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꽃보다 청춘' 마추픽추, 뜨거운 감동과 아쉬움이 공존하다 본문
'꽃보다 청춘' 40대 팀의 페루 여행은 역시 제목답게 '청춘'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20대 진짜 청춘들의 라오스 여행이 시작되겠지만, 뜨거운 청춘의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는 그들보다는 오히려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청춘의 실체에 더욱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40대 청춘 3인방 윤상, 유희열, 이적은 페루 여행의 마지막 날 부푼 꿈을 안고 새벽녘에 쿠스코의 숙소를 나섰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손꼽히는 마추픽추의 절경을 감상하기 위해서였다.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마추픽추 행 버스터미널은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관광객들로 북새통을 이루고 있었다. 드디어 고대하던 마추픽추 정상에 도착... 그러나 100일 중 95일 동안은 맑은 날씨를 자랑한다는 마추픽추에 하필이면 짙은 안개가 끼어 있었다.
온 세상이 하얀 도화지처럼 보일 만큼 잔뜩 흐린 날씨에 꽃청춘은 낙심한다. 살다 보면 뜻밖에 운이 나쁠 수도 있고 열심히 노력했어도 뜻대로 안 되는 일이 더 많다는 사실을 충분히 깨닫고 있는 나이지만, 어쩌면 그 머나먼 지구 반대편까지 날아가서 마추픽추의 절경을 두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일생에 단 한 번 뿐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그토록 허무하게 날려 버린다는 것은 좀처럼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이 의미 없었던 것은 아니라며 애써 자신을 위로하려 해 봐도, 대책없이 밀려드는 실망과 아쉬움에 가슴이 울컥해진다. 결국 언제쯤이나 구름과 안개가 걷히고 태양이 얼굴을 내밀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들은 기약없는 기다림을 시작한다. 최악의 경우 (스케줄의 압박을 무릅쓰고) 귀국 날짜를 하루 늦춰서라도 마추픽추를 보고야 가리라는 결단에서였다.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창조주의 손이 두터운 솜이불을 걷어 치우는 것처럼, 하늘을 덮고 있던 짙은 구름과 안개가 빠른 속도로 밀려나며 눈부신 태양과 하늘빛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안개 속에 숨겨져 있던 절경이 삽시간에 또렷한 자태를 드러내는 장면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마치 천지창조의 순간을 목격하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화면으로 보는데도 그 벅찬 희열이 느껴질 정도였으니, 직접 본 꽃청춘들은 어땠을지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만약 처음에 안개가 끼어있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이만큼의 짜릿한 감동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가장 깊었던 절망이 가장 큰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 그것은 마추픽추가 꽃청춘에게 선물한 이벤트와도 같았다.
수백 년의 세월을 무심히 비껴간 듯 고이 간직되어 온 공중도시, 잉카 문명의 결정체를 묵묵히 응시하는 꽃청춘 3인방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확실치는 않지만 내 가슴까지 울려오는 마추픽추의 감격을 곰곰히 되새기며 짚어보니 조금은 알 것도 같다. 광활한 대자연이나 오랜 세월을 지나 온 유적지 등을 바라볼 때면 이제껏 내가 살아 온 세상이 얼마나 작았는지, 내가 지나 온 시간이 얼마나 짧았는지를 새삼 느끼게 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앞에 한없이 작아지는 자신을 느낄 때, 마음은 겸손해지고 희망은 부풀어 오른다.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거리낄 것도 없는 무한의 자유를 만끽한다. 고작 수십 년밖에 못 살았으면서 제법 나이 많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우스워진다. 마추픽추, 너는 도대체 몇 살인게냐?
청춘의 치열한 시간들을 20년이나 함께 걸어왔던 세 친구는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감회에 젖는다. 이 넓은 세상 그 어느 곳에 외톨이로 떨어졌던 자신의 곁에 이처럼 좋은 친구들이 있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싶어진다. 한없이 고맙고 애틋하고 곁에 있는데도 그리워진다. 이렇게 작고 보잘것없는 내 곁에 있어줘서 고맙고, 나 역시 작고 보잘것없는 너를 품에 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비록 찰나일지언정 인간 내면의 순수함과 사랑의 본질을 극도로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마추픽추에서 만난 세계 각지의 친구들에게 '청춘'이란 무엇이냐고 물었다. 청춘은 영원히 반짝이는 것, 청춘은 자신을 작은 상자 속에 가두지 않는 것, 청춘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일을 하는 것, 청춘은 두려워하지 않는 것, 청춘은 오늘을 느끼고 오늘을 즐기는 것이라고 친구들은 대답했다.
이렇게 감격스런 청춘의 정의를 내리면서 '꽃청춘'은 마무리되는가 싶었다. 그런데 방송이 끝나자 마자 구체적인 생각으로 접어들기 시작한 나는 곧바로 현실의 한계를 느꼈고, 삽시간에 밀려오는 아쉬움은 감동을 절반이나 먹어버렸다. 청춘은 '용기'이고, 청춘은 '자신이 생각하는 그 일을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기에 과감하게 페루 여행을 떠나볼까 생각했지만, 역시 방송이란 현실보다는 환상에 가까운 것임을 절실히 느꼈을 뿐이었다. 시간적 경제적 여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누구나 각박한 일상 속에서 먹고 살려다 보면 늘상 바쁘고 돈도 없으니, 그 먼 곳까지 여행을 간다는 것 자체가 비현실적인 사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문제들 외에도 '꽃청춘'과 내가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또 있었다.
나는 최근 1년 반 동안 파리(프랑스), 제주도, 홍콩 여행을 다녀왔다. 결혼 전까지 평생 여행과는 담쌓고 지내던 내가 갑자기 몰아치듯 여행을 세 군데나 다녀온 이유는 '은둔형 외톨이'에 가까운 나를 집 밖으로 끌어내려는 남편의 눈물겨운 노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 자신도 별로 여행에 익숙치 않으면서 더욱 어리버리한 나를 끌고 다니려니, 우리 부부에게 있어 매번의 여행은 참으로 갑갑하면서도 스릴 넘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파리로 신혼여행을 갈 때는 인천공항에 잔뜩 눈이 쌓여서 이륙이 두 시간 반이나 지연되는 바람에 환승지인 두바이에 도착한 시간도 그만큼 늦어졌고, 외국 여행이 처음이었던 우리는 두바이 공항에서 미친듯이 헤매다가 파리행 비행기를 놓칠 뻔했다.
간신히 꼴찌로 비행기에 탑승 성공해서 국제 미아 신세는 면했으나, 긴 비행에 지칠대로 지쳐 파리에 도착한 후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12월 말, 크리스마스 축제가 한창이라선지 베르사유, 에펠탑, 샹젤리제, 루브르 등 모든 장소는 세계 각지에서 모여든 인파로 꽉 차서 발 디딜 틈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꽃보다 할배'에서 비춰졌던 한가로움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고, 출퇴근 시간 지하철 속 비슷한 인파에 등 떠밀려 다니느라 구경다운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 치명적인 함정은 현지 한국인 가이드가 차를 운전해서 사람들을 해당 장소에 내려준 후 제각각 알아서 구경을 하고 몇 시까지 다시 모이라는 지시를 하는데, 주어진 시간이 터무니없이 짧다는 데 있었다. 시간이 부족하니 당최 마음이 초조해서 여유로운 구경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어떤 장소에서는 고작 몇 장의 사진만 찍은 후 곧바로 이동하기도 했다.
그 곳까지 22시간 가량을 비행기로 날아가서 꿈에 그리던 노틀담 성당에 이르렀는데, 그 안에는 들어가보지도 못한 채 주변만 둘러보고 온 것은 아직도 천추의 한(?)으로 남아있다. 성당에 입장하려는 사람들의 줄이 꼬불꼬불 수백 미터나 서 있는데, 시간이 부족한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파리 여행이 들인 비용에 비해 만족도가 매우 낮았던 이유는 사람들의 불친절 때문도 있었지만 그와 같은 패키지 여행의 한계가 가장 컸다. 거기서 교훈을 얻은 우리는 다음 차례로 제주도 여행을 준비할 때 여행사나 가이드를 통하지 않고 철저히 우리 둘만의 자유여행으로 계획했다. 결과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물론 둘 다 여행에 익숙치 못해서 힘들긴 했지만, 남의 눈치를 전혀 안 보고 우리 마음대로 움직이며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 있으니 정말 좋았다.
이러니 여행의 참맛을 느끼고 싶다면 반드시 자유 여행을 가야 한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하지만 국내라서 여권도 필요없고 말도 다 통하는 제주도 여행을 어찌 외국 여행과 비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부부는 유희열이나 이적처럼 능수능란하지 못하니 먹고 자고 이동하는 것에 모두 어려움을 느끼겠지만, 그래도 남편이 영어를 좀 하니까 맘 먹고 부딪히면 어찌어찌 여행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실제로 홍콩 여행은 전반에만 패키지를 이용하고 후반에는 자유 여행을 했는데, 만족도는 자유 여행이 훨씬 높았다. 가이드 꽁무니만 줄기차게 쫓아다니던 패키지 때는 역시 시간 맞춰 모이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 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홍콩은 안전한 도시였고, 시민들이 외국 여행객에게 모두 친절했으며, 한국에서 가깝고 한국인도 많은 곳이었다.
하지만 페루는 사정이 다르다. '꽃청춘'에 비춰진 화면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곳은 결코 안전하지 않다. 모텔 입구에는 마치 감옥처럼 겹겹이 철창이 드리워져 있고, 밤 시간에 편의점은 손바닥만한 창문만 뚫어놓은 채 극도의 경계 속에서 영업을 한다. 게다가 지구 반대편의 머나먼 나라이며, 상대적으로 한국인이 많지도 않을 것이고, 그 곳 사람들이 별로 친절할 것 같지도 않다. '꽃청춘'을 보고 마음이 동해서 내가 슬쩍 운을 떼어 봤더니 남편은 "살아 돌아오려면 꼭 패키지로 가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에 나는 "그럴 바에는 안 가겠다"고 했다. 패키지로 가면 마추픽추 정상에서 사진이나 몇 장 찍고 이동하며 속으로 "아, 돈 아까워~" 하면서 통탄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유희열, 윤상, 이적처럼 느긋하게 주저앉아 수다 떨며 꼼꼼하게 구경하기란 절대 불가능할 것이다.
그들은 배낭 여행의 능력을 충분히 갖추기도 했지만, 거대 촬영팀의 일원(중심)이기에 안전도 확실히 보장되어 있었다.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아무런 안전장치 없이 둘이서 무턱대고 갔다가 아무 일 없이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혹시 험한 일이라도 당하게 되면 누구한테 억울함을 하소연이나 할 수 있겠는가? 쥐도 새도 모르게 머나먼 이국 땅의 한 줌 먼지가 되어 흩어질지도 모르는 일인데... 역시 나이가 들어서 겁이 많아진 걸까? 20대 진짜 청춘이었다면 "그까이꺼 하나도 겁 안 나!" 하면서 부딪혀 볼 수도 있었으려나? 너무 현실에 물들어서, 너무 세상을 알아버려서 이제는 안 되는 걸까?
'꽃청춘'과 보통 사람들과의 차이점은 또 있다. 그들은 '음악인'이라는 특별한 직업을 갖고 있으며, 정말 성공하기 어려운 그 세계에서 모두 일찌감치 성공하여 자기만의 독자적 영역을 구축한 사람들이다. 그처럼 특혜받은 인생에는 가능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있어 청춘 시절의 친구와 나이 들어서까지 함께 하기는 매우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천방지축 열정 가득하던 20대 초반을 지나 20대 후반에 이르고 30대 초반이 되면, 하나 둘씩 결혼과 직장에 묶여가는 친구들은 더 이상 예전처럼 함께할 수 없게 된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같은 직장에 다니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윤상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것처럼 '인생 이야기와 일 이야기를 모두 공감하며 나눌 수 있는 친구'는 극히 드문 셈이다.
멀리 이사를 가는 경우도 많고, 가까이 있어도 저마다의 삶이 힘겹고 팍팍하니 점차 연락은 뜸해진다. 특히 여성들의 경우는 결혼과 출산을 치르고 나면 육아 전쟁에 시달리느라 더욱 여유가 없어진다. 맞벌이를 하는 경우라면 ×2의 노동에 시달려야 하니, 결혼 전의 친구들과 자주 만나기는 커녕 꾸준한 연락조차도 거의 불가능해진다. 서로의 소중함을 느끼며 서로에게 애틋한 눈빛을 던지는 유희열, 윤상, 이적의 모습을 보며, 나와 청춘을 함께했던 친구들 중 지금 내 곁에 남은 사람이 누구인지를 생각하니... 따스하던 가슴이 오히려 스산해졌다. 나는 결혼을 워낙 늦게 했지만, 친구들이 하나 둘씩 떠나가면서 가끔씩 통화만 하게 되어버린지는 이미 오래된 일이었다. 1년에 한 번쯤 만나서 차를 마시다가도 아이 때문에 얼른 가봐야 한다면서 일찍 헤어지는 그런 만남이 전부였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우리도 '꽃청춘'처럼 친구들과 여유로운 해외 여행을 즐겨볼 수 있을까? 60대쯤 되면 가능하려나? 하지만 그 때도 자유 여행의 위험성은 여전히 남아 있을텐데, 돈 많이 들여서 아주 비싼 패키지 여행을 가면 좀 느긋하게 구경할 수 있으려나? 결국 현실과 저만치 동떨어진 '꽃청춘'의 감미로운 꿈은 수십 년 후의 희망만을 남긴 채 그렇게 멀어져갔다. 그래도 상관없다. 수십 년 후든 수백 년 후든, 꿈과 희망은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훨씬 좋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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