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프로듀사' 공효진, 가장 아름다운 거절의 방법 본문
최근 몇 개월 동안 썩 마음에 드는 드라마가 없어서 리뷰를 안 썼더니 감각이 무디어져 버린 것 같다. 하지만 모처럼 괜찮았던 드라마 '프로듀사'를 다 보고 나서 한 마디 언급조차 안 한 채 떠나 보내기는 아쉬우니까, 단순히 되짚어 보는 수준이라도 최종회 리뷰를 써 보고자 한다. 사실 초중반까지는 크게 끌리는 면을 발견하지 못했는데, 후반에 접어들수록 인물들의 개성이 반짝반짝 살아나고 멋진 대사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면서 포텐이 터졌다. 멋진 대사들이 참 많았는데 일일이 언급하자니 메모를 안 해놔서 어렵겠고, 내가 이 리뷰를 쓰게 된 결정적 원인을 제공한 탁예진(공효진)의 대사를 중심으로 몇 가지만 언급하도록 하겠다. 하지만 그 전에 주인공들이 대략 어떤 인물들인지부터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1. 라준모(차태현)
예능국 고참 PD로서 '1박2일' 을 이끄는 수장이다. 현재 '1박2일'의 출연진으로 활동하고 있는 배우 차태현이 해당 프로그램의 PD역을 맡았으니 참 기분 묘했을 것 같다. 아무튼 '라준모'는 차태현의 평소 이미지와 꼭 맞아 떨어지는 배역이었다. 편안하고 유머러스하고 겉으로는 틱틱거려도 속으로는 배려심 깊은, 아주 오래된 찬구같은 남자. 무려 25년째 우정을 이어오고 있는 '탁예진'과 최근 새삼스럽게 묘한 감정이 폭발하는데 하필 이 때 막강한 연적(?)이 나타나서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결국은 큰 이변 없이 해피엔딩을 맞이한 럭키가이다. 초반에는 차태현이 지니고 있는 세 아이의 아빠이며 유부남 아저씨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노총각 '라준모'의 캐릭터가 잘 살지 않는다고 느꼈으나, 후반에는 웬만큼 적응이 되어서 괜찮았던 것 같다.
2. 탁예진(공효진)
명실상부한 '프로듀사'의 여주인공이며 4각 멜로의 중심이다. 23세의 파릇파릇한 아이유가 함께 출연하건만, 신디(아이유)는 처음부터 끝까지 외로운 짝사랑녀 신세를 벗어나지 못했던 반면, 36세의 원숙한 여배우 공효진은 오랜 친구에서 연인으로 변화된 라준모의 편안한 사랑뿐만 아니라, 서툴고 순수한 풋사랑의 열정을 고스란히 쏟아붓는 연하남 백승찬(김수현)의 사랑까지 한 몸에 받는 특급 행복을 톡톡이 누렸다. 역할은 뮤직뱅크 PD라는데 글쎄 일하는 모습을 거의 못 봐서 얼마나 유능한지는 모르겠고, 워낙 눈치가 젬병인지라 별로 센스있는 편도 못 된다. 하지만 솔직하고 털털하고 마음 따뜻한 그녀의 내면을 알게 되면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여자. 공효진은 특유의 명품 연기로 '탁예진'의 매력을 120% 발산시켰다.
3. 백승찬(김수현)
잘생긴 얼굴, 훤칠한 키, 명문대 출신, 화목한 엘리트 집안의 막내 아들... 게다가 어린 나이에 섬세한 배려심과 고상한 예의와 반듯한 성실성까지 갖춘 완벽남이다. 못 갖춘 게 너무 없어서 하마터면 재수없을(?) 뻔했는데, 다행히도 어눌한 말투와 순진한 눈빛과 허당스럽게 느껴질 만큼 고지식한 행동 덕분에 빈틈이 많아 보이니 인간적인 매력까지 더해져서 속속들이 호감형 인물로 자리매김했다. 예능국 신입 PD로서 '1박2일' 팀에 배정되며 라준모의 직속 후배가 되었다. 유들유들한 라준모와 고지식한 백승찬은 여러모로 참 다른 인간형인데, 묘하게도 여자 보는 눈은 비슷한 걸까? 원래 백승찬은 첫사랑 신혜주(조윤희)를 따라서 KBS 예능국에 입사했지만, 혜주가 유럽으로 떠나버린 후 느닷없이 탁예진에게 꽂혀서 또 짝사랑을 시작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신혜주는 라준모의 잠깐 애인이었고, 탁예진은 라준모의 오랜 친구이자 평생의 연인이었다. 백승찬처럼 완벽한 남자도 사랑만은 제 뜻대로 이룰 수 없으니, 어쩌면 세상은 생각보다 공평한지도 모르겠다.
4. 신디(아이유)
특별히 연기를 할 필요도 없겠다 싶을 만큼, '신디'는 그 배역을 맡은 가수 아이유와 싱크로율이 높은 캐릭터다. 23세의 어린 나이에 벌써 데뷔 10년차 가수. 폭발적 인기의 황홀함도 누려 보았고, 그 뜨겁던 환호성이 차츰 사라져갈 무렵의 절망도 느껴 보았고, 잔혹한 스케줄로 인한 육체적 고통에도 시달려 보았다. 게다가 신디는 부모님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과 그 사실을 본의 아니게 숨기고 있다는 죄책감까지 떠안고 있었기에 정신적 고통도 극심했다. 신디는 화려한 외양 뒤에 숨겨진 연예인의 비애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캐릭터였다. 이런 신디가 어느 날 갑자기 어리숙한 막내 PD 백승찬에게 홀딱 반해서 애타는 짝사랑을 시작했다. 비 오는 날 백승찬이 신디에게 우산을 빌려주긴 했지만, 꼭 제 날짜에 반납해야 한다면서 하도 신신당부를 하는 바람에 고마움보다는 부담을 더 느낄만한 첫 만남이었는데 그래도 신디는 좋았던 모양이다. 자기한테 전혀 관심없는 목석같은 태도 때문에 반했다고도 하는데 솔직히 나로서는 이해가 잘 안 된다. 하지만 아이유 생각보다 연기도 괜찮았고, 특히 너무나 싱그럽고 예쁘게 나와서 화면을 볼 때마다 상쾌했다.
아무튼 라준모와 탁예진은 오랜 친구면서도 아슬아슬한 감정의 줄타기를 하는데, 그 와중에 백승찬이 끼어들어 무려 8년이나 선배인 탁예진을 좋아한다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바람에 일이 복잡해졌다. 태어나서 처음 있는 힘을 다해 용기를 내서 고백한다며 백승찬이 탁예진에게 기습 키스를 퍼붓던 날 밤, 탁예진은 고민에 빠진다. 라준모와의 미래가 불확실한 상태에서 매력적인 연하남의 고백은 커다란 유혹이었다. 행복한 고민이지만 막상 당해보면 결코 쉽지 않은 선택의 기로... 탁예진은 평소 연애박사라고 소문난 막내작가 김다정(김선아)에게 조언을 구한다.
"두 가지 솔루션이 있어요. 그냥 둘 다 만나요. 양다리... 결혼하고 나면 못 하잖아요. 그리고 또 하나는... 더 미안한 쪽을 버려요. 미안하면... 못 만나요." 언뜻 생각하기에는 미안하니까 차마 버리지 못하고 만나야 할 것 같기도 한데, 오히려 미안하니까 버려야 한다는 김다정의 논리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그 말이 맞다. 미안한 마음을 가진 채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너무 힘든 일이다. 사랑이 그렇게 힘들어서는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까 미안한 마음으로 시작된 사랑에는 필시 비극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과연 탁예진은 누구에게 더 미안해할까?
탁예진의 선택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더 미안한 쪽'이 누군지를 생각하는 순간, 곧바로 백승찬의 눈빛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당장 그 날 밤 승찬을 만난 예진은 고백에 대한 거절의 답을 건네는데, 가장 솔직하고 단순하면서도 배려심 깃든 언어로 전하는 그 마음은 감히 단언컨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거절이었다. 그렇다고 거절당한 사람이 안 아플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아프지 않도록 어루만지면서 전하는 대답이었다. 부드럽지만 오해의 소지가 전혀 없을 만큼 단호했기 때문에, 계속 흔들리며 상처를 더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승찬아, 넌 정말 괜찮은 남자야. 네가 너무 착하고 따뜻하고 멋있어서, 내가 너무 미안한데 어떡하니... 네가 나를 그렇게, 그런 눈으로 보고 있으면 내가 너무 미안해지는데... 승찬아, 나를 위해 태어나서 처음으로 있는 힘을 다해서 용기 내줘서 고마워... 마음 표현해줘서 고마워... 너처럼 괜찮은 애가 그래줘서, 난 내가 굉장히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어. 정말 고마워!" 예진은 가만히 승찬을 포옹하며 진심어린 고마움과 미안함을 전했다. 그것은 받아들일 수 없는 고백에 대한 최고의 예의였다.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탁예진의 저 대사를 곱씹을 때마다 눈물이 난다. 특히 "마음 표현해줘서 고마워. 너처럼 괜찮은 애가 그래줘서, 난 내가 굉장히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꼈어!" 라는 부분은 처음 들을 때도 그랬지만 지금 이 순간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난다. 누군가로부터 진심어린 사랑을 받는다는 건, 자신을 가치있는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한 사랑은, 그것을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자신을 사랑해야만 타인도 사랑할 수 있으니까, 결국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것은 역시 사랑뿐이다.
거절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승찬은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것 아니냐면서 시간을 좀 달라고 애원해도 보았지만, 탁예진의 곁에는 마치 시청률 40%의 넘사벽처럼 느껴지는 라준모의 존재가 버티고 있기에 붙잡을 수는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너무 서툴고 급하고 촌스럽게 다가섰노라 후회하며, 지나간 고백은 모두 편집하고 다시 찍었으면 좋겠다는 승찬의 간절한 모습을, 예진은 그저 안스럽고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런 종류의 회한은 거절당한 아픔이 가실 때까지 홀로 감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해진 응답이 예스가 아닌 이상, 탁예진에게는 고백의 방법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백승찬은 실연의 상처에 빠져 허둥대지 않고 비교적 담담한 얼굴로 일상에 복귀했다. 거절하면서도 그를 최대한 배려해 준 탁예진의 마음 덕분이었을 것이다. 또 다행히 소속사 대표의 계략에 빠져 위기에 처했던 신디도 모든 오해가 풀리면서 되살아났는데, 그 역시 밤 새워 숨겨진 촬영 테이프를 찾아 준 탁예진의 노력 덕분이었다. 탁예진은 보면 볼수록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였다. 사랑과 우정의 갈림길에서 고뇌하던 라준모도 결국은 부인할 수 없는 사랑에 무릎꿇고 말았다. 위태롭던 우정의 벽이 넘어지고 사랑의 포옹이 이루어지는 순간, 마치 별빛이 내린 듯 공효진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소름돋는 메소드 연기였다.
현실적인 사랑의 가장 예쁜 모습들을 보여주어서 정말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결론은, 역시 사랑만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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