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김탁구' 한승재에게서 '설원랑'의 향기가 난다 본문
'제빵왕 김탁구'는 참으로 묘한 매력의 드라마입니다. 막장의 분위기를 결코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꽤 진지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해 주고 있거든요. 어떤 면에서는 직설적으로, 또 어떤 면에서는 역설적으로 말이지요. 주인공 김탁구(윤시윤)의 순수함과 정의로움을 통해서 직설적인 교훈을 주고 있다면, 아들을 낳지 못한다는 이유로 가정 내에서 벼랑 끝의 위기까지 내몰렸던 한 여자 서인숙(전인화)의 타락을 통해서는 역설적인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서인숙은 남편의 비서실장 한승재(정성모)와 불륜을 저질러 낳은 아들 구마준을 남편 구일중(전광렬)의 아들이라 속여서 키웠으며, 시어머니(정혜선)가 죽음을 맞이하도록 방조했습니다. 이 정도면 파렴치하고 용서받지 못할 악녀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드라마를 처음부터 시청한 사람들은 그녀를 온전한 악녀로 보고 있지 않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초반에 그녀가 얼마나 부당한 이유로 냉대받았는지를 보았기 때문에 그 연민으로 인해서 그녀의 죄악을 일부나마 용서하게 된 것이고, 두번째 이유는 그녀의 곁에서 더욱 큰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한승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한승재는 서인숙의 유혹을 받아들여 구마준을 낳게 했고, 그녀의 모든 계획을 철저히 도왔습니다. 구일중의 어머니가 쓰러져 빗속에 누워 있을 때, 서인숙은 원래 구하려고 했지만 한승재가 가로막았습니다. 자신들의 비밀을 알게 된 이상, 그 노인이 살아나는 것보다야 죽는 편이 훨씬 나았을 테니까요. 이렇게 간접적 살인을 조장한 것으로도 모자라, 한승재는 적극적으로 범죄를 사주하기 시작합니다.
술주정뱅이 불량배인 신유경(조정은)의 아버지에게 사주하여 탁구의 어머니 김미순(전미선)을 강제로 범하게 하였으며, 급기야 엄마를 만나게 해준다는 구실로 어린 탁구를 거성가에서 쫓아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모든 약속은 거짓말이었지요. 김미순은 이미 생사조차 알 수 없이 행방불명이 되었고, 한승재의 지시에 따라 김탁구를 데리고 간 사내는 그 아이를 뱃사람들에게 팔아넘기며 다시는 한국땅을 밟지 못하도록 하라고 명령합니다. 자칫 국제 미아가 될 뻔했던 탁구는 다행히 도망쳐서 무사할 수 있었지만, 약한 여자와 어린아이를 상대로 한승재가 저지른 죄악은 간담이 서늘하도록 악질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상하게도 한승재가 무조건 밉고 싫지만은 않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서인숙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 구마준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가슴 저린 무언가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사랑하는 여자이지만 그녀는 자기의 여자가 아니고, 자기 목숨과도 바꿀 수 있는 아들이지만 그 아들은 자기 아들이 아닙니다. 가장 원하는 것이며 가장 소중한 것을 소유할 수 없는 한승재는 지극히 불행한 사람입니다.
"인숙아, 내가 있는 한 너와 마준이는 잘못되지 않아." 시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벌벌 떠는 서인숙의 어깨를 붙잡고 나직히 위로하는 한승재의 목소리에는 깊고 진실한 사랑이 담겨 있었기에, 잠시 서인숙의 캐릭터에 몰입했던 저는 어느 사이엔가 한승재에게 한없는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이런 남자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든든한 신뢰감을 순간 느꼈던 것입니다.
"마준아, 너는 네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될 거다. 더 크게 성공할 거야. 내가 너를 꼭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 라고 한승재가 말하자, 버릇없는 꼬마 구마준은 바락바락 대들었습니다. "아저씨가 뭔데? 실장 주제에... 아저씨가 뭔데 나를 그렇게 만들어 줘요?" 그러자 한승재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마준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나는 너를 위해 죽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순간, 천방지축 마준이조차 더 이상 대들지 못하고 한승재를 가만히 쳐다보았습니다. 한승재의 그 말이 100% 진심이라는 것을, 어린 마준이는 몰랐겠지만 우리는 알고 있었습니다.
마준이가 구일중의 후계자가 된다 해도 정작 한승재에게 돌아오는 것은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서인숙은 한승재를 사랑한다기보다는 이용할 생각을 우선적으로 하고 있는 여자인데다가, 마준이도 한승재를 아버지로 인정할 생각은 전혀 없어 보이니까요. 그들 모자가 부와 권력을 얻게 된다 해도 한승재는 여전히 그들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한승재가 바라는 것은 돈이나 권력이 아니라, 서인숙의 사랑과 구마준의 행복입니다. 그가 어쩌다가 서인숙에게 화를 낼 때는, 서인숙이 남편 구일중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일 때였습니다. 김미순을 질투하며 자기를 몰아붙이는 서인숙에게 "구일중이 그 여자를 찾아갔던 게, 그렇게 화나고 속상하니? 대체 나는 너한테 뭐니?" 하고 묻는 한승재의 얼굴에는 사랑의 아픔이 묻어나고 있었습니다.
아무런 보답도 바라지 않고, 한승재는 서인숙과 구마준 모자를 위해 온갖 악행을 저질러 가며 그들을 보호하려 합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악역을 맏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일이니까요. 한승재가 아무리 악인이라고 해도 살인, 강간, 유괴를 사주하면서 즐겁고 기쁜 마음이었을까요? 결코 아닐 것입니다. 사이코패스가 아닌 이상 인간으로서 타고난 양심은 존재하기 때문에, 속으로는 괴로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랑하는 여자와 자기의 아들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습니다. 방법은 악했지만 그 마음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한승재는 어린 시절엔 구일중의 친구였으나 이제는 사석에서도 말을 놓지 못하는 부하직원일 뿐입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그를 구일중의 어머니가 데려다가 공부도 시키고 보살펴 주었다는 설정이군요. 서인숙이 구일중과 결혼하기 전에, 한승재와 서인숙은 사랑하는 사이였습니다. 그런데 서인숙이 그를 버리고 구일중을 선택했습니다. 사랑보다 부와 권력을 선택한 셈이니, 그 이후에 닥쳐온 불행도 어쩌면 서인숙 자신이 초래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그런데도 그녀를 바라보는 한승재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껏 한 번도 한승재에게 따로 가족이 있다는 내용이 등장하지 않았으니, 아마도 그는 결혼조차 하지 않고 일편단심 서인숙만을 바라보고 살아온 모양이에요. 이제 사랑하는 그녀에게서 태어난 자기의 아들까지 세상에 존재하고 있으니, 한승재가 살아가는 이유는 온전히 그들 모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제빵왕 김탁구'가 시작될 무렵, 서인숙의 캐릭터를 두고 '제2의 미실'이라는 말들까지 나왔었지요. 하지만 그것은 전인화가 고현정에 비견될 만한 연기력과 카리스마를 지녔기 때문일 뿐, 정작 미실과 서인숙에게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는 뚜렷히 잡히지 않았습니다. 아비가 다른 자식들을 낳았고, 권력욕이 대단하다는 것 정도? 하지만 그것만으로 '제2의 미실'이라 하기엔 좀 무리가 있다 싶었지요.
오히려 이제 보니 한승재의 캐릭터가 '제2의 설원랑'이라고 할만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드라마 '선덕여왕'에서의 설원랑은 언뜻 악역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사실은 악역이었습니다. 그는 미실의 출세를 돕는 과정에서 수많은 악행을 저질렀을 것이며, 여자와 어린아이라 해서 그의 마수를 벗어났을 리는 없습니다. 스무살 가량의 어리고 힘없는 덕만공주를 잡아다 죽이려고 한 것도 수차례였으며, 비리를 저지른 일도 아마 부지기수였을 것입니다. 미실이라는 인물이 매력적이긴 했지만 그다지 공명정대한 캐릭터는 아니었으므로 그녀를 보좌하려면 결코 정당한 방법으로는 가능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도 설원랑의 캐릭터는 지금 제 머릿속에 '선덕여왕'에서 발견한 가장 멋진 캐릭터로 남아 있습니다. 물론 외모적인 면에서는 젊은 비담에게 미치지 못하였으나, 막판에 비담이 선덕여왕을 믿지 못하고 반란을 일으키는 '못난' 행동을 벌였던 것에 비한다면, 미실을 향한 설원랑의 사랑은 한 번도 발을 헛디디거나 빛바랜 적이 없었으니까요. '사람'으로서 보면 나쁜 사람이지만, '여자'로서 볼 때는 최고의 '남자'라고 할만한 캐릭터였던 것입니다. 너무 완벽한 사랑이기에 존재할 수 없을 듯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감미로운 꿈을 꾸게 하는 인물이 바로 설원랑이었습니다.
그에 비해 한승재의 캐릭터는 악행을 저지르는 장면들이 너무 적나라하게 화면에 등장함으로써 호감이 발생할 여지를 차단하고 있습니다. 너무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악행들이 그의 손으로 자행되면서, 아무리 한 여자에 대한 사랑과 자식에 대한 부성으로 그런다고 한들, 저게 인간이냐?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화면에 등장하지만 않았을 뿐 설원랑도 똑같이 그랬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시대상황으로 미루어 보면 더 심했을지도 모르지요.
한승재가 악인이 아니라고 말할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악인이라 해도 저는 그 캐릭터에 왠지 애정이 가는군요. 설원랑은 그래도 미실에게서 진심어린 사랑과 신뢰를 받았었지만, 한승재는 서인숙에게서 아무것도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방적인 사랑으로 인해 망가져가는 그의 모습이 더욱 서글프기도 합니다. 모두가 외면하는 철면피한 악역일지라도, 저만은 그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해주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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