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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희의 '희망가', 신묘한 절망의 카타르시스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이선희의 '희망가', 신묘한 절망의 카타르시스

빛무리~ 2014. 8. 17.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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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싱어' 시즌3의 개막을 앞두고 그 전야제(?)가 한창이다. 시즌1과 시즌2의 출연 가수들이 나와서 저마다 시즌3에 대한 기대를 내비치는가 하면, 시즌3의 첫번째 포문을 열게 될 가수 이선희를 중심으로 몇몇 후배 가수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며 함께 노래하는 시간도 마련되었다. 한 번도 블로그에 포스팅한 적은 없었지만 '히든싱어' 시즌1, 2의 열혈 애청자였던 나에게 시즌3 자체는 물론 그 전야제까지도 놓칠 수 없는 보물같은 방송이었다. 가수 이선희, 김경호, 백지영, 임창정, 그리고 사회자 전현무와 패널 송은이가 함께 한 방송은 매우 아늑하고 따뜻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김경호, 백지영, 임창정 모두 이 시대 최고의 가창력을 자랑하는 가수들이지만, 선배 이선희를 향한 그들의 경외심은 형언하기조차 어려운 것이었다. 별처럼 수많은 그녀의 히트곡들이야 말할 것도 없거니와, 50세를 넘긴 지금까지 전성기 때의 성량과 음색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이선희의 실력은 후배들뿐 아니라 문외한인 시청자들까지도 감동시킬 수밖에 없었다. 더욱 세련되고 원숙해진 창법은 오히려 전성기 때보다 훨씬 강한 전율을 일으키기도 했다. '히든싱어'를 준비한다는 핑계로 친한 선후배들이 모여 정담을 나누고 노래하는 형식이었는데, 단순한 포맷이었지만 시청의 만족감은 매우 높았다. 

 

이선희와 후배들의 콜라보 무대는 임창정과 함께 부른 '소주 한 잔'으로 시작되었다. 직접 이 노래를 작사했다는 임창정은 이선희가 자신의 노래를 부르는 동안 감격에 겨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더니만 결국은 눈물을 쏟고 말았다. 이선희는 후배들 중에도 백지영에게 특별히 애틋한 감정을 느끼는 듯, 백지영의 노래는 무려 두 곡이나 선사해 주었다. 색다른 리듬으로 편곡한 '대쉬(Dash)'는 이선희 혼자서 완창했고, 백지영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한다는 '잊지 말아요'는 두 사람이 주고 받으며 함께 불렀다. 백지영의 OST는 배우의 연기를 더욱 돋보이게 함으로써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게 해 준다는 칭찬도 잊지 않았다. 백지영 역시 '잊지 말아요'를 부르며 감격에 겨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김경호의 노래 중에는 '나를 슬프게 하는 사람들'을 선곡하여 멋진 콜라보 무대를 선사해 주었다.

 

 

다음 주에 드디어 '히든싱어' 시즌3의 첫방송이 전파를 타게 된다. 이선희의 특별한 목소리와 파워풀한 창법을 똑같이 따라 부른다는 모창능력자 5명의 실력이 벌써부터 궁금해지는데, 그 호기심보다 나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사로잡은 것은 이선희가 권하는 '힐링송'이었다. 자신이 힘들다고 느낄 때마다 듣고 부르며 위로를 얻는다는 이선희의 힐링송은 바로 '희망가'였는데, 정확히 언제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는지도 알 수 없다는 구전가요 '희망가'는 온 국민이 나라 잃은 설움에 잠겨있던 일제강점기 때부터 꾸준히 불려왔다고 한다.

 

사실 '희망가'는 한동안 나에게도 특별하고 소중한 애청곡이었다. 처음 그 노래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2007년에 방송된 드라마 '경성스캔들' 때문이었다. '경성스캔들'의 시대적 배경은 바로 일제강점기였고, 차송주(한고은)는 기생의 신분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비련의 캐릭터였다. 이제껏 수많은 드라마를 감상했으나 개인적으로는 '경성스캔들' 만큼 처절한 슬픔의 여운을 남긴 작품은 없었고, 차송주와 이수현(류진)만큼 불쌍하게 기억되는 캐릭터도 없다. 남녀 주인공인 선우완(강지환)과 나여경(한지민)은 그래도 실낱같은 희망이나마 간직할 수 있었지만, 이수현과 차송주에게 주어진 운명은 외로움과 비극뿐이었다.

 

 

어느 날 경성 최고의 기생 차송주는 화려한 차림으로 주점의 무대에 올라 마이크를 잡는다. "아름다운 밤이에요, 여러분... 청춘의 특권이 허락되지 않는 척박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들을 위해... 그럼에도 살아가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러분들을 위해 이 노래를 부르겠어요." 그리고 시작된 노래가 바로 '희망가'였다. 희망을 울부짖는 절망의 노래... '희망가'의 1~2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이 무엇이냐
부귀와 영화를 누렸으면 희망이 족할까
푸른 하늘 밝은 달 아래 곰곰이 생각하니
세상 만사가 춘몽 중에 또다시 꿈이로다

 

부귀와 영화를 누릴지라도 봄 동산 위에 꿈과 같고
백년 장수를 할지라도 아침의 안개로다
담소화락에 엄벙덤벙 주색잡기에 침몰하여
세상 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한고은의 노래 실력이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드라마의 분위기와 기막히게 어우러지는 애절한 노랫가락은 가슴 깊은 곳을 후벼파는 듯했다. 제목도 가사도 '희망'이라는 단어를 끝없이 되뇌이고 있지만, 기이하게도 이 노래가 담고 있는 정서는 한 조각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는 암흑의 절망이었다. 부귀 영화도 소용없고 백년 장수도 무의미하다. 암울한 세상을 한탄하며 그저 엄벙덤벙 모두 잊은 채 살아보자 해도 힘겹고 허무하긴 마찬가지다. 그러나 가엾은 청춘들은 한 치 앞조차 보이지 않는 캄캄한 절망 속에서도 여전히 사랑을 하며, 바랄 것이라고는 하루 하루의 안녕뿐인 현실에서도 위태로운 목숨을 모질게 이어간다. "그럼에도 살아가고 그럼에도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라고 말했던 한고은의 처연한 대사가 어쩌면 이 시절에도 이토록 잘 어울릴까?

 

물론 지금이 일제강점기만큼 끔찍한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을 비롯해서 올해 상반기에 너무나도 비극적인 사건 사고가 많았던 탓인지, 세상은 암흑같고, 목숨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허상같고, 따라서 인생에는 아무 희망도 없는 것 같은 느낌이 사람들의 심리를 강하게 지배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한동안 잊고 있었던 노래 '희망가'를 이선희의 목소리로 들으니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풍부한 감정이 깃든 이선희의 창법은 언제나 그렇듯 노래의 감동을 배가시켜 주었고, 참 신묘하게도 노래를 듣고 있자니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의 정서가 담긴 예술 작품에는 슬퍼하는 사람들의 공감을 이끌어냄으로써 치유하는 효력이 있다. '나 혼자만 슬픈 것이 아니구나, 나 혼자만 절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구나, 내가 눈물을 흘릴 때 어디선가 또 다른 사람이 나처럼 슬퍼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구나...' 예술을 통해 이런 느낌을 받는다면, 그 어떤 위로의 말보다도 강력한 치유를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희망가'는 그런 의미에서 매우 효과적인 힐링송이라 할 수 있다. 노래 자체는 절망을 담고 있지만, 그것을 듣거나 부르는 사람은 공감 작용으로 인해 편안함을 느끼며 역설적으로 희망을 꿈꾸게 되는 것이다. 잊었던 노래를 다시 기억하게 해 준 이선희 덕분에 한동안은 '희망가'를 읊으며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것 같다. "... 세상 만사를 잊었으면 희망이 족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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