실합니다. 팔봉 선생 곁에서 머물게 된 2년의 시간은 구마준에게 있어 그 가치를 따질 수 없는 귀한 선물이요 기회이건만, 그는 오직 자기의 작은 잘못에 대해 주어진 가혹한 벌칙이라고만 여기며 마음속으로 불복하고 있으니까요. 지금으로서는 어떤 좋은 가르침도 '쇠귀에 경 읽기' 입니다.
이런 구마준에 비해 김탁구는 옳은 말을 진심으로 들을 줄 아는 귀를 가졌습니다. 그는 평소에 팔봉 선생의 손녀 양미순과 친하지도 않았으나 "주먹은 가장 마지막에 써야 하는 법이다" 라는 그녀의 말을 놓치지 않고 귀담아 들었습니다. 비록 엄마 김미순에게서 들었던 말과 오버랩되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유치장에서 풀려나와 "다시는 주먹을 쓰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김탁구의 모습은, 자기 잘못을 뉘우칠 줄 모르는 구마준의 태도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습니다.
탁구는 학생 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유경을 걱정하며, 그녀를 풀려나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다고 양미순에게 말합니다. 그 말을 엿들은 마준은 유경의 석방을 걸고 탁구에게 조건을 제시합니다. 저의 예상으로는 구마준의 비겁한 성격상 "이 팔봉 제과점에서 당장 떠나라" 뭐 이런 식의 조건이 아닐까 싶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가더군요. 하긴 그렇게 되면 더 이상 드라마의 진행이 안 되겠지요..ㅎㅎ
뜻밖에도 마준이 탁구에게 제시한 조건은 '정면승부'였습니다. 팔봉 선생이 제안한 2년 동안 서로 최선을 다해 제빵 기술을 익혀서, 2년 후에 열릴 시험에서 맞붙자는 것이었지요. 언뜻 보면 정당한 방법인 듯 싶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 보면 역시 구마준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상대의 약점을 잡고 하는 거래이기에 본질적으로 비겁합니다. 신유경을 사랑하는 김탁구로서는 원하든 원치 않든 구마준의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으니, 이 대결은 시작부터가 공정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모든 정신을 제빵 공부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우스운 이유를 들어, 앞으로 2년 동안은 신유경을 만나서도 안 되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는 조건을 덧붙인 것 또한 유치하고 비겁한 행동이었습니다. 사실은 자기가 그녀에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연적을 제거하려 한다는 그 속셈이 너무도 훤히 들여다보여서 딱할 지경이었지요.
이제 구마준은 김탁구에게 정면승부를 신청했으나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재능의 부족도 노력의 부족도 아닙니다. 오히려 노력하는 열정에 있어서는 탁구를 앞서고 있으며, 천부적인 재능 면에서는 탁구보다 못하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아 보입니다. 이런 그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비뚤어진 자존심과 그릇된 집착입니다.
천재는 노력하는 사람을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있지요. (정확한지는 모르겠지만^^;;) 구마준은 노력하는 사람의 전형이고, 김탁구는 즐기는 사람의 전형입니다. 김탁구는 비록 아픈 추억 때문에 한동안 빵을 멀리해 왔으나, 빵 만드는 냄새가 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그 냄새를 쫓아갈 만큼 본질적으로 빵을 굉장히 사랑하고 좋아하는 사람이지요. 그는 싫다고 하면서도 심심할 때면 반죽을 가지고 놀았으며, 아버지 구일중이 떠오를 때마다 빵 모양을 빚는 것으로 그리움을 달랬습니다. 노력하지 않아도, 집착하지 않아도 김탁구에게 빵은 그 자체로 생활이고 추억이었습니다.
그러나 구마준에게 빵은 '도전해야 할 목표'였을 뿐입니다. 이제껏 한 번도 마준이가 빵을 좋아한다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군요. 그는 빵 냄새를 맡으며 흐뭇해한 적도 없고, 빵을 맛있게 먹은 적도 없습니다. 그는 빵을 오직 머리로만 생각합니다. 그는 빵을 가슴으로 느끼지 못하고, 빵은 그의 생활 속에 녹아들어가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구마준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빵과 한몸처럼 융화되어 있는 김탁구를 이긴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렇게 매사에 탁구와 비교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너는 벌써 탁구에게 지고 있다는 거야. 모르겠니?" 소녀 신유경이 소년 구마준에게 건넸던 이 한 마디의 말이 정답입니다. 구마준은 김탁구를 이겨야 한다는 집착에 얽매여 살아왔습니다. 그 집착은 마준을 노력하는 사람으로 만들었으나, 즐기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구마준은 '빵을 만들고 싶어서'가 아니라 '김탁구를 이기고 싶어서' 그에게 대결을 신청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랑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유경에게 끌리는 마음은 진짜였지만, 어리석게도 구마준은 그녀에게 그 진심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사랑 앞에서마저 김탁구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저울질하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는 절대 그녀의 진실한 사랑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구마준의 불행한 캐릭터에 동정심을 느끼고, 어떻게든 마준이를 응원해 주고 싶은 저는, 그에게 무엇보다 먼저 집착을 버리라고 말해 주고 싶습니다. 그 집착이 그를 비겁하게 하고, 불행하게 하고, 승리자가 될 수 없게 합니다. 잔뜩 움켜쥔 손을 펼치면, 비로소 자기가 나아가야 할 길이 보이고 진정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구마준의 재능은 제빵일 쪽이 아니라 다른 방향에 있을 듯 싶거든요) 신유경과의 관계는 어찌될지 모르지만, 그 또한 마음을 비울 때에야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이기는 것'에 집착하는 그런 자세로는, 결코 일에서도 사랑에서도 승리할 수 없을 거예요.
* Daum 아이디가 있으신 분은 버튼을 누르시면, 새로 올라오는 제 글을 쉽게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천에는 로그인도 필요 없으니, 글이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의 손바닥 한 번 눌러 주세요..^^
'종영 드라마 분류 > 제빵왕 김탁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빵왕 김탁구' 한승재의 오래된 일기장 (2) | 2010.07.24 |
---|---|
'제빵왕' 신유경의 숨겨진 악역 본능, 변화가 시작되다 (33) | 2010.07.15 |
'제빵왕' 구일중을 바라보는 아들들의 시선 (6) | 2010.07.09 |
'제빵왕 김탁구'VS '나쁜 남자' 그 공통점과 차이점 (12) | 2010.07.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