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용팔이' 조현재, 생애 첫 악역에 가슴이 설렌다 본문
무슨 '전원일기'도 아니고 세련된 김태희가 여주인공으로 컴백하는 드라마의 제목이 왜 하필 '용팔이'인가 했더니 '용한 돌팔이' 의사가 남주인공이었다. 그걸 몰랐을 때는 진짜 촌스럽고 요령부득인 제목이라 생각했는데, 내막을 알고 나니 제법 센스있고 멋진 제목처럼 느껴진다. 최고의 실력을 지녔으나 히포크라테스 선서보다는 오직 돈의 노예로 살아가는 의사 김태현(주원), 그가 바로 용팔이다. 법의 단속을 피하느라 병원에 갈 수 없는 조폭들의 불법 수술을 도맡아 하는 것은 물론, 병원에서는 환자 보호자들에게 노골적으로 촌지를 뜯어내는가 하면, 신입 인턴들에게는 대놓고 집안 배경을 캐물으며 가진 자에게 아부하려는 속내를 드러낸다.
그 모든 파렴치함의 원인은 좀 신파스럽게도 아픈 여동생의 치료비 때문이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운도 없이 큰 병을 앓게 된 여동생 김소현(박혜수)은 사실 오빠의 헌신적 보살핌이 아니었다면 벌써 오래 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용팔이 주원의 캐릭터는 나름 신선하고 매력적이다. 천재적 재능을 타고난 젊은 의사라는 점에서는 2년 전 '굿닥터'의 박시온과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오직 따뜻함과 순수함으로 무장했던 박시온과 달리 김태현은 시니컬함과 더불어 악의 세력에 스스로 대항할 능력을 지녔다. 움직일 수 없는 여주인공의 팔다리가 되어 그녀의 복수를 하나씩 진행해 나갈 용팔이의 활약, 제법 기대된다.
여주인공 한여진 배역에는 근 10년간 대한민국 최고 미녀의 타이틀을 거머쥐고 있는 여배우 김태희가 캐스팅되었다. 세간은 온통 그녀의 컴백에 집중했고 '용팔이'는 방송되기 전부터 김태희의 이름 하나로 높은 화제성을 확보했다. 하지만 솔직히 개인적으로는 크게 기대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외모가 예쁘긴 하지만 특별한지는 모르겠고 연기력도 언제나 평범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내 머릿속에는 그냥 그 정도의 여배우로 각인되어 있는 탓이었다. 물론 이제 30대 중반을 넘어선 그녀가 이번 작품을 통해 기존의 한계를 뛰어넘은 원숙한 연기력을 보여준다면 나의 인식은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한여진이라는 캐릭터의 설정 자체가 큰 무리수로 보이는 터라, 과연 김태희가 한여진을 통해 긍정적 변화를 보여줄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 라이벌 그룹의 후계자와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이다 경호원들의 추격 때문에 교통사고를 당하고, 애인이 죽은 후 아버지에게 반항하며 자살 시도를 하고, 급기야 부친과 오라비의 덫에 걸려 신경안정제로 깊은 잠에 빠져든 채 몇 년을 지내 온, 한신병원 12층의 잠자는 공주... 아무리 공감해 보려 해도 너무나 어색하고 삐걱거리는 설정이다. 차라리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식물인간이 되었다면 공감이 쉽겠는데, 신경안정제로 몇 년씩이나 잠을 재우다니 이건 좀...
그래도 이러한 설정 덕분에 악역 한도준(조현재)에게는 더욱 치명적인 악랄함이 추가되었다. 말기암 선고를 받은 아버지는 차마 사랑하는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보여줄 수 없어선지, 자기가 죽은 후에 깨우라는 명령과 함께 한여진을 깊은 잠에 빠뜨리지만, 그녀의 오라비 한도준은 아비가 죽은 후에도 여동생을 깨우지 않았다. 아비의 잘못된 선택이 아들의 비뚤어진 야망에 불을 붙인 격이었다. 한신그룹 제1상속녀였던 한여진의 존재는 어이없이 무력화되고, 한도준은 거저먹기나 다름없이 너무 쉽게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았다. 한신그룹은 여진의 외가 쪽 유산이었는데, 다른 어미에게서 태어난 이복 오빠 한도준이 단숨에 집어삼키고 만 것이다.
오라비를 제치고 여동생이 제1상속권자가 된 이유는 그녀가 어머니의 핏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한여진의 어머니는 한신그룹의 무남독녀였는데, 첫번째 남편이 사망한 후 한도준의 아버지와 재혼을 했다. 따라서 한도준은 사위가 밖에서 데려온 자식일 뿐, 한신그룹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굴러온 돌 같은 존재였다. 재혼 후 한여진이 태어나자 비로소 한신그룹은 정통성(?) 있는 후계자를 갖게 된 셈이다. 어머니의 핏줄에서 이어진 권력과 더불어 늦둥이 막내딸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까지, 한여진은 지상의 모든 행복과 특혜를 한 몸에 누리는 금지옥엽 공주였다. 운명의 그 날 이전까지는.
그렇다면 운명의 그 날 이전까지 한도준은 어떻게 살아왔을까? 겉보기엔 화려하지만 속은 텅 비어, 껍데기처럼 공허한 삶이 아니었을까?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은 한여진이었고 한도준은 병풍처럼 그녀의 주변에 서 있었다. 의붓어머니는 물론 친아버지의 사랑도 그의 몫은 아니었다. 세상의 모든 좋은 것은 어린 누이동생 여진을 위해서만 존재했다. 심지어 한신그룹을 섬기는 하인들조차도 그를 무시했다. 눈앞에서는 도련님 대접을 했지만, 뒤돌아서는 데릴사위가 밖에서 데려온 자식이라며 수군대고 키득거렸다. 어차피 그에겐 핵심 권력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에, 아무도 그를 두려워하거나 줄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여동생은 깊은 잠에 빠지고 아버지는 죽었다. (짐작컨대 여진의 어머니는 훨씬 더 일찍 죽었던 모양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도준의 마음속에 욕심이 싹트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닐까? 그간의 설움과 외로움을 한꺼번에 보상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는데, 이제껏 자기를 무시하고 깔보던 자들 위에 보란듯이 군림할 수 있는데, 그 달콤한 기회를 포기하기가 어찌 쉬웠으랴! 결국 한도준은 당연한 수순처럼 악마의 길을 선택했다.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누이동생의 영혼을 잠든 몸 속에 가두어 버린 한도준... 그러나 약에 내성이 생긴 한여진의 몸이 서서히 깨어나면서 운명의 회오리 바람은 다시 불어온다.
처음에는 한도준의 캐릭터 역시 아주 특별할 것은 없다고 여겨졌다. 실력과 야망을 지녔으면서도 태생적 한계로 2인자에 머물러야 하는 존재이니, 악역 중에서도 가장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캐릭터다. 별로 신선할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역할을 맡은 배우가 조현재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 내 눈이 번쩍 뜨였다. 극한의 외로움을 견뎌내는 안드레아 신부(러브레터)의 쓰라린 눈빛... 태어나기도 전에 버림받은 왕자(서동요)의 처연한 눈빛... 죽음을 넘어 한 여인만을 사랑하는 순정남(49일)의 애절한 눈빛... 그토록 가슴 저린 눈빛을 지닌 조현재가 차가운 악마로 변신한다고? 이건 좀... 사건이다!
이번 기회를 놓친다면 또 어디에서 이토록 비극적인 눈빛의 악마를 볼 수 있을까? 어쩌면 두 번 다시 볼 수 없을, 아주 독특한 매력의 악역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다. 비록 캐릭터 자체는 특별할 것 없지만, 조현재의 생애 첫 악역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슴이 설렌다. 게다가 1회에 등장한 조현재의 얼굴을 보니 '수백향' 이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데뷔 시절의 꽃미모를 어느 정도 회복한 모습이다. 한결 갸름하고 맑아진 신색으로, 비련의 남주인공이 아니라 악마를 연기하게 될 조현재의 활약을 기대한다. 끝내는 김태희와 주원의 합동 공격에 무너지고 말겠지만, 쓰러지는 그 순간 특유의 애절한 눈빛 한 번 날려 준다면 나는 만족할 수 있을 것 같다.
'드라마를 보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딸 금사월' 친숙한 막장의 향연 다시 시작되다 (3) | 2015.09.06 |
---|---|
'용팔이' 주원의 열연이 아까운 부실 대본의 한계 (10) | 2015.08.28 |
'오 나의 귀신님' 조정석, 사랑한다면 이 남자처럼! (2) | 2015.08.02 |
'프로듀사' 공효진, 가장 아름다운 거절의 방법 (3) | 2015.06.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