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덕여왕' 비담(毗曇)의 독백-제2막(상처傷處)

나, 비담은 굉장히 낙천적인 사람이야. 다들 알지? 하지만 이번에 밝혀진 또 다른 비밀은 나로서도 감당하기가 쉽지는 않았어.

스승님이신 문노공이 일찌기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면서도 지금까지 숨겨 오셨던 그 대업이 바로 '삼한일통' 이라는 것 그 자체는 별로 충격이 아니었어. 그런데 왜 그 대업을 나의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걸까? 대체 내가 누구이길래? 지금껏 궁금해하지도 않았던 부모이지만, 이제 나는 내가 과연 누구인지를 알아야만 했어. 역시 스승님이 숨겨두셨던 사주단자와 황실 서고의 기록을 통해서 나는 내 정체를 알 수 있었지. 나는 진지왕과 미실궁주의 아들, 왕자 형종(炯宗)이었던 거야.

내 신분을 알게 되자 이상하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은 덕만공주였어. 나는 이제껏 내가 스스로 원해서 무언가를 갖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거든. 그 대업이라는 것도 스승님이 열심히 준비해서 나에게 주신다고 하니까 그저 기뻐했을 뿐, 내가 먼저 달라고 한 것도 아니었어. 그런데 이제 생전 처음으로 내게도 갖고 싶은 것이 생겼더라구.

내가 왕자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덕만공주를 갖고 싶어하는 내 마음을 나도 알아차리지 못했었어. 그저 그애만 보면 아주 묘하게 기분이 좋아졌을 뿐이야. 그런데 이제 그애가, 내가 꿈꾸지 못할 상대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순간 마음을 걷잡을 수가 없었어. 더구나 스승님은 그애가 태어나자마자 나의 배필로 점찍어 두기까지 하셨던 게 아니겠어?

내가 무리해서 풍월주 비재에 참가한 것도 사실은 공주 때문이었어. 공주는 멋대가리 김유신이 풍월주가 되기를 바라니까, 나는 무조건 그애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게 해주고 싶었어. 그놈의 밉살맞은 칠숙이 나서지만 않았다면 나의 계획은 완벽했는데, 아깝게도 망쳐 버렸지.

그래도 승부조작의 책임을 지고 나는 탈락했지만 결국은 유신랑이 우승했으니까 잘된 거 아닌가?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사실 유신에게는 거의 가능성이 없었어. 풍월주의 자리는 어차피 보종의 것이었다구. 그러니 결과적으로 내가 어쨌든 도움이 된 건 사실이란 말이지.

그런데 공주는 내 마음도 모르고 너무나 무섭게 다그치더군. "너는 나를 주군으로 섬기겠다 하고서는 내 명을 어겼다." 면서 말이야. 내가 그렇게 미안하다고 무릎꿇고 사과하는데도 공주는 굳은 표정을 풀지 않았어. "한번만 더 그러면 다신 너를 안 보겠다." 라고까지 매정하게 말할 건 없었잖아?

그리고는 내 앞에서 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빛으로 김유신의 이마를 정성스레 닦아 주는데, 공주의 마음이 그 멋대가리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은 아니지만 속이 쓰려오는 건 어쩔 수 없었어.

처음 만나면서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애한테 참 많은 도움을 주었지. 얼굴에 흉칙한 분장을 하고 혼자 궁에 들어와 온갖 쇼를 하며 미실궁주를 상대했던 것도 나였고, 그놈의 일식인지 뭔지 때문에 산 채로 불에 타 죽을 고비를 넘긴 것도 나였어. 위험과 고초를 무릅쓰고 목숨까지 걸었던 이 모두가 덕만공주 그애를 위해서 한 일이었지.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어.

이런 나를 그애는 한 번 돌아볼 마음조차 없단 말인가? 공주를 향한 내 서운함이 정당하지 않다고는 그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왜 나를 비웃는 거지? 당신이 나에게 그 무엇 하나라도 해준 게 있었나? 필요에 의해 나를 낳았고, 필요 없어졌다고 나를 버렸을 뿐인 당신이 무슨 자격으로 내게 그런 말을 하는 거지?
자기의 무예를 과신한 오만함, 국선과 원상화의 안목을 무시한 방자함, 그래 거기까지도 괜찮았어. 하지만... 덕만공주에 대한 내 마음을 비웃고... 그래도 어미라고 당신 앞에서 조금이나마 잘난 모습을 보이고 싶었던... 이 버려진 아들의 마음을 비웃을 권리는 당신에게 없어.

내가 당신에게 뭘 그리 잘못했지? 덕만공주에게 이끌려 궁에 들어올 때까지도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르고 있었어. 당신의 반대편에 서서 손해를 입혔다 해도 그건 내 잘못이 아니야. 당신이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았어. 그런데 맹금(猛禽)처럼 내 가슴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가는 당신의 발톱에는 독이 묻어 있었어.

나는 애써 웃으려 했지. 억지로라도 웃지 않으면 도저히 버티고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았어. 내 평생 이렇게 아파 본 것은 처음이야.

그래도 나를 파문하지 않겠다는 스승님의 말씀은 적잖이 위로가 되었어. 손톱만한 불의도 그냥 봐 넘기는 일이 없으신 엄격한 스승께서, 비재에서 승부조작을 하여 엄청난 파문을 일으키고 국선의 얼굴에 먹칠을 한 나를 이토록 쉽게 용서하시다니, 그건 감동이었어. 아무리 한심한 놈, 못난 놈이라고 욕하셔도 마음으로는 역시 나를 자식처럼 아끼시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지.

상대도 되지 않는 김유신과 비교하면서 나의 무예를 슬쩍 깎아내리시긴 했지만, 그 정도는 참을만했어. 어차피 나의 무예는 모두 스승님께 배운 것이니 그분이 뭐라 하시든 나는 할 말이 없고, 나의 실력이 멍청이 유신보다 뛰어나다는 거야 스스로 잘 알고 있으니 전혀 켕길 게 없거든.

그런데 스승님의 눈치가 갈수록 이상한거야. 일찌기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보물 책자들을 모두 내가 알지 못하는 곳으로 다시 숨겨 버리신 거지.

나는 불안했어.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먼저 주겠노라고 말씀하셔서 한껏 희망을 품게 해 놓으시고는, 이제와서 그 꿈을 몽땅 물거품으로 만드시겠다는 건가? 설마 아니겠지 하면서도 나는 참을 수가 없어서 스승님의 뒤를 밟았어.

이건 아니지. 스승님이 나에게 이러실 수는 없는 일이지. 내가 아무리 못난 놈이라도, 아무리 한심한 놈이라도 이렇게까지 잔인하게 하실 수는 없는 일이지. 분명히 내 것이라고 말씀하셨던 그 대업을, 그 꿈을 김유신에게 넘겨주시겠다니, 그것도 저렇게 흐뭇한 표정을 지으시면서!

스승님,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습니까? 왜 모두가 저를 버리는 것입니까?
낳아 준 어미는 저를 버린 것도 모자라 짓밟고 있습니다. 공주는 저를 이용만 하고는 돌아볼 생각조차 안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스승님은... 안겨주었던 꿈을 빼앗아 가십니다. 제가 태어난 것이 잘못입니까? 그래서 저에게는 다들 기회조차 주지 않는 것입니까?

비뚤어질 테야... 비뚤어질 테야... 이 세상은 나에게 정말 너무하는군.
어차피 나란 인간은 이 세상과 예쁘게 어울려 살 수가 없는 운명이었던 게야.
세상이 나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으려 한다면, 오히려 내가 모두 다 빼앗아 주겠어.

나를 탓하지는 말아... 내가 시작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어.
나는 그저 속없이 한 세상 신명나게 한 판 놀듯 살아보려 했을 뿐인데
그대들이 나를 이렇게 만든 거야.


* 퍼온 글이 아니라, 저의 개인 창작물입니다. 불펌은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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