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제빵왕 김탁구' 전인화, 설득력 없이 망가지는 최악의 악역 본문
'제빵왕 김탁구'의 불륜 미화는 나날이 심해져 갑니다. 김미순(전미선)은 할머니(정혜선)이 내미는 돈조차 거절하고 아들의 미래를 위해 자신을 온전히 희생하는 숭고한 모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구일중(전광렬)은 탁구(오재무)에게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그간의 권위 일변도에서 비롯된 비호감을 벗고 호감형 아버지로 돌아섰습니다. 게다가 탁구가 유경(조정은)의 술주정뱅이 아버지에게 맞고 있을 때, 더없이 자랑스러운 모습으로 나타나서 "내가 바로 이 아이의 아버지되는 사람이오" 라고 자신을 밝히고 시원스레 주먹을 날려 상대방을 쓰러뜨림으로써 터프한 면모까지 과시했습니다.
김미순과 구일중의 캐릭터를 살리기 위해 서인숙(전인화)의 캐릭터는 대책없이 망가져 갑니다. 구일중이 빵공장에 마준이와 탁구를 함께 데려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서인숙은 무작정 공장으로 쫓아가 직원들 앞에서 탁구를 가리켜 '천한 아이'라고 하면서 남편에게 주책스런 말들을 마구 내뱉은 후, 결정적인 자충수를 두고 맙니다. "빵을 가르치려면 저 아이한테나 가르쳐요. 나는 내 아들 손에 밀가루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고 말하더니, 마준의 손을 잡고 먼저 집으로 돌아와버린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한승재(정성모)와 밀회를 할만한 장소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법 하건만, 굳이 집안에서, 남편이 자리를 비운 작업실에서, "당신은 내 남자야. 내 아들의 아버지라구." 라고 시원스레 자기의 비밀을 스스로 폭로하며 그를 끌어안는 작태를 연출합니다. 시어머니가 잠자다 말고 나와서 듣고 있을 거라는 예상은 당연히 못했겠지만, 아무리 대담하다 해도 집안에서 벌일 수 있는 행각은 아니었습니다. 마치 누구 들으라는 것처럼 마준의 출생 비밀을 발설해 버린 것도 그렇고 말이지요. "드디어 미쳤구나!" 라는 생각 외에는 들지 않더군요.
대체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이건 악역이 아니라 히스테리 성향을 지닌 바보에 가깝습니다. 그녀의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나씩 나열해 보자면 이렇습니다.
1.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식식거리며 공장까지 쫓아갔다.
2. 직원들 앞에서 오너인 남편의 체면을 깎아내렸다.
3. 자기 아들 마준을 구일중의 후계자 자리에서 스스로 끌어내리는 발언을 했다.
4. 마준을 데리고 먼저 서울로 돌아왔다.
5. 한승재와 하필 집안에서 만나며 큰 소리로 모든 비밀을 다 말해버렸다.
도대체 머리가 있는 여자라면 할 수 없는 행동들입니다. 서인숙의 행동으로 인해 그러잖아도 게으른 마준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던 구일중의 마음은 더 멀어지고, 상대적으로 빵 제조업에 천부적 재능을 보이는 아들 탁구에게로 급격히 가까워졌습니다. 더구나 "내 아들 손에 밀가루 묻히게 하고 싶지 않아요!" 라니, 이제껏 그녀가 아들을 두고 부려왔던 욕심은 한 순간의 히스테리로 날아가 버린 걸까요?
마준을 먼저 데리고 와버린 서인숙의 행동은, 탁구를 사이에 두고 구일중과 김미순이 재회할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서인숙의 과한 행동에 질릴대로 질려버린 구일중이, 순종적이고 여성적인 김미순을 다시 만나서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하긴 서인숙은 처음부터 그다지 신중하거나 이성적인 캐릭터는 아니었습니다. '홧김에 서방질한다'는 말이 제대로 어울리는, 심하게 감정적이고 과격한 캐릭터였지요. 하지만 한승재와의 사이에서라도 아들을 얻어야만(?) 했던 그녀의 절박한 심정을, 굳이 이해하려고 애써보면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4회에서 보여준 그녀의 행동은 도무지 이해할래야 할 수 없는 행동들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서인숙을 말도 안 되게 망가뜨림으로써 드라마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갑니다. 서인숙 때문에 구일중과 김미순은 다시 만나서 지고지순한(?) 사랑을 불태웠고, 서인숙 때문에 마준이 출생의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정혜선 뿐만 아니라 마준이까지도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자기가 누구의 아들인지를 알았거든요. 모든 일들이 서인숙의 자충수 때문에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서인숙이 망가지지 않으면 드라마는 제대로 진행조차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실 구일중의 캐릭터는 본받을만한 아버지상도 아니고 멋진 남성상도 아니었습니다.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아내와 자식들에게 단 한 번도 자상한 모습을 보여 준 적 없는, 권위주의의 화신일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탁구를 대하며 처음으로 따뜻한 부성을 드러내는데, 그 이유조차 자식에 대한 애틋함보다는 탁구가 지닌 재능 때문이었습니다. 사업을 물려주려고 어려서부터 교육을 시켜 왔지만 도통 재능을 보이지 않는 마준을 보며 답답함에 속터지다가, 천부적인 후각과 재능을 지니고 빵 제조업에 관심까지 보이는 탁구를 만나니 반가웠던 것이지요.
그런 구일중이건만 서인숙의 표독스러움이 너무 지나쳐 보는 시청자마저 질리게 만들 정도이니, 상대적으로 그 남자의 외도는 이해할만한 것이 되어가고, 김미순과의 러브라인은 애틋하게만 그려집니다. 자기를 닮은 아들 탁구와 순종적으로 자기를 떠받드는 여자 김미순을 다시 만나면서, 점차로 구일중은 자상한 아버지가 되고, 멋진 남자가 되어 갑니다. 드라마 상으로 보면, 모두 서인숙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마준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할머니는 그 사실을 구일중에게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습니다. 너무 일찍 밝혀지면 긴박감이 떨어지니까요. 그 과정에서 한승재와 서인숙은 더욱 더 무서운 범죄를 저지르겠지요. 할머니와 김미순은 그들의 손에 죽게 될지도 모릅니다. 자기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 마준이는 더욱 어두운 귀공자로 성장해서 어머니의 뒤를 이어 악역의 중심이 되겠지요. 사실 참으로 뻔한 이야기입니다.
어떤 설정을 하든,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어 가든 '작가 마음대로' 이지만, 저는 상당히 궁금합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설득력을 확보하지 못할 만큼 서인숙을 망가뜨리고 있는지 말입니다.
사실 서인숙은 피해자인데 처음부터 가해자로 뒤바뀌어 설정되었던 데다가, 점점 더 망가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하고 있습니다. 고통 속에서도 현명하게 이성적으로 대처하면서 설득력있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악역이라도 매력적일 뿐 아니라 주인공 모자(母子)의 지나친 미화로 인한 거부감도 줄일 수 있었을텐데 말입니다. 서인숙의 행동은 너무 감정적이고 말이 안되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고, 이런 식으로 불륜 커플을 미화하며 본부인의 캐릭터를 막장으로 만드는 것은 다분히 구세대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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