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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생랑(美生郞)의 하소연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선덕여왕 편지시리즈

'선덕여왕' 미생랑(美生郞)의 하소연

빛무리~ 2009. 9. 18.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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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들이 나 미생랑(美生郞)을 아느냐? 나는 10세 풍월주로서 미진부공의 아들이며 미실궁주의 아우이니라.


생전에 진흥대제께서 나를 얼마나 총애하셨는지 아느냐? 나를 자주 궁으로 부르시어 태자님들과 어울리어 춤추며 놀게 하셨느니라. 그러다가 수많은 공주들이 나의 빼어난 용모와 화술에 혹하여 먼저들 손을 뻗어오니 내 어찌 거부할 수 있을소냐? 그 일을 아신 진흥대제께서 잠시 노하셨으나 곧 슬쩍 넘어가 주셨느니라. 나를 향한 대제의 총애가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알법하지 않으냐? 물론 누님의 입김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야 없지만 말이다.

누님께 천신황녀의 자리를 선물한 자는 애초에 사다함이라 하겠으나, 온갖 궂은 일을 도맡아 처리했던 나 미생의 활약이 없었더라면 어찌 가능하기나 했을소냐! 비록 월천대사처럼 천문학에 밝지는 못하지만, 다재다능하고 머리가 명석한 나는 일단 D-Day가 정해지기만 하면 그 날짜에 맞추어 누님을 위해 화려한 각양각색의 버라이어티 쇼를 기획 제작함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믿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콩을 이용하여 비석을 땅에서 솟아오르게 만든 자가 바로 나였느니라. 이 정도의 과학기술을 아무나 이용하는 것인 줄 아느냐? 내 비록 한 자루의 부들부채를 벗삼아 소탈하게 노닐고 있으나 내 안에 축적되어 있는 지식과 능력의 양은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것을 너희가 어찌 짐작이나 하겠느냐? 


그런데 누님이 어찌 내게 이러실 수가 있단 말이냐? 단 한 번의 실수가 아무리 크다 한들, 평생 누님을 위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쳐 온 이 아우에게 어찌 독주를 권하실 수가 있단 말이냐? 결과가 잘못되어서 천명이 죽고 말았으나, 맹세코 나는 누님을 위해 덕만을 제거하려던 것이었다. 누님은 너무 오랫동안 최고의 위치에서 군림하신 탓인지 지나치게 오만해지신 느낌이 있었다. 상천관의 말을 그렇게 무시하시면 안되는 것이었다. 덕만의 별자리가 누님의 별자리를 침범하였다는데 그냥 두고볼 수야 없는 일이 아니더냐! 그런데 대남보, 이 한심한 아들녀석이 엉뚱한 사람에게 독화살을 쏘고 말았구나.

누님에게 울며불며 단 한 번의 선처를 애원할 때, 내가 사용한 카드는 월천대사였다. 언젠가 월천대사가 머지않아 일식이 있을 것이라고 흘린 말을 기억해 뒀던 것이 주효했느니라. 만약 내가 그 카드를 들이밀지 못했다면 나의 무서운 누님 미실궁주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나를 죽였을 게다. 그런데 이놈의 월천은 어느새 덕만에게 끌려가고 말았으니 이 일을 어쩔소냐.


월천이 없다고 해서 이 천하의 미생랑이 손을 놓고 있을소냐. 나정(蘿井-신라의 시조 박혁거세의 알이 나왔다는 우물)에 홍람화(紅藍花-잇꽃)의 즙을 풀어넣어 피가 솟아오르게 하는 거야 뭐 힘든 일도 아니었다. 어리석은 백성들은 당장에 몰려들어 천신황녀이신 나의 누님을 불러대기 시작했다. 천명의 죽음으로 인한 후폭풍은 그렇게 간신히 사그러들어가는 듯도 했다.

그런데 일이 꼬이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다더니 덕만, 이 하룻강아지가 원래 우리 것이었던 월천이라는 카드를 이용하여 우리 누님에게 내기를 걸어 오는구나.


나는 월천의 필적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상천관이 죽고 없는 이상, 월천과 그래도 가장 가깝게 지냈으며 그를 잘 알고 있던 자는 바로 나였다. 아까도 말했지 않느냐? 월천이 D-Day를 잡아 주면 내가 그에 맞추어 온갖 실무를 담당했었는데 어찌 그와 가깝지 않았겠느냐?
뭣도 모르는 신출내기 신녀는 월천이 덕만에게 넘어가 협조할 리가 없다고 하면서 계속 일식은 없을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나는 월천이라는 인물이 절대 뼈속까지 우리 누님의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누님을 상대하면서도 두려움에 떨지 않았고 열렬한 충성심을 보인 적도 없었다. 때때로 멀찌감치 어둠 속에서 미실 누님을 바라보던 월천의 눈빛이 적개심으로 번뜩이는 것을 나는 보았었다. 결국 나의 예리한 감각이 맞았다. 월천, 그 노인네는 덕만에게 넘어가서 일식을 계산해 주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누님의 시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까짓 첨성대야 건물에 불과한 터, 백성들은 여전히 그곳을 신당인 줄만 알고 몰려들어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손바닥이 닳도록 빌어대기나 할 터이다. 무지한 백성들 틈에 뒹굴며 자라난 저 어린 덕만공주가 무슨 정치를 알겠느냐? 그저 운좋게도 월천을 손에 넣었기에 일식이라는 대박패를 거머쥘 수 있었고, 그래서 잠시 누님에게서 천신황녀의 자리를 빼앗은 것뿐이다.


그런데 이 한심한 아들놈 대남보 쪽에서 들려오는 소식이 또 개운치가 않다. 꼬마녀석 하나 데려오는 데 뭔놈의 시간이 이렇게도 오래 걸린단 말이냐? 이 아비를 닮아 얼굴은 해사하게 잘 생긴 놈이건만 어찌 매번 하는 짓은 그 모양인지 통탄할 일이다.


천명의 아들놈 김춘추가 말을 타지 못한다니 거 참 이상하다. 그의 아비 용수와 어미 천명은 내가 볼 때 그리 기특한 인물들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마나 용맹스러웠더냐? 어찌 범에게서 개의 자식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이더냐? 하도 어이가 없어 한참을 웃는데, 왜 다들 나를 보고 혀를 차는게야?
내 나이 12세에 사다함의 낭도가 되었는데 말에 오르지 못하여 문노에게 몹시 경을 친 적은 있었지. 그러나 나의 타고난 재주는 힘을 쓰는 데에 있지 않고 지혜를 쓰는 데에 있거늘, 나를 어찌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린 춘추와 비할 수 있단 말이냐? 누님마저 나를 저런 눈으로 보시면 내 어찌 섭섭하지 않겠느냐?


나는 워낙 귀하게 자란 탓에 아랫사람을 잘 이해하지는 못했으며, 색과 재물을 좋아하여 신망이 두텁지는 않았으나, 오랫동안 선문(仙門)에 있어 낭도들이 문하에서 많이 배출되었으므로 감히 그 누구도 나의 세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느니라. 용모가 수려하고 언행에 운치가 있으니, 내가 한 번 눈길을 주면 따르지 않는 여인이 없는 것을 어찌 내 탓만 할 수 있겠느냐?

나와 한 번 인연을 맺은 여인은 모름지기 나를 잊지 못하여 남편과 자식들마저 버리고 나를 따르고자 하는 자가 부지기수였다. 동륜태자를 통하여 알게 되었던 당두의 아내가 바로 그런 경우가 아니었더냐? 그녀가 내 첩실이 된 후, 아이들이 어미를 찾으며 운다 하여 그 여인을 당두의 집으로 돌려보냈으나, 그녀가 나를 잊지 못하여 다시 찾아와 매달리니 나는 할 수 없이 당두에게 관직을 하사하여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이에 당두는 내게 감사하며 아내를 바치겠다고 하였으니 사람의 마음을 잡아끄는 나의 매력이란 나 스스로도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었느니라. 그리하여 사람들은 나를 천간성(天奸星 - 하늘의 간사한 별)이라고 불렀다. 이는 타고난 운명이었을 뿐 나의 성정이 방탕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느니라.


나는 그 어떤 아비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내 아이들을 사랑하는 좋은 아비였느니라. 여러 아들을 거느리고 대당(大堂)으로 어머니를 뵈러 가면 어머니는 많은 손주들을 미심쩍게 바라보시며 "그 아이가 어디가 너와 닮았느냐?" 하고 물으시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모두 나를 닮은 곳이 반짝반짝 빛나는 보석들인데 어찌 감싸주지 않을소냐. 아이들도 이런 나를 자애로운 아비라 여겨 언제나 떨어지지 않으려 하니, 나는 매번 출근할 때면 수명의 아이를 거느리고 조부(調府)에 이르러 종일 그 아이들과 더불어 즐겁게 놀다가 돌아오곤 했느니라. 그래서 나에게는 천간성과 더불어 또 하나의 별명이 있었으니 '호아령(護兒令)'이라 하였다. 아무도 이런 나를 책망하지 않았으며 나는 인정받는 좋은 재상이었다.

백 명의 아들과 만 명의 낭도를 거느리고, 일생을 풍족하고 부귀하고 아름답게 살아간 내가 바로 미생(美生)이니라. 나의 이름 미생은 나의 삶을 그대로 말해주고 있지 않느냐? 그 누가 나의 아름다움을 부인할 수 있겠느냐? 수천년 후대에까지 전해질 나의 아름다운 이름 미생을 너희가 감히 비웃을 수가 있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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