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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 한준수의 오래된 일기장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크리스마스에' 한준수의 오래된 일기장

빛무리~ 2009. 12. 18.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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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서러운 비가 내리던 봄의 어느 날...

오늘 내가 버린 것은 춘희가 아니다. 인간으로서 타고난 본래의 욕망이다. 나는 그녀를 버리면서 나의 모든 욕망도 함께 버렸다.

우리는 단지 사랑했을 뿐인데, 우리가 사랑한다는 이유로 모든 사람이 우리를 미워했다. 나는 춘희에게 도망치자고 말했다. 그녀는 두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새벽, 첫 기차를 타고 떠나기로 우리는 약속했다. 지금쯤 그녀는 기차역에서 무거운 짐을 손에 든 채 하염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첫 기차를 놓치고, 두번째 기차도 놓치고, 그렇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나는 비겁한 사내다. 앞으로 다가올 고난들이 두려워 진정한 사랑을 버린 나는,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비겁한 사내다. 춘희에게로 달려가는 대신, 따뜻한 영숙이의 집으로 찾아가 마음에도 없는 여자의 손을 잡는 순간, 나는 느꼈다, 나의 욕망이 내게서 달아나버렸다는 것을. 나의 욕망은 비겁한 사내가 싫어서 떠난다고 비웃으며 내 속에서 빠져나갔다.

저녁 무렵, 술집 작부인 춘희 어머니가 나를 찾아와 땅을 치며 통곡했다. 그녀가 집을 나가 버렸다면서, 나를 붙잡고 애타게 그녀의 소식을 물었다. 그렇게 나의 첫사랑은 나에게서 버림받고 홀로 떠나버렸다. 욕망을 잃어버린 것은,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죗값이었다. 나는 그 벌을 달게 받기로 결심했다.


1996년, 햇빛이 찬란하게 부서지던 어느 가을 날...

느닷없이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다. 동네 사진관에 전시되어 있던 우리 가족사진에 누군가 염산을 뿌렸다고 했다. 어차피 세상에는 별의별 인간이 다 있게 마련이다. 사진이 망가진 것쯤의 일은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영숙이가 깜짝 놀라며 내 소매를 잡아 끌었다. 누군가 우리 가족에게 원한이라도 갖고 있는 게 아니냐면서 소란을 피웠다. 귀찮았지만, 나는 그녀를 따라 일어섰다. 처음 그녀의 손을 잡던 20년 전 그날부터, 나는 그녀가 하자는 대로 모두 따라 주었다.


그렇게 도착한 경찰서 안에서, 나는 20년 전, 잃어버렸던 나의 욕망을 보았다. 아니, 내가 버렸던, 아니, 나를 버리고 떠났던 나의 욕망이 몰라볼 만큼 신산스러운 모습으로 경찰서 안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붉은 립스틱, 머리에 꽃을 달고 있는 춘희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내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 동안 고요하던 내 가슴이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짐짓 차가운 얼굴로 돌아선 것은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비겁한 사내였다.


1996년, 하늘조차 보이지 않던 어둑한 초겨울 날...

지용이가 죽었다. 내 아들 지용이가 죽었다. 울고 싶었다. 나도 사람이라서, 내 자식의 싸늘한 시신 앞에서 나도 소리내어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내 앞에서 울다가 쓰러져버린 영숙이 때문에, 나는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릴 수가 없었다.
나는 끔찍하도록 비겁한 사내였다. 내가 받아야 할 죗값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의 자식으로 살기에, 지용이는 너무 완벽한 아들이었다. 하늘에서, 그 아이를 잘못된 자리로 내려보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제 자리를 찾게 하기 위해서 부랴부랴 데려간 것일까? 그 아이는 실수로 잠시 이 세상에 떨어졌던 불운한 천사였을까?


지완이가 집을 나갔다. 내 딸 지완이가 집을 나갔다. 제 오라비의 장례가 끝나자마자, 편지 한 장 남겨둔 채 홀로 떠나 버렸다. 내 딸은... 오래 전, 춘희가 그랬던 것처럼, 찬바람 부는 기차역에서 혼자 커다란 짐을 들고 서 있었을 것이다. 욕망을 잃은 것으로 죗값을 치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지난 날들은 얼마나 어리석었던가? 그 평온한 날들의 댓가가 지금 이렇게 끊임없는 풍랑으로 나를 몰아치고 있다.

내 딸은 제 어미가 하는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오라비 대신 네가 죽었어야 한다고 외치던 제 어미의 목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무정한 어미에게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나무토막처럼 그녀를 부축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는 거대한 운명에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런 영숙이가 바로 내가 선택한 여자였다. 이 모든 일들이 나로 인해 일어났다. 누구를 탓할 수도 없었다.


2009년 12월 9일

깨어진 유리잔을 다시 붙일 수 없는 것처럼, 한 번 내 속을 빠져나간 욕망은 쉽게 내 안으로 들어오지 못했다. 고향을 찾아온 춘희와 함께, 나의 욕망도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 돌아왔으나, 그 후로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으나, 그렇게 내 눈앞을 맴돌며 배회할 뿐이었다.
지용이와 지완이가 떠난 후에도 나는 숨을 쉬었고 밥을 먹었고 때때로 웃으며 살아갔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욕망과 분리되어 있는 인간이란 이렇게 끔찍한 것이다.


그런데 나의 분신과도 같은 욕망이 내 눈앞에, 저 땅 위에 쓰러져 있었다. 무지막지한 신발에 걷어채이고 밟히며, 원망스런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전율이 느껴졌다. 기절할 것만 같았다. 나는 또 다시 비겁하게 도망쳤다.
그런 나에게 영숙이는 이곳을 버리고 떠나자 했다. 나는 거절했다. 춘희 때문이냐고 영숙이가 다그쳐 물었다. 나는 지완이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내 눈앞에 어른거리는 모습은 집 나간 딸이 아니라, 나를 쏘아보던 욕망의 눈길이었다.


2009년 12월 16일

내가 선택한 여자는 영숙이였다. 사랑을 버리고, 꿈을 버리고, 인간으로 태어날 때 지니고 있던 욕망도 모두 버리고 내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녀를 탓하지 않았다. 사랑없이 그녀의 손을 잡은 순간부터, 그녀는 내가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이었다. 그녀가 어떤 여자라 해도, 나는 그녀를 탓할 자격이 없었다. 영숙이를 탓하고 미워하기 시작하면, 더 이상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춘희의 둘째아들 부산이가 누명을 썼다. 덩치만 큰 어린애같은 그 녀석이 억울하게 유치장에 갇혔다. 범행이 일어나던 시간에 나는 그 아이를 보았다. 바보같이 웃으며, 나의 아내 영숙이와 나란히 꽃집에 서 있었다.

춘희가 영숙이를 찾아와 증언을 해달라고 했다. 영숙이는 거짓말을 했다. 오늘 부산이를 본 적이 없다고, 내 앞에서 거짓말을 했다. 춘희의 억센 힘에 끌려가면서 그런 영숙이가 나를 불렀다. "준수씨! 지용 아버지!" 나는 처음으로 그녀가 미워졌다. 내 안에서 솟구치는 미움을 걷잡을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영숙의 편을 들어 춘희를 떼어냈지만, 그 순간 나는 이미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2009년 12월 17일

자식을 낳아 본 어미가, 자식을 잃어 본 어미가, 남의 자식을 볼모로 하여 잔인한 흥정을 시작했다. 내가 선택한 영숙이는 그런 여자였다. 꽃집에서 웃으며 말을 건네오는 부산이를 제대로 쳐다보지도 않았으면서, 그것을 권력처럼 움켜쥐고 휘두르며 춘희에게 떠나라고 명령했다. 춘희는 거절했다. 내 이름 한준수, 그것이 영숙이의 아킬레스건임을 알고 있는 춘희는, 마지막 독기를 끌어내어 간신히 말했다. "내 아들 부산이, 옥살이 시키고, 여기서 뼈를 묻을래. 한준수 옆에 있을래."


하지만 춘희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녀는 내 욕망이었으니까, 한때는 내 안에 자리잡고 숨쉬며 살아가던 나의 분신이었으니까, 나는 그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영숙이는 지완이를 버리고도 찾지 않는 어미였으나, 춘희는 제 아들을 버리고는 살 수 없는 어미였다.

그래서 그녀가 떠나려 한다. 손에 잡힐 듯, 눈앞에서 오랫동안 나를 바라보던, 나의 욕망이 드디어 나를 영원히 떠나려 한다. 그래도 마음의 고향이라고, 나 같은 놈을 수시로 찾아오던 그녀가, 나의 시선을 갈구하느라 꾀병을 부리며 내 앞에 누워 뒹굴던 그녀가,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꽃처럼 웃던 그녀가, 결국 나를 떠나려 한다. 이제 더 이상 내 앞에서 웃지 않겠다고 말한다.


영숙이를 미워하는 순간, 나는 부서졌다. 지난 30년 동안 살아온 내 삶이 모조리 부서져 내렸다. 산산조각난 내 삶을 보는 것은 의외로 통쾌했다. 닥치기 전에는 소름끼치도록 두려웠으나, 정작 그 일이 닥치고 나니 아무것도 아니었다. 부서진 삶의 폐허 속에서, 나의 욕망이 불꽃처럼 되살아났다. 그것은 새로 태어난 아이처럼 힘차고 싱그러웠다. 나는 타오르는 욕망을 내 안으로 삼켰고, 수십년만에 뜨거워지는 가슴은 비로소 내가 살아있는 인간임을 알게 해 주었다.


나는 춘희에게 달려가 "나와 데이트를 하자"고 말했다. 살아 있어도 죽은 인간이었던, 지난 30년간 하지 못했던 말을, 거침없이 내뱉었다. 그것은 내 욕망의 언어였다. 치러야 할 죗값은 이미 다 치렀다. 더 이상 두려울 것도 없는데, 너무 오래, 먼 길을 돌아왔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아들을 잃고, 딸을 잃고, 아내마저 가슴속에서 떠나보낸 지금, 내가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은 그녀, 춘희의 눈 속에 들어있는 그 무언가 뿐이었다.


* 방송 초반, '크리스마스에 눈이 올까요?' 공식 홈페이지에서 등장인물 소개를 보았을 때, 한준수의 아들 한지용은 1976년생, 차강진은 1979년생, 한지완은 1981년생으로 나와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다시 확인해보니 출생연도는 그 사이에 삭제되고 없네요. 그래도 어쩔 수 없이 제 기억에 남아있는 대로, 한지용의 출생연도인 1976년에 맞추어 일기의 시작 지점을 잡았습니다. 한준수는 그 날 춘희와 함께 떠나는 대신 영숙의 방에 들어갔었거든요.
차강진과 한지완이 재회한 시점은 2006년으로 설정되어 있다더군요. 그렇다면 8년이 아니라 약 10년만의 재회가 되는데... 약간 이상한 것 같기도 하지만 연도를 정확히 맞추기가 쉽지 않네요. 그냥 가볍게 참고하여 읽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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