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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소화(昭火)의 편지-칠숙랑에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소화(昭火)의 편지-칠숙랑에게

빛무리~ 2009. 10. 3.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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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덕만공주와 사막에서 헤어지고 난 후, 몇 년간이나 칠숙랑(柒宿郞) 당신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한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군요.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그 힘이 무엇인지를 말이예요. 당신의 강인한 생명력이 그 모래더미 속에서 결국 나를 구해냈으니, 나 또한 그 힘의 신세를 졌다고 볼 수 있지 않겠어요?


나는 한동안 덕만이가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살아갈 힘을 잃어버렸었지요. 아시나요? 사람은 말이지요. 자기가 꼭 지키고 싶은 것 하나만 있어도 그걸 붙잡고 살아갈 수 있거든요. 내게는 덕만이가 그런 존재였어요.
나는 어려서부터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시녀로 입궁해서도 심부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언제나 넘어지고 뒤집어 엎으며 사고를 쳤지요. 백정(伯淨)왕자님을 처음 만나던 날도 사고를 쳐서 야단을 맞으며 울고 있었어요. 왕자님은 그런 나를 보고 무심히 지나치지 않을 만큼 어려서부터 마음이 고운 분이셔서, 그때부터 나는 백정왕자님의 시녀가 되었고, 동무가 되었어요.


평생 내게 동무라고는 오직 백정왕자님뿐이었어요. 내가 아무리 많은 실수를 저질러도 왕자님은 한번도 탓하신 적이 없지요. 왕자님은 나의 주인이기도 했지만, 내 동무였기 때문에 나는 그분을 위해서라면 언제든 죽을 수도 있었어요. 그 시절 백정왕자님은 내가 살아가는 유일한 이유였어요. 왕자님 외에는 나를 위해주고 내게 말을 걸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요.

왕자님이 아름다운 마야아가씨를 만나 혼인하게 되셔서 나는 너무 좋았어요. 내가 원하는 거라고는 오직 두 분 곁에서 언제까지나 시중을 들며, 그분들에게서 태어난 왕자님과 공주님들을 보살피며 그렇게 조용히 늙어가는 것뿐이었지요. 그런데 그 소박한 꿈조차 제게는 사치였던가봐요.


"너밖에 없다. 이 아이를 살려다오."

내 소중한 동무이신 왕자님은 임금님이 되셨지만 여전히 미실궁주 때문에 칼날 위를 거닐듯 고통스럽고도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계셨지요. 폐하가 얼마나 외로우신지 저는 알고 있었어요.
이제 갓 태어난 당신의 핏줄을 내 손에 맡겨 먼 곳으로 보내야 하는 그 심정이야 오죽하셨겠어요?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벅찬 일이었지만, 폐하는 내 친구였어요.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폐하의 아기를 지켜내야겠다고 나는 결심했어요.


그 날 칠숙랑, 당신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요. 문노공이 나타나 구해주지 않으셨다면 나는 아기와 함께 당신에게 잡혀 미실에게로 끌려갔겠지요. 하지만 나는 문노공과도 함께 갈 수가 없었어요. 폐하는 나에게 아기를 데리고 멀리 도망가서 오직 살려달라고만 하셨는데, 문노공이 말씀하시는 그 원대한 계획이 무엇인지는 모르나 그런 일에 휘말려들게 된다면 이 연약한 아이가 어찌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겠어요? 게다가 문노공은 폐하의 따님인 아기를 미실의 아들과 혼인시키겠다고까지 하셨으니, 제가 어찌 그분과 함께 갈 수 있었겠어요?


그래도 타클라마칸 사막에서의 생활은 행복했어요. 덕만이는 내가 살아야 할 이유가 되었지요. 그애는 꼭 어린 시절의 백정왕자님처럼 심성이 고와서 이 무능하고 실수투성이인 엄마를 언제나 지켜주고 감싸주었어요. 언제까지나 그렇게 둘이 기대고 살아도 좋을 것 같았지요.

칠숙랑, 당신이 쫓아왔을 때 얼마나 소스러치게 놀랐는지, 또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당신은 상상이나 할까요? 당신에게 있어 미실궁주는 어떤 존재이길래, 그녀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15년이라는 세월을 넘어서까지 찾아와 우리 모녀의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느냐고 나는 묻고 싶었어요. 혹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가 미실, 그녀였나요? 아니면 단지 두려움 때문이었나요?

덕만이를 위협하는 당신을 보는 순간 내 어린시절 동무였던 폐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어요. "너밖에 없다." 고 하셨었지요.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겁 많은 내가 칼을 빼들고 달려가 당신을 찌를 때 무슨 힘으로 그랬었는지는 지금도 모르겠어요.


당신을 찌른 내가 미웠을텐데, 당신은 오히려 나를 모래구덩이 속에서 건져내고 성심을 다해 살려 주었지요. 하지만 조금도 고맙지 않았어요. 나는 덕만이가 죽은 줄로만 알았거든요. 내 삶의 이유가 사라졌는데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지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게 늘 감시하는 당신이 미웠어요. 그저 하루하루 목숨만 연명하던 그 시간들은 내게 살아있어도 사는 날들이 아니었어요.

처음에는 오직 덕만이의 존재 때문에 혹시라도 나중에 필요할까 싶어서 나를 살려냈을 뿐이라고만 생각했어요. 그러나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보는 당신의 눈빛에 담긴 진심을 느끼기 시작했지요. 툭하면 앓아눕는 나를 보살피는 당신의 손길에는 생각지도 않은 온기가 가득했어요.



왜 그랬나요? 당신도 나도 주인의 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기에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를 떠돌며 고생하는 신세가 비슷해서 내가 애처로웠던 건가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내 마음도 조금씩 당신에게 열렸지만 나는 차마 내색할 수가 없었어요. 폐하가 그토록 신신당부하며 맡기신 덕만이를 잃어버렸는데, 그애의 생사도 모르는데 나에게 있어 새로운 삶이란, 새로운 희망이란 허락될 수 없는 것이었어요. 나는 여전히 삶의 의욕을 되찾지 못했기에 정신을 놓고만 있었고, 그런 나를 바라보는 당신의 눈빛에는 처연함이 더해갔지요.


서라벌로 돌아와서, 그 이후에도 우여곡절은 많았지만 우연히 덕만이가 살아있음을 알게 되자, 나는 삽시간에 정신이 또렷해지는 것을 느꼈어요. 내 삶의 이유였던 그애가 살아있고, 이제 공주가 되어서 바로 내 곁에 있다잖아요? 나는 그애를 꼭 다시 만나야만 했고, 그 희망은 반송장이었던 나를 다시 살려내기에 충분했어요.

그렇게 나는 내 딸 공주님을 다시 만났고, 삶의 이유를 찾아서 행복해졌는데... 당신은 어떤가요? 칠숙랑,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나요? 나는 이제 그것을 묻고 싶어요.


이제 우리는 건널 수 없는 강을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네요. 당신은 이런 현실이 서글픈가요? 나는 잘 모르겠어요.

언제나 삶은 우리에게 별로 너그럽지 않았으니까요. 나는 삶에 크게 바라는 것이 없거든요. 모진 고통 속에서 삶을 헤쳐 온 우리에게 이 정도의 시련은 견딜만하지 않나요? 반드시 곁에 있어야만, 손을 잡아야만 서로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당신이라는 사람을 알게 되었음에 감사해요. 나에게 또 하나의 삶의 끈이 생겼음을 느껴요. 내 동무이신 폐하와, 누가 뭐래도 내 딸인 덕만공주 외에, 또 하나의 끈은 바로 당신이예요.
결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래도 내가 죽지 않고 실낱같은 숨결이나마 부지하고 있었던 이유는 칠숙랑, 당신이 있어서였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폐하가 그러셨듯이, 공주님이 그랬듯이, 당신이 나를 진심으로 위해주었고 항상 따뜻하게 보살펴 주었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었다는 것을 말이예요.


가끔 스쳐 지날 때마다 잘 지내고 있는지 눈빛이나 한 번씩 주고 받으며... 우리 이렇게 지내요. 척박한 우리의 삶에 이렇게나마 허락된 작은 행복이 나는 너무나 고마운 걸요. 또 쉬임없이 불어오는 피바람 속에... 이 작은 행복조차 언제 날아갈지 모르지만... 그때까지는... 칠숙랑, 우리 이렇게 지내요.


* 퍼온 글이 아니라, 저의 개인 창작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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