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오 나의 귀신님' 조정석, 사랑한다면 이 남자처럼! 본문
솔직히 '오 나의 귀신님'의 초반 설정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대로 된 연애조차 못 해보고 억울한 죽음을 맞이한 처녀귀신 신순애(김슬기)가 '처녀의 한'을 풀지 못해 이승을 떠돌고 있다는 설정부터가 황당했다. 따지고 보면 젊은 나이에 죽음을 맞이한 사람들 중에는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을 터인데, 처녀(또는 총각)의 한 때문에 편안히 하늘로 돌아가지도 못한다는 것은 매우 편협하고 모욕적인 발상이라 여겨졌다. 더욱이 이승을 떠돈지 3년이 되도록 그 한을 풀지 못하면 악귀가 되어 영원히 인간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존재로 남게 된다니, 어찌 인간이 그토록이나 성(性)에만 얽매이고 종속된 존재일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을 포기하지 않은 것은 박보영의 사랑스럽고도 능청스런 연기에 반했기 때문이다. 의기소침하고 내성적인 나봉선(박보영)의 몸에 어느 날 갑자기 붙임성 좋고 오지랖 넓은 처녀귀신 신순애가 빙의하게 되면서, 박보영은 전혀 상반된 두 성격의 캐릭터를 연기해야 했는데 마치 그 모습이 진짜 빙의라도 된 것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이다. 신순애 역의 김슬기는 아주 독특한 말투와 억양을 지니고 있어서 대사 한 마디만 들어 봐도 알 수 있는데, 박보영은 놀랍게도 그런 김슬기의 특징을 거의 완벽하게 재현해 냈다. 더욱이 신순애의 말괄량이 캐릭터가 박보영의 청순가련한 외모와 결합되니 그 언밸런스함에 반전 매력이 더해지기도 했다.
여주인공의 다채로운 매력에 비한다면, 남주인공 강선우(조정석)의 캐릭터는 상대적으로 밋밋해 보였다. 젊고 유능하고 잘생긴 완벽남에 성격은 좀 까칠하지만 속마음은 따뜻한, 그야말로 (드라마 속에서는) 흔해빠진 무특징남으로 보였을 뿐이다. 그런데 이 남자가 조금씩 나봉선에게 마음을 열고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숨겨졌던 매력이 대폭발하기 시작했다. 사랑에 빠지기 전에는 잘난척과 호통과 뻣뻣함과 고지식함의 집합체였던 강선우가 사랑에 빠지면서부터는 귀여움과 순박함과 다정함과 부드러움의 집합체로 변해 버린 것이다. 그 변해가는 과정이 어찌나 매력적인지, 드라마를 보며 참 오랜만에 콩닥거리는 설렘을 느꼈다. 2013년 여름 내 가슴을 뒤흔들어 놓았던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박수하(이종석) 이후 대략 2년만인 것 같다.
만약 나봉선의 몸에 신순애가 빙의되지 않았더라면, 소극적인 나봉선은 단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멀리서 강선우를 바라만 보다가 짝사랑을 끝냈을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신순애를 만난 것은 나봉선의 행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신순애는 하루라도 빨리 '처녀의 한'을 풀고 귀천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너무 노골적으로 들이대면서 여주인공의 매력을 조금씩 감소시켰다. 진심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천천히 오래오래 아껴주고 싶은 남자의 마음을 외면한 채, 연인이 되자마자 성급한 하룻밤을 재촉하며 남자를 모텔로 끌고 가려는 여자의 값싼 태도는 박보영의 사랑스런 외모조차도 예뻐 보이지 않게 만들었다.
더욱이 자신의 요구에 따라주지 않는다고 계속 깐죽대며 시비까지 걸고 있으니 웬만해선 정이 떨어질 법도 하건만, 다행히도 강선우는 한 번 정한 마음이 쉽게 흔들리는 남자가 아니었다. 팩팩거리는 나봉선의 손을 꼭 잡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우리 이렇게 시작하자... 그리고 천천히, 오래오래 가자!" 라고 말하는데, 순간 나봉선의 몸에 빙의되어 있던 신순애조차 멈칫하며 얼어붙고 만다. 서리서리 맺힌 처녀귀신의 한도, 귀천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불안감도, 시간을 놓쳐 악귀가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조차도 공허한 연기처럼 흩어지고, 그 순간 남아있는 것은 오직 한 남자의 진실한 사랑 고백 뿐이었다.
사실 강선우에게는 대학시절부터 오랫동안 짝사랑한 여자가 있었다. 미처 그 사랑을 표현해 볼 새도 없이 선우의 절친인 창규의 아내가 되어버렸던 이소형(박정아), 하지만 창규는 결혼 한 달만에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나고, 선우는 혼자가 된 소형과 변함없는 친구로 지내왔다. 선뜻 다가서지 못한 것은 창규의 그림자와 더불어 소형의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생각지도 않았던 나봉선의 존재가 마음에 들어오고, 혼란을 겪던 강선우는 드디어 자기 감정의 실체를 깨닫는다. 뒤늦게 질투심과 위기의식을 느낀 이소형이 다가오려 하지만, 강선우는 단호히 차단한다. "소형아, 나... 좋은 사람 생겼다!"
비록 쓰라린 짝사랑이었어도 혈기왕성한 청춘의 십여 년 세월을 오롯이 바쳤던 감정인데, 막상 끊어내고 나면 시원하면서도 헛헛한 심경은 어쩌면 당연했을 것이다. 왠지 모를 두려움과 불안감도 생겼을 것이다. 옥상에 텐트를 치고 나란히 앉아 여행 온 기분을 내던 중 선우는 담담한 어조로 소형과의 일을 봉선에게 털어놓고, 봉선은 약간 놀랐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선우를 바라보는데, 선우가 나직하지만 분명한 음성으로 말한다. "그러니까 내 말은... 네가 나 책임져야 된다구... 나 버리면... 죽는다!" 조정석의 연기를 볼 때는 너무나 설레고 좋아서 기절할 지경이었는데, 막상 이렇게 써 놓고 보니 대사 자체는 굉장히 평범하다.
새삼 느끼는 건데, 좋은 배우의 명품 연기에는 확실히 대본의 부족한 구멍을 메우는 힘이 있다. 조정석의 연기가 훌륭하다는 것은 '건축학개론'이라든가 '더킹투하츠' 등의 작품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만큼의 경지에 이른 줄은 모르고 있었다. 나봉선을 바라보던 깊은 눈빛과, 결연한 사랑을 고백하던 나직한 목소리가 앞으로 한동안은 내 가슴속에 자꾸만 콩닥콩닥 떠오를 것 같다. 세상 그 어떤 여자라도 거부할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이라고 표현하면 너무 과하려나? ㅎㅎ
여자들은 남자의 강한 모습을 좋아하지만, 정작 그 강한 모습에 반해서 사랑하게 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영화 속에서나 스포츠 경기에서는 강할수록 멋있어 보이지만, 실제 생활에서는 오히려 안 멋있어 보이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이다. 때와 장소와 경우에 따라 자신의 강한 성향을 유연하게 조절할 줄 안다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강함으로 일관하는 남자의 태도는 여자의 마음에 거북함과 부담스러움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다면 여자는 어떤 경우 속절없는 사랑에 빠지게 될까? 정답은 '강한 남자가 자기 앞에서 약해지는 모습을 볼 때'이다. 바로 그럴 때 여자는 '진짜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며 방어벽을 무너뜨린다.
강선우는 모든 것을 가진 남자다. 젊은 나이에 부와 명예와 인기를 한 손에 거머쥐었다. 외적 조건뿐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더없이 탄탄한, 세상에 없을 것 같은 완벽남이다. 그에 비해 나봉선은 가진 것 없는 여자다. 물론 외모가 예쁘니까 여자로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르지만, 몸 누일 방 한 칸 없는 가난함에 소심한 성격까지 더해지니 상당히 초라해 보인다. 하지만 사랑은 강한 남자를 약해지게 만들었다. 차마 그녀의 눈을 못 본 채 외면하며 "나 버리면... 죽는다!" 라고 다짐할 때, 강선우의 마음속에 나봉선은 더 이상 초라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 완벽한 남자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여왕이었다.
사랑 앞에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자의 모습은, 이렇듯 사랑받는 여자의 자존감을 높여 준다. 자존감이 낮은 상태(스스로 가치없는 존재라 느끼는 상태)에서는 사랑을 하기도, 받아들이기도 힘든 법이다. 우울하고 소심한 나봉선은 물론이거니와, 오지랖 왈가닥 노처녀 신순애도 어쩌면 자존감 부족 때문에 사랑을 못 해 본 것일지 모른다. 앞으로 나봉선은 강선우의 진실한 사랑을 통해 자존감을 되찾고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신순애는 억울한 죽음의 한을 풀고 홀가분하게 하늘로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비록 남의 몸을 빌려서이긴 했지만, 강선우같은 남자의 사랑을 받아 보았으니 처녀귀신의 한도 충분히 풀리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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