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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총사 VS 비밀의 문, 인조와 영조의 슬픈 공통점 본문

드라마를 보다

삼총사 VS 비밀의 문, 인조와 영조의 슬픈 공통점

빛무리~ 2014. 10. 13.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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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tvn에서 방송중인 '삼총사'는 인조(김명수)와 소현세자(이진욱)의 이야기를, sbs에서 방송중인 '비밀의 문'은 영조(한석규)와 사도세자(이제훈)의 이야기를 다루는 드라마이다. 특히 '비밀의 문'은 '뿌리깊은 나무'의 세종 이후 3년만에 영조로 변신한 한석규의 귀환으로 화제를 모았던 2014년 하반기 최대 기대작이었다. 그러나 한석규의 명품 연기에도 불구하고 '비밀의 문'은 대본과 연출의 미흡함으로 대중의 혹평과 시청률 하락에 시달리고 있으며, 반면 '삼총사'는 제법 탄탄한 구성과 신선한 재미를 선보이고 있음에도 케이블의 한계와 주 1회 방송의 핸디캡 때문인지 작품 수준에 적합한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비밀의 문'에는 '의궤 살인사건'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극 초반 세자의 절친이었던 신흥복(서준영)이 살해당하자 사도세자는 동분서주하며 그 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중인데, 단순치 않은 그 사건의 배후에는 부왕 영조의 비밀이 숨겨져 있었다. 영조가 왕세제였던 시절, 노론파 대신들과 결탁하여 이복형인 선왕 경종을 살해하고 왕위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문서 '맹의'가 바로 그것이다. 한없이 무력했던 왕세제 이금은 노론파 수장 김택(김창완)에게 목숨을 위협받으며 어쩔 수 없이 '맹의'에 수결을 했지만, 그 한 장의 문서는 30년이 흐른 후까지도 지긋지긋하게 영조의 발목을 잡고 있다. 


이 드라마의 패착은 사도세자가 '신흥복 살인사건'의 비밀을 파헤치는 과정의 몰입도가 매우 낮음에서 비롯된다. 차라리 '맹의'와의 연관성이 빨리 밝혀지고 영조와 사도세자의 대립이 본격화되면 그 때부터는 볼만할 것도 같은데, 재미없는 사건 추적 과정이 더 길어진다면 시청자는 더 많이 떨어져나갈 것이다. 특히 여주인공 서지담(김유정)은 사도세자와 함께 살인사건 추적의 핵심을 담당하는 캐릭터인데, 연기력은 괜찮지만 너무 어린 나이 탓인지 몰입에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어쩌면 극의 비장한 분위기에 녹아들지 못하고 혼자 겉도는 듯 느껴질 만큼 가볍고 유쾌하게 그려진 서지담의 캐릭터 자체가 더 문제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서지담을 버려야 드라마를 살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데, 유정이한테 좀 미안하지만 솔직히 나도 동의하는 바이다. 



순진한 사도세자가 거대한 비밀의 꽁무니만 부여잡고 있는 동안, '삼총사'의 소현세자는 냉철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자신의 길을 스스로 정하고 부왕 인조와 은밀히 맞서는 중이다. 조정의 다수를 차지하는 척화파 대신들은 명분과 자존심을 내세워 후금(청)을 배척하고 명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했으며 인조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해군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던 인조와 서인세력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조선에는 후금과 맞설 군사적 능력이 없었고, 쇠락해가는 명나라 역시 조선을 도울만한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러한 현실을 파악하고 있던 주화파 최명길(전노민)과 소현세자는 실리 외교를 펼쳐 전쟁을 막으려 하지만, 인조는 끝내 후금의 사신 용골대(김성민)를 죽이라 명한다. 이에 소현세자는 목숨 건 결단으로 용골대를 구하여 자신의 처소에 피신시킨다. 


밀려오는 비극적 역사의 물결을 전심전력으로 막아보려는 소현세자의 처절한 몸부림과 비교할 때, 비록 친구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기 위해서라지만 꼬꼬마 여자아이와 손잡고 시장 뒷골목을 뛰어다니는 사도세자의 모습은 어린애 장난처럼 가볍게 느껴진다. 어쩌면 실존 인물의 크기와 됨됨이도 차이가 있었을 것 같다. 소현세자는 병자호란 후 청에 볼모로 끌려가는 고난을 겪었으나 그 어려운 처지에서도 탁월한 외교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다. 세자는 용골대를 비롯한 청의 관료 및 대신들은 물론 서양 선교사들과도 활발히 교류했으며, 세자의 인품에 매료된 사람들은 자연히 조선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세자의 이러한 노력 덕분에 전쟁 당시 포로가 되어 노예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 중 상당수가 풀려났다고도 전해진다. 



영리한 현실 인식과 국제정세 파악으로 조선의 훗날을 준비했을 뿐 아니라, 낯선 서양 문물조차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였던 소현세자가 왕위에 올랐더라면 조선의 앞날은 과연 어떻게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이 일본의 개항보다 2백년 먼저였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그저 안타까울 뿐인데, 그 자리를 이어받은 아우 봉림대군(훗날 효종)은 형의 식견을 닮지 못하여 오직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만 가득한 인물이었으니 어쩌면 그 당시 조선의 역사는 전쟁보다 더 큰 비극이 아니었을까? 이렇게 소현세자의 죽음은 나라의 운명을 바꿔놓을 만큼 중대한 사건이었으나, 사도세자의 죽음에 그만큼의 의미를 부여할 수는 없다. 사도세자의 인물됨은 어린 시절 영특했다는 기록보다 백여 명을 살해한 미치광이였다는 기록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 


사도세자가 주목받는 이유는 부왕 영조에 의해 처참한 죽임을 당했다는 충격적 사건 때문이다. 하지만 명확히 역사적 사실로 기록되지 않았을 뿐, 부왕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세자는 그가 처음이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청에서 8년간의 볼모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으나 어처구니 없게도 2개월 후에 급사하였다. 그 머나먼 여정과 고달픈 나날을 거뜬히 헤쳐온 강건한 세자가 느닷없이 앓아눕더니 불과 나흘만에 숨을 거둔 것이다. 내의원에서는 학질(말라리아)로 진단했으나, 세자의 염습에 참여했던 종실 진원군 이세완(李世完)은 시신의 상태가 약물 중독으로 죽은 모습이었음을 증언했다. 세자의 온 몸은 검은 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인조실록 편찬자는 소현세자의 죽음에 의혹을 제기하며, 인조의 애첩 조소용이 세자 내외를 평소 인조에게 무함했던 일을 함께 거론한 바 있다. 소현세자의 병세를 담당했던 의원 이형익은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는데, 대신들이 세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물어 이형익을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고 한다. 더욱이 인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처리했으며 예법조차 무시했다. 이 모든 절차는 세자의 지위에 결코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만약 인조의 뜻에 의한 죽음이 아니었다면, 졸지에 자식을 잃은 아비가 과연 이토록 냉담할 수 있었을까? 


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인조에게는 가뜩이나 정통성과 명분이 부족했다. 그런데 아들 소현세자는 군주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청나라 조정과도 친밀한 관계였다. 어느덧 인조에게 소현세자는 자신의 자리를 위협하는 대상으로 비춰지고 있었으며, 소현세자의 귀국을 앞두고는 그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청나라를 부추겼다는 풍문까지 돌았다. 인조는 청이 왕위를 세자에게 양위하라고 할까 봐 불안해했고, 조정 대신들 또한 소현세자로 인해 자신들의 기득권이 위협받을까 염려했다. 애통하게도 소현세자는 반가운 귀향을 한 게 아니라 한 발 한 발 독사의 소굴로 걸어들어 왔던 셈이다. 



인조는 세자가 죽으면 세손에게 왕위를 전해야 하는 법을 어기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했으며, 맏며느리 강빈에게는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의 씌워 사약을 내렸다. 강빈의 친정 오빠들은 곤장에 맞아 죽었고 친정 어머니마저 처형되었다. 소현세자와 강빈의 어린 세 아들은 제주도로 유배를 떠났는데, 석철과 석린은 그 곳에서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고 막내 석견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소현세자 일가에게 닥친 운명은 그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처참한 것이었다. 그에 비하면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의 죽음 이후에도 무사히 살아남아 왕위에 오르고 대비의 자리를 차지했으니 훨씬 혜택받은 운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어쩌면 혜경궁 홍씨가 비운의 여인이 아니라 새로운 해석대로 권력 지향적인 냉혹한 여성이어서 자신과 아들을 독하게 지켜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도세자가 영조의 외아들이 아니었어도 그들이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을까? 만약 영조에게 다른 아들이 있었다면, 혜빈 홍씨와 세손 역시 강빈과 세 아들처럼 되지 않았을 거라는 보장이 없다. 결국 부왕에게서 미움받은 아들 소현세자와 사도세자는 지독히 슬픈 운명의 닮은꼴이었던 셈이다. 그런데 어쩌면 죽임을 당한 아들들보다 더욱 슬픈 운명을 지닌 사람은 권력의 소용돌이 한가운데서 어쩔 수 없이 제 손으로 자식을 죽여야 했던 아버지들이 아니었을까? 



인조는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고, 영조는 무수리에게서 태어난 얼자 출신이었다. 가뜩이나 전쟁 후 왕권이 약화된 조선 후기에 정통성이 부족하다는 것은 왕으로서 매우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더욱이 영조는 선왕 경종을 독살했다는 의심마저 받고 있었다. 왕위를 빼앗긴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일이니, 반드시 권력에 눈 멀어서가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들은 비정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왕위는 한시도 편하게 눈을 붙일 수 없이 위태로운 자리였는데, 계승권자로서 아비의 노선을 따르지 않고 반대편에서 개혁정치를 추구하는 아들이란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을까? 


'비밀의 문'에서 한석규의 열연을 보고 있으면, 실제 영조의 인물됨이 그와 같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앞에 선 사람이 누구인가에 따라 수시로 얼굴을 바꾸며, 냉혹한 권력자의 모습과 비굴한 소인배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는 영조의 캐릭터는 매우 섬뜩하다. 위기에 처했을 때는 임금의 체통 따위 무시하고 자세를 바짝 낮추며 비굴한 미소를 짓지만, 적당한 때가 이르면 순식간에 몸을 일으켜 상대에게 폭풍처럼 매서운 일격을 날린다. 어쩌면 그토록 권모술수와 정치적 능력이 탁월했기에, 얼자 출신의 왕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 가장 강력한 왕권을 휘두를 수 있었을 것이다. 마음 약하고 순진해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심기가 독하고 술수에 능하다 해도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고 싶은 아비가 어디 있었으랴. '삼총사'와 '비밀의 문'을 시청하다 보면 저절로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풋풋하고 순수한 캐릭터에 몰입하게 되지만, 때로는 그 뒤편에서 악역으로 그려지고 있는 인조와 영조의 불안한 모습이 더욱 처연하게 와닿곤 한다. 왕실이 아닌 다른 가문에서 태어났더라면 최소한 제 손으로 자식을 죽이는 고통은 겪지 않아도 되었을 거라 생각하니 문득 '제왕의 딸 수백향'의 대사 한 줄이 떠오른다. 전생에 죄를 많이 지으면 왕으로 태어나고, 왕으로서 고통을 견디며 선업을 쌓으면 다음 생에는 평민으로 태어날 수 있다던가? 과연 그 말이 오늘날에도 적용될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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