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그녀는 예뻤다' 황정음의 사랑은 박서준보다 최시원이 아닐까? 본문
처음부터 끌리는 작품도 아니었고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는데 한 두 번 시청하다 보니 뜻밖에도 재미있어서 계속 보게 된 드라마이다. '그녀는 예뻤다' 라는 과거형의 제목은 여주인공 김혜진(황정음)의 외모적 변화보다도 내면적 변화를 표현하고 있는 듯 싶다. 어렸을 때는 예쁘고 똑똑한 부잣집 공주님이었던 혜진, 하지만 나이가 서른에 가까운 지금 그녀의 현실은 비참하다. 아빠의 사업이 망하면서 가세는 기울었고, 각종 알바를 전전하다 보니 성적은 형편없이 떨어졌다. 게다가 야속한 사춘기 역변으로 어릴 적 미모는 사라지고 촌스런 홍당무 아가씨로 변해버렸다. 학자금 대출에 휴학을 거듭하며 간신히 대학을 졸업했지만, 나이도 많고 성적도 외모도 출중하지 못한 그녀에게 선뜻 문을 열어주는 회사는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못생긴 노처녀 취업장수생으로 전락해버린 김혜진.
모든 것을 가졌다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짐작컨대 그 내면에는 '자괴감'이 무엇보다도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비록 자기 잘못이 아니라 해도 원래 자기 것이었던, 마땅히 지켜야 했던 것들을 지키지 못하고 전부 잃었기 때문에, 무의식중에 그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만 것이다. 겉으로는 웃고 있어도 속으로는 항상 의기소침하다. 누군가 칭찬을 하면 단지 자기를 위로하려 든다고 생각할 뿐, 그 칭찬의 말이 진심이라고는 믿지 못한다. 어느 순간부턴지 남들에게 존중받기보다는 홀대받는 것이 익숙해졌다. 당연히 화를 내야 하는 순간에도 꾹 참게 된다. 자기가 무시당해도 되는 사람이라고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은 이미 그와 같은 현실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주인공 김혜진에게 사랑이 찾아온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아무리 잘나고 돈 많고 훌륭한 사람이라도 그녀의 무너진 자존감을 되살리지 못한다면 운명의 짝이라 할 수 있을까? 그녀가 그 앞에서 당당하기는 커녕 오히려 주눅들거나 움츠러들어야 한다면, 아무리 아름다운 과거의 추억을 공유했다 해도 소용없는 게 아닐까? 물론 지금의 상황이 이렇게 된 책임은 지성준(박서준)보다도 김혜진 본인에게 있다. 뚱땡이 찌질이였던 어린 시절과 달리 너무나 멋지고 댄디한 청년으로 변신해서 나타난 지성준을 보는 순간, 김혜진은 저도 모르게 뒷걺음질을 치다가 쥐구멍을 찾아 숨어들고 말았다. 겉으로는 "그 아이한테 좋은 기억만을 남겨주고 싶어서" 라고 했지만, 사실은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기가 창피했고 용기가 없었을 뿐이다.
아무리 그래도 15년만의 재회를 거짓으로 포장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지성준을 다시 만나는 자리에 예쁜 친구 민하리(고준희)를 대신 내보내는 순간부터 모든 일은 꼬이기 시작했다. 민하리가 자신의 첫사랑 김혜진이라고 철석같이 믿어버린 지성준은 같은 회사에서 진짜 김혜진을 만났는데도 알아보기는 커녕 전혀 의심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오히려 실수투성이의 못생긴 인턴 신입사원이 감히 자기 첫사랑과 동명이인이라는 사실에 불쾌감을 드러내며 더욱 싸늘하게 대하고 구박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못할 만큼 주눅들어 있던 김혜진은 지성준의 그런 태도에 점점 더 상처받고 움츠러들게 되었다. 아직도 어린 날의 소중한 기억들은 생생히 남아있지만, 모든 것이 변해버린 현실 속에서는 소용 없는 일이었다.
한편 김혜진을 대신해서 지성준을 만나러 나갔던 민하리는 지금껏 만나왔던 남자들과는 전혀 다른 그의 매력에 조금씩 빠져들게 된다. 어린 시절의 순수한 사랑을 그대로 간직한 채 김혜진과의 재회만을 손꼽아 기다려 온 지성준은 민하리에게 모든 진심과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했고, 말초적 욕망으로 가득한 남자들만을 상대해 왔던 민하리는 그에 신선한 충격을 받으며 사랑에 빠지고 만 것이다. 몇 번이나 사실을 털어놓으려 했지만 자꾸 기회를 놓치게 되면서, 이미 지성준을 향한 민하리의 사랑은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아무리 그래도 민하리는 가짜니까, 결국은 진짜인 김혜진에게 사랑을 양보해야만 하는 걸까? 정말 김혜진과 지성준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반드시 맺어져야만 하는 운명의 짝일까?
만약 김신혁(최시원)의 존재가 없다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대수롭지 않은 듯 불쑥 등장하더니 회차를 거듭할수록 점점 더 강력한 존재감을 어필하고 있는 김신혁이라는 인물이 왠지 심상찮다. 마치 어린 소녀처럼 "하늘이 너무 예쁘다"면서 천진하게 웃는 혜진을 보는 순간, 신혁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를 띠며 "예쁘다"고 중얼거린다. 과거의 천사같던 미소녀 김혜진이 아니라, 홍당무 얼굴에 폭탄머리를 하고 있는 현재의 김혜진을 보면서 진심으로 예쁘다고 생각한 것이다. (심쿵!) 뿐만 아니라 혜진이 사고를 치거나 난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마다 신혁은 남몰래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준다. 심지어는 현재 혜진의 가장 큰 고민거리인 지성준과의 일까지 모두 알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도와준다. 마치 키다리 아저씨처럼. 혜진은 신혁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
"믿기 힘드시겠지만 제가 옛날에는 굉장히 예뻤거든요." 혜진이 말하자 신혁은 툭 던지듯 대답한다. "지금도 그래!" 혜진은 잘못 들었나 싶어서 반문한다. "네?" 그러자 신혁은 혜진의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명확한 어조로 다시 대답한다. "지금도 예쁘다고!" 그러자 혜진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쑥스럽게 웃으며 "되게 착하시네요" 하고 받는다. 예쁘다는 그 말은 진심이 아니라 자기를 위로하려는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신혁의 진심은 조금씩 혜진에게 전해질 것이고, 그 진심을 통해 혜진은 잃었던 자존감을 점차로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김혜진의 운명의 짝은 과거의 그녀가 참 예뻤다고 추억하는 지성준보다, 현재의 그녀가 충분히 예쁘다고 생각하는 김신혁이 아닐까? 신혁이야말로 혜진을 가장 행복하게 해 줄 사람이 아닐까?
지성준이 민하리를 김혜진으로 오해하지 않았다면, 처음부터 김혜진이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고 지성준을 만났더라면 모든 일은 달라졌을 것이다. 좀 까칠하긴 하지만 결코 비열하지 않은 지성준은 나름 최선의 예의와 진심을 다해 김혜진을 대했을 것이고, 어쩌면 역변했어도 상관없다면서 그녀를 계속 사랑했을지 모른다. 최소한 회사에서 만났을 때처럼 함부로 막 대하거나 모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해에서 비롯된 사랑일망정 그의 마음은 이미 민하리에게로 기울어져 있다.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된다 해도 과연 되돌릴 수 있을까? 만약 지성준의 고집스런 사랑이 끝내 김혜진을 선택한다면, 결국 혜진과 하리의 우정은 깨질 수밖에 없다. 이제 와서 친구의 남자로 성준을 대하기엔, 하리의 마음이 너무나 깊어져 버렸다.
'그녀는 예뻤다'의 남녀 주인공은 김혜진과 지성준이지만, 반드시 그 둘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각자 따로 최선의 짝을 만난다면, 김혜진과 지성준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함께 간직한 친구로서 남아도 좋은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스타일 면에서도 혜진-신혁, 하리-성준이 더 잘 어울리는 듯하다. 하리와 성준은 둘 다 최고의 패션 센스를 자랑하며 외모 꾸미기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반면 혜진과 신혁은 둘 다 외모 꾸미기에 별 관심이 없는 후줄근한 스타일이다. 낌새를 보니 김신혁은 재벌가의 후계자가 분명함에도 언뜻 보면 노숙자로 착각할 만큼 모양새가 형편없다. 혜진 역시 비록 홍당무에 폭탄머리가 되었어도 화장과 퍼머를 통해 충분히 커버 가능할텐데, 만사 포기한 사람처럼 그냥 그러고 다니는 걸 보면 외모 가꾸기에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이 작품의 결말은 당연히 김혜진과 지성준의 행복한 결합이라고 예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주인공 둘만 행복하고 선량한 주변인들은 깊은 상처를 받는다면 과연 진정한 해피엔딩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서로 닮은 혜진-신혁과 하리-성준이 결합한다면 그 누구도 상처받지 않는 진짜 해피엔딩이 가능해진다. 전국에 삼순이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추억은 아무 힘도 없다고요? 맞아요. 하지만 추억은 사라지지 않아요!" 바꿔 말하면 추억은 사라지지 않지만, 현실 속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과거와 현재가 충돌할 때 언제나 승리하는 것은 현재이며 또 그래야만 한다.
김혜진은 지성준과의 재회 장소에 민하리를 대신 내보냄으로써 과거와 현재의 연결고리를 스스로 끊어버렸다. 그래서 지성준에게 김혜진은 과거의 화석으로 남고, 현재의 시간들은 민하리의 존재로 채워진 것이다. 한 순간의 선택으로 운명은 엇갈리고 사랑의 끈은 복잡하게 엉켰는데, 그 어지러움 속에서 진실한 사랑을 찾는 청춘 남녀들의 헤매임이 안타까우면서도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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