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선덕여왕' 문노(文弩)의 편지 - 비담에게 본문
비담(毗曇)아, 버림받은 핏덩이였던 너를 품에 안아 데려올 때 나 문노(文弩)의 마음은 매우 착잡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가야국의 문화공주(文華公主)이시니 나는 가야 왕실의 외손으로서 원래 신라에 기반이 없었으나, 네 어머니 미실궁주의 보살핌으로 8세 풍월주에까지 오를 수 있었다. 나는 사다함이 살아있을 때 그와의 의리가 깊었으며, 세종공과도 막역한 사이로 지내고 있었다. 게다가 미실궁주의 사촌인 윤궁과 혼인함으로써 인척관계가 되어 있었기에 나는 당시 완전한 미실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네 아버지인 진지왕을 폐위하고 지금의 진평왕을 옹립하는 거사에도 가담했던 것이다.
그러던 내가, 미실에게서 돌아서게 된 이유를 아느냐? 그것은 바로 네 어미인 미실궁주가 대의(大義)를 외면했기 때문이니라.
지증왕과 진흥왕께서 꿈꾸셨던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은 진정 이 땅의 백성을 위한 대의였다. 같은 뿌리를 지녔으면서도 토막토막으로 분열되어 크고 작은 전쟁을 벌일 때마다 흩뿌려지는 백성의 피를 가엾게 여기셨던 탓이다. 그런데 미실은 그 원대한 꿈을 단지 왕권 강화를 위한 이기심으로만 해석하였다. 그래서 자기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 수 없게 되자 네 어미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꿈을 외면하였고, 항거하는 내 장인 거칠부를 살해하였다.
내 어찌 마음의 갈등이 없었겠느냐? 미실궁주는 오랫동안 나에게 큰 은혜를 베풀었으며, 죽은 사다함을 생각해서라도 차마 돌아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네 어미를 적으로 돌리기가 두려웠다. 그녀가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를 나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배신자가 된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나는 대의(大義)를 선택했다.
내가 미실에게 등을 돌리자 네 아버지 진지왕은 나에게 어린 너를 부탁했다. 이미 모든 세력을 잃고 자기 목숨마저 위태로워진 그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자기가 버린 핏줄을 진지왕이 끌어안고 있는 한 미실은 계속 신경이 쓰일 테니까 말이다.
너는 비록 미실의 아들이지만 엄연히 신라 왕실의 피를 이어받은 왕자였고, 너의 사주가 개양성의 주인인 덕만공주와 절묘한 합(合)을 이룬다는 사실을 나는 발견했다. 하늘의 뜻이 여인에게 있다 함은 곧 그 여인의 배필이 되는 남자가 왕이 된다는 뜻이 아니겠느냐? 미실 또한 그 어느 남자보다 뛰어난 능력을 지녔으되 여인의 몸으로 왕이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나는 하늘의 뜻에 따라 너와 덕만공주를 결합시키고 너를 사위의 자격으로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너는 진흥대제의 뜻을 계승할 후손이요, 신라라는 국호의 마지막 의미 '삼한일통'을 이루어낼 초석이었다. 나는 너를 훈육하여 빛나는 왕으로 세울 꿈에 부풀었다.
그런데 스스로도 알아차리지 못했건만, 내 마음에 잠자고 있던 두려움이 너무 컸던 모양이다. 어린 네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음식에 독을 풀어넣어, 그들을 제가 모두 죽였습니다." 하고 말하는 순간, 나는 소름끼치는 두려움에 얼어붙고 말았다. 네 눈 속에서 웃고 있는 미실궁주를 보고 말았던 것이다. 하늘이 정하신 시기가 도래하기까지 그녀로부터 멀리 도망쳐서 차근차근 준비하며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건만, 미실은 이미 비담 너를 통해 바로 내 옆까지 쫓아와 있었던 것이다.
어른으로서, 스승으로서 내가 너에게 무슨 면목이 서겠느냐? 내 안의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어린 너를 냉대하기 시작했다. 너는 그저 어린아이였을 뿐인데, 다만 책들을 잘 지키라는 나의 명을 수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나는 네 어머니의 그림자 때문에 그런 너를 보지 못하였다. 미실이 대의를 외면한다 하여 등을 돌렸으면서, 대의를 이루어낼 초석으로 키우던 너에게 정작 그 대의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지 않았으니 세상에 나처럼 어리석은 스승이 또 있겠느냐?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이루려는 대업에 비하면 비재 따위는 하찮은 겁니다. 대업이란 천하만민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그런 대의가 있는데 더 빠른 길을 놔두고, 그까짓 알량한 자존심과 규칙을 지키려고 먼 길을 돌아서 가야 합니까?"
내가 잘못 길러낸 탓에 너는 누구보다도 미실을 꼭 빼어닮은 아들로 자라나고 말았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리고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네 어미가 네 안에서 숨쉬고 있었다. 나는 오늘 그런 너를 보면서 나 자신이 부끄러워 속으로 통곡하였다. 너는 스승인 내 얼굴에 먹칠을 했다 하여 스스로 파문당하기를 청하였으나, 이제 너를 파문한다면 내 지난날의 과오는 어찌 돌이킨단 말이냐?
"빠른 길로 갈 수 없어서 대의라고 하는 것이다."
쉽고 빠르게 이룰 수 있는 대업(大業)이란 없느니라. 대의(大義)와 안락함은 결코 양립할 수 없는 것이니라. 모래 위에 아무리 큰 집을 짓는다 한들 꿈을 이루었다 할 수 있겠느냐? 비뚤어진 방식으로 일구어낸 성공은 하룻밤에 무너져내린다는 것을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너를 이렇게 키워놓고 버린다면 내 어찌 그 죗값을 다 받을 것이냐?
비담아, 부족한 스승을 용서해 다오. 아직 가르칠 것이 너무 많아서 나는 너를 혼자 내버려둘 수가 없구나. 이제서야 너에게 마음을 열고 내미는 나의 손길이 너무 늦은 것이 아니기만을 선열(先烈)들께 기원할 뿐이다.
* 퍼온 글이 아니라, 저의 개인 창작물입니다. 불펌은 제발 삼가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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