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내 딸 금사월' 친숙한 막장의 향연 다시 시작되다 본문
'아내의 유혹', '왔다 장보리'의 시청률 제조기 김순옥 작가가 '내 딸 금사월'로 돌아왔다. 김순옥 작가의 거침없는 스타일은 왠지 '막장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듯 보이니, 이쯤되면 명실상부한 '막장의 대모'라 칭해도 좋을 것이다. 확실한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임성한 작가가 '압구정 백야'를 마지막으로 절필 선언을 했다는 소식까지 들려오고 있는 터라, 막강 라이벌조차 사라진 막장의 너른 들판을 김순옥 작가가 다시 장악할 것인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개인적으로 '재미없는 착한 드라마'보다는 '재미있는 막장'을 선호하는 편이라, 나 역시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내 딸 금사월'의 첫방송을 시청했다.
막장의 최고 미덕이라 할 수 있는 자극적 화면의 연출이 처음부터 작렬했다. 신득예(전인화)와 강만후(손창민)의 다정한 결혼 사진이 집 안 곳곳에 클로즈업 되더니만, 곧바로 그 사진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휩싸이며 심상찮은 피바람을 예고했던 것이다. 부부이되 원수지간인 두 사람의 이야기는 수십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나이 오십줄에 접어드는 49세의 전인화가 새하얀 드레스에 공주풍의 머리띠를 꽃고 20대 아가씨로 출연한다. 워낙 기품있는 미인인 데다가 관리도 잘 받아서 그만하면 선방한 셈이지만, 아무래도 소름돋고 오글거리는 느낌은 부인할 수 없었다.
51세의 손창민과 57세의 박상원이 갓 서른의 청년들로 출연한다. 손창민은 그런대로 괜찮은데, 전혀 다듬어지지 않은 박상원의 외모에서는 그야말로 걷잡을 수 없는 노화의 흔적이 물씬물씬 풍겨나와서 보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젊은 시절을 연기하면서 웬만하면 가발이라도 좀 쓰고 나오지, 꾸밈없는 모습 그대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무슨 자신감인지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대략 29세쯤의 오민호(박상원)와 25세쯤의 신득예는 약혼한 사이인데, 강만후가 신득예를 짝사랑하며 삼각관계가 진행되는 중이다.
신득예의 부친 신지상(이정길)은 저명한 건축가로서 오민호와 강만후의 스승이다. 강만후는 신지상 집안에서 식모로 일하는 소국자(박원숙)의 아들인데, 신지상은 어려서부터 그를 아들처럼 키웠지만 너무 야심만만한 그의 성품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반대로 자신을 꼭 닮은 고지식한 성품의 오민호는 수제자로 받아들이고 외동딸 득예와 맺어주려 한다. 후계자의 자리와 사랑하는 여인을 동시에 빼앗길 위기에 처한 강만후는 대뜸 악역의 본색을 드러내고 음모를 꾸며 신지상을 몰락시키는데...
독특하면서도 좀 웃기는 것은 강만후가 밤무대 댄스가수인 최마리(김희정)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둔 이혼남이라는 설정이다. 두 딸을 시어머니 손에 맡겨둔 채 최마리는 다시 밤무대로 달아나버렸고, 소국자는 사고뭉치 손녀들의 수발을 드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다. 그런 처지에서 감히 스승의 금지옥엽 외동딸 신득예를 탐내고 있다니, 강만후의 캐릭터는 역대 악역 중에서도 가장 뻔뻔한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아무튼 강만후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추억을 유일한 무기로 내세우며 자꾸만 다가서는데...
강만후와 신득예가 나란히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 길고양이들의 밥을 챙겨주는 모습을 본 오민호는 불쾌한 기색을 드러낸다. "득예야, 앞으로는 만후랑 너무 가까이 지내지 마. 네가 만후한테 딴마음이 없다는 건 알지만, 만후는 어떤지 모르잖아. 한 번 잘해주면 끝도 없이 기대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야. 네가 도둑고양이한테 자꾸 밥을 주면, 도둑고양이는 네가 자기를 좋아하는 줄 안다구!" 강만후를 대뜸 '도둑고양이'에 비유하는 걸 보니, 오민호의 성품도 그리 만만해 보이지는 않는다.
신지상이 필생의 심혈을 기울여 진행하던 '천비궁' 프로젝트는 강만후의 음모로 물거품이 되고, 모든 것을 잃게 된 신지상은 쓰러진다. 설상가상 오민호는 공금 횡령의 누명을 쓰고 체포된다. 우아한 공주님이었던 신득예는 삽시간에 나락으로 떨어져 강만후의 아내가 되는데, 그간의 자세한 이야기는 차후에 설명되겠지만 첫방송에서 이 정도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담아낸 셈이다. 부모 세대의 이야기가 중심이 되긴 했지만, 타이틀롤 여주인공 금사월(백진희)의 출생 장면도 1회 시작 부분에 삽입되었다. 금사월의 생모는 신득예로 밝혀져 있는데, 생부는 짐작컨대 오민호가 아닐까 싶다.
'내 딸 금사월'의 스토리는 두 갈래로 나뉘어, 신득예의 복수극과 금사월의 성공담으로 진행되어 나갈 것이다. 차가운 복수심에 사로잡혀 인간다움을 잃어가던 생모 앞에, 고아로 자랐지만 한없는 따스함과 긍정의 에너지를 지닌 딸이 나타나면서, 끝내 복수보다는 화해 쪽으로 가닥을 잡게 될 것 같다. 왜냐하면 금사월과 러브라인을 이루게 될 강찬빈(윤현민)이 다름아닌 강만후의 아들이라, 지긋지긋한 로미오와 줄리엣 커플이 또 탄생할 조짐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죄 없는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부모는 서로를 용서해야 할 것 같은 이 찜찜한 기분... 하지만 결말이 어떻든 도달하는 과정만 재미있다면 봐 줄 수도 있다.
과연 김순옥 작가는 '왔다 장보리'에 이어 주말 저녁의 톡 쏘는 사이다를 한 번 더 선물해 줄 것인가? '왔다 장보리'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악역 연민정(이유리)의 처절한 몰락으로 속시원한 복수가 완성되었기 때문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시청자는 더 이상 찜찜한 화해와 작위적인 용서를 바라지 않는다. 마음이 각박해서라기 보다는 너무 억울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죄 지은 자들이 벌을 받기는 커녕 더욱 떵떵거리고 잘 사는 꼴을 보며 분통 터진 채로 살다 보니, 드라마에서라도 죄 지은 자가 마땅한 벌을 받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는 것이다. 부디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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