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팔이' 주원의 열연이 아까운 부실 대본의 한계

초반에는 제법 독특한 설정으로 눈길을 끌었던 '용팔이'가 갈수록 부실 대본의 한계를 드러내며 공감대 형성에 실패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 기본적 설정의 무리수는 일찌감치 드러난 상태였지만, 너무도 급박하고 뜬금없이 전개되는 남녀 주인공의 러브라인은 꾸준히 시청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1~2회분을 건너뛴 것처럼 느끼게 하는 마법을 선사했다. 듣자 하니 '용팔이'는 2013년부터 제작 기획이 시작되었다던데, 무슨 이유로 방송 초반부터 쪽대본 촬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대본이 그래선지 스토리 전개는 황당할 만큼 듬성듬성하고, 그 와중에 시간을 때우기 위해선지 과거 회상 및 쓸데없는 장면들이 너무 길고 지루하게 삽입된다. 

한여진(김태희)이 3년씩이나 인위적으로 잠들어 있게 된 이유가 8회에서 밝혀졌다. 3년 전, 한여진은 경쟁사인 대정그룹의 후계자 최성훈(최민)과 사랑에 빠지는데, 그들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성당에서 단 둘이 결혼하려 한다. 그러나 결혼식장으로 달려가던 차 안에서 교통사고를 당한 성훈은 그 자리에서 사망하고, 혼자 살아난 여진은 그 모든 것이 자기 부친 한회장(전국환)의 계획이었다는 생각에 부친을 원망하며 자살 시도를 하지만 다시 살아난다. (한여진이 투신 자살을 시도한 장소는 분명 고층 빌딩의 상층부였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났는지도 의문이다.) 췌장암 말기로 죽음을 앞두고 있던 한회장은 딸이 죽으려는 이유가 자기를 원망해서라 생각하고, 자신이 숨을 거둘 때까지 딸을 잠재우라는 유언을 남긴다. 

일단 한회장 캐릭터는 재벌 총수답지 않게 너무나 허술하고 멍청하다. 일부러 교통사고를 일으켜 성훈을 죽음으로 몰아간 사람은 한회장이 아니라 여진의 배다른 오빠 한도준(조현재)이었는데, 한회장은 딸에게 오해를 받으면서도 왜 진실을 밝혀낼 생각조차 안 했을까? 몇 개월씩이나 인위적으로 잠들게 되면 건강이 나빠질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신이 죽은 후 잠들어 있는 여진을 굳건히 지켜 줄 사람이 아무도 없는 상황에서 어찌 그런 선택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자기 아들 도준이 얼마나 야심만만한 놈인지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연약한 딸을 잠재워 악어들의 소굴에 던져둔 채 늙은 아비는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신그룹 제1상속녀였던 한여진은 그렇게 잠든 몸 속에 갇힌 채 모든 것을 빼앗기고 3년 동안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해 온 것이다. 

3년 동안 여진의 잠든 몸을 돌봐 온 황간호사 역할에는 뮤지컬 배우 배해선이 캐스팅되어 열연을 펼쳤다. 배해선의 섬뜩한 명연기는 깊은 인상을 남겼지만, 비정상적으로 여진에게 집착하는 황간호사의 캐릭터는 그저 황당할 뿐이었다. 도대체 행동의 이유 따위는 필요없고, 단순히 그런 미친 여자가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한 걸까? 아무튼 죽음보다 더 고통스런 잠 속에 갇혀 있던 한여진에게 구원의 빛이 다가온다. 바로 용팔이 김태현(주원)이다. 그러니 한여진이 김태현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목적이 뭐였든 김태현은 그녀를 깊은 잠에서 깨워 주었고 심지어 속절없는 죽음의 위기에서도 구해 주었으니 말이다. 태현은 여진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한 은인이며 천사였다. 

하지만 김태현이 한여진을 사랑하게 되는 데는 좀 더 개연성이 필요했다. 예쁜데 다른 이유가 뭐 필요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할 말은 없지만, 이건 드라마니까 캐릭터의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필요한 것이다. 김태현은 단지 여동생 소현(박혜수)의 치료비가 필요했을 뿐 별로 탐욕스런 인물이 아니기 때문에, 한여진이 돈 많은 여자라서 유혹하려고 한 것 같지도 않다. 오히려 이과장(정웅인) 라인을 통해서 한도준의 심복이 된다면 동생의 치료비는 더욱 간단하고 안정적인 방법으로 얻어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현은 자기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위험한 방법으로 한여진을 살려냈고, 급기야 그녀의 죽은 약혼자 성훈을 질투하기에 이른다. 

슬픈 눈빛의 서동 왕자님 조현재가 처음으로 악역을 맡았다기에 색다른 변신을 기대했었지만, 이렇게 부실한 대본으로는 제아무리 용빼는 연기력이 있다 해도 캐릭터의 매력을 살릴 수 없을 것이다. 일단 한도준은 분량 자체가 너무 적어서 거의 병풍 수준이라, 도저히 중심 악역으로 봐줄 수조차 없는 상황이다. 명실상부한 주연급 연기자 조현재에게는 그야말로 흑역사가 되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8회에서 한도준은 술에 취해가지고 자신이 저지른 범죄 행각을 여러 사람 앞에서 자랑스레 털어놓는 멍청함까지 선보였다. (그 아비에 그 아들인가?) 아무튼 악역이 이렇듯 허술하니, 당최 시청자들은 주인공과 함께 열심히 싸워 볼 의욕조차 생기질 않는다.

 

아무튼 "성훈이를 내가 죽였다"고 자랑스레 떠들어대는 한도준 덕분에 김태현은 한여진의 약혼자였던 최성훈의 존재를 알게 되고, 그들이 남몰래 결혼하려 했던 성당으로 일부러 여진을 데려간다. 몸을 회복할 때까지 그 곳에서 머물라는 태현에게 여진은 "내가 귀찮아졌냐?"며 서운함을 표현하고, 태현은 맘에 없는 소리로 둘러대다 갑자기 뜬금 고백을 한다. "난 죽은 사람 질투하기 싫어!" 도대체 시청자들의 연령층을 몇 살쯤으로 생각하면 저렇게 유치하고 오글거리는 대사를 쓸 수 있는 것일까? 언제부터 왜 사랑하게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는데, 설상가상 죽음보다 깊은 잠에서 3년만에 깨어난 여자에게 저토록 한심한 소리나 해대는 남자라니! 

김태현과 한여진의 멜로가 살아나려면 그들은 우선 동지가 되어야 한다. 둘이 손을 꼭 잡고, 한도준을 필두로 한 '악의 집단'에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다. 최초의 연합은 동생의 치료비 때문이었더라도, 함께 싸워나가는 과정에서 두 남녀의 감정선이 점차 깊어지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처리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장혁린 작가는 무슨 생각에선지 악역의 존재감을 최소화시킴으로써 싸움의 의욕조차 사라지게 했고, 주인공 남녀는 아무 이유 없이 유치한 사랑에 빠지는 금사빠로 만들었다. 8회가 끝난 후 게시판에는 이러한 시청 소감이 올라왔다. "다른 드라마를 보고 나면 다음 회의 내용이 궁금해지는데, 용팔이를 보고 나면 '내가 뭘 본 거지?' 하면서 그 회의 내용이 궁금해진다."

이러한 와중에 일부 네티즌들은 '용팔이'의 초반 내용이 웹툰 '도시 정벌'과 유사하다며 표절 의혹을 제기하기도 했다. (자료 링크) 제기된 의혹에 따르면 '도시 정벌'에서도 여주인공은 계속 잠들어 있어야 하는 상속녀이며 그녀에겐 오빠가 있다고 한다. 더욱이 남주인공은 용팔이 김태현과 똑같이 폭력배들을 불법으로 치료해 주는 의사라는 것이다. 아무래도 초반 설정이 심히 비슷한데 '도시 정벌'은 2011년에 발매된 작품이라 하니 표절 의혹을 떨쳐내기가 쉽지는 않을 듯하다. 

한숨밖에 안 나오는 부실 대본 때문에 조현재는 물론 배해선 및 중견 연기자들의 명품 연기도 빛 바래고 말았지만, 배우들 중에서도 가장 안타까운 사람은 다크서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정도로 온 몸을 불사르며 열연을 펼치고 있는 주원이다. 인형처럼 누워 있던 김태희가 일어나기 전까지 무려 80% 이상의 분량을 홀로 책임지며 '용팔이'를 이끌어 온 주원은 한층 업그레이드 된 연기력으로 20대 남성 배우 중 몇 안 되는 원톱 주연배우의 저력을 선보였다. 덕분에 '용팔이'의 시청률은 20%를 넘나들며 오랫동안 침체되어 있던 드라마 시장에 모처럼 활기를 불어넣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중반에 접어들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대본의 한계가 이토록 두드러진다면, 실망한 시청자들의 대거 이탈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대본이 탄탄했더라면 '용팔이'는 주원이 평생토록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대표작이 되었을텐데, 아무래도 커다란 오렌지로 자라나지 못하고 낑깡 정도에서 머물게 될 듯하니, 절정의 물 오른 연기력으로 좋은 기회를 맞이했던 주원에게는 무척이나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