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여왕의 교실' 천보근, 12세 명품배우의 놀라운 연기력 본문
사실은 초반부터 김서현(김새론) 캐릭터를 편애하던 터라 8~9회 방송에 많은 기대를 했습니다. 주인공 심하나(김향기) 못지 않은 의리와 정의감을 지니고도 친구들과 좀 더 격의없이 어울리거나 진심으로 가까워지지 못하게 만드는 김서현의 트라우마가 무엇일지 궁금했거든요. 알고 보니 서현이 아빠는 2년 전의 교통사고로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는데, 하필 그 날은 서현이가 전국 경시대회에서 상을 타던 날이었다죠. 원래는 의사인 엄마가 시상식에 오려고 했지만 응급환자 때문에 발이 묶였고, 뒤늦게 소식을 들은 아빠는 급히 딸을 축하해 주러 가다가 사고를 당했던 겁니다. 물론 아빠의 사고가 자기 때문도 엄마 때문도 아니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죄책감을 억누를 수 없었던 서현이는 그 날 이후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왔습니다.
식물인간 상태에서도 신체 기능이 점점 악화되어 결국 뇌사 판정이 내려질 상황이 닥치자, 엄마는 아빠를 이제 그만 놓아 주자고 서현을 설득하는데,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는 서현은 강하게 반발했죠. "엄마는 가족보다 좋은 의사 되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 날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라고, 나는 나대로 알아서 살 테니까 신경쓰지 말라고" 엄마에게 모진 소리를 수차례 거듭했습니다. 자기는 국제중과 특목고에 진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할 것이며, 학비는 최대한 장학금을 받도록 할 거라고 선언할 때는 무섭기까지 하더군요. 초등학교 6학년 어린 나이에도 현실적인 독립 방안을 제시할 수 있는 야무진 능력과 독한 결심이 정말 예사롭지 않았어요. 엄마와 자신을 그렇게 괴롭히면서라도 죄책감의 무게를 덜고 싶을 만큼, 아빠의 사고는 서현에게 큰 트라우마로 작용하고 있었던 거죠.
마침 오동구(천보근)의 할아버지 오여사(남명렬)가 같은 병원에 입원했던 터라, 병문안을 갔던 심하나와 은보미(서신애)는 우연히 서현이 아빠의 일을 알게 되었죠. 하지만 숨기고 싶었던 집안 사정을 들켜버린 것에 화가 났던지, 서현은 담임선생 마여진(고현정)에게 마음에도 없는 반성문을 제출하면서까지 조를 바꾸고 친구들을 외면했습니다. 국제중 입학 준비를 핑계대며 청소에서도 빠지고 얄미운 범생이 노릇을 하기 시작했죠. 그래도 정 많은 오동구는 할아버지를 병간호하는 틈틈이 서현이 아빠의 병실을 찾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즐겁게 해주려 하는데, 그 광경을 목격한 서현은 친구들의 오지랖에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참견하지 말라고 냉정하게 뿌리칩니다.
교통사고 후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아빠를 지켜보며 살아온 2년의 세월은, 김서현이라는 소녀의 마음속에 커다란 그늘을 드리우기에 충분한 이유였죠. 사안의 심각성이 부족했던 것은 아니지만 일단 설정 자체는 진부하게 느껴졌고, 줄곧 마음을 닫은 채 고집을 피우던 서현이가 갑자기 마음을 열게 되는 중요한 과정에 설득력을 부여하지 못했다는 점은 실망스럽더군요. 오동구가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엄마 얼굴도 모르는 자기 처지를 이야기하고, 너를 사랑하는 엄마에게 모질게 굴지 말라고 아무리 설득해도 별다른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던 서현이가 변하게 된 계기는, 좀 생뚱맞게도 동구 할아버지의 시한부 판정을 알게 된 사건이었습니다. 동병상련의 위로가 그토록이나 컸던 걸까요?
오여사가 길어야 6개월, 짧으면 2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았음을 알게 된 서현은 그 사실을 동구에게 전하며 말합니다. "너도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아직 희망이 없는 건 아니지만, 혹시라도 너도 나처럼 모르고 있다가 후회할까봐... 나도 아빠가 다시 깨어나실 거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야. 그냥 한 번만, 아주 잠깐만이라도 눈을 떠서 내 이야기를 들어줬으면 했어. 미안했다고, 사랑한다고... 나는 아빠한테 작별인사도 못했으니까... 그래서 너는 나처럼 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거야. 너는 아직 시간이 있으니까, 남은 시간 소중하게 지내." 그 쌀쌀맞은 소녀가 친구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저렇게까지 이야기해 주는 모습은 매우 감동적이었죠. 하지만 그 이후의 전개는 좀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오동구의 할아버지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것과, 김서현 자신이 엄마와 화해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 아니던가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엄마를 대하는 서현의 태도가 갑자기 달라진 것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아빠의 생명 유지 장치가 제거되고 의사가 사망 판정을 내리던 순간, 예전의 서현이라면 엄마를 외면한 채 혼자 꼿꼿이 서서 울었을 것 같은데, 언제 그렇게 변했는지 서현이가 먼저 엄마의 손을 꼭 잡는 게 아니겠습니까? 물론 아름다운 장면이긴 했지만,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의문스러웠어요. 서로 관심 끊고 살자던 게 불과 며칠 전인데, 이제는 엄마에게 청소 좀 하라는 둥 똑같은 찌개는 그만 좀 끓이라는 둥, 잔소리까지 시작했습니다. 서현의 갑작스런 변화는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학교의 상황을 보면, 마여진의 수업을 거부하고 미술실에서 놀던 아이들이 점점 더 심하게 뒤처지는 자신들의 모습에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점차로 마여진의 수업을 듣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는 추세였죠. 그런데 아빠의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온 김서현이 꼴찌 조에 다시 합류하면서 6학년 3반의 분위기는 또 혼란스러워지고 말았네요. 엄마한테 못되게 구는 건 나쁘고 엄마와 화해하는 게 좋다는 사실은 당연한 거니까, 아빠를 잃은 서현이가 긍정적 방향으로 변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좀 부족해도 그러려니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조건 담임에게 반항해야만 옳고, 담임의 뜻에 따르면 나쁜 건가요? 미술실에서 놀던 꼴찌들은 마여진의 수업을 듣겠다고 교실에 들어가는 아이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따져보면 그건 아니죠. 물론 마여진의 교육 방식이 기본적으로는 옳지 않다고 저도 생각하지만, 기껏 방학 중에 학교까지 나왔으면 실컷 놀다 가는 것보다야 공부를 하고 가는 편이 바람직한 거 아닐까요?
김서현이 등장하여 꼴찌들을 이끌고 당당히 미술실로 탈출함으로써, 간신히 조성되었던 면학 분위기는 다시 와장창 깨져 버렸습니다. 마녀 담임에게 반항하며 미술실을 택하면 정의로운 의리파 친구이고, 교실에서 수업 듣기를 선택하면 공부밖에 모르는 치사한 배신자가 되는 듯한 그런 분위기가 다시 조성된 거죠. 도대체 논리적으로 맞질 않는데, 서현이는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더군요. 오동구의 할아버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과 담임 선생에게 반항하는 것이 무슨 연관이라도 있나요? 엄마와 화해하고 마여진에게 반기를 들게 되는 과정이 설득력 있게 그려져야 김서현 캐릭터의 당위성이 살아나는데, 제가 보기엔 너무 허술하게 대충 처리한 것 같았어요. 뭐 어쨌든 앞으로는 심하나와 김서현을 주축으로 6학년 3반 아이들이 똘똘 뭉쳐 마여진을 상대해야 하니까, 까다롭게 왜냐고 따지지만 않는다면 얼추 분위기는 마련된 셈이네요.
원래 이 포스팅의 주인은 오동구였는데, 역시 편애하는 캐릭터라서 어쩔 수가 없나 봅니다. 김서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 새 너무 길어지고 말았네요. 하지만 그래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죠. '여왕의 교실' 9회에서 보여준 아역배우 천보근의 명품 연기는 정말 소름끼치는 수준이습니다. 초반 1~2회부터도 이미 그 범상찮은 기운은 느끼고 있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거든요. 그저 어린 것이 상당히 능청맞게 연기를 잘 하는구나, 몸을 사리지 않는 열정마저 갖췄으니 좋은 배우가 되겠구나, 생각은 했었죠. 중학생 형들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연기할 때 너무 리얼하게 하느라고 실제로도 많이 맞았다던데, 한 마디 불평이나 힘든 내색도 없이 밝은 표정으로 잘 견뎌냈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는 무척이나 대견하기도 했습니다. 다만 오동구는 심하나와 비슷하게 오버스러운 캐릭터라서 개인적으로는 몰입이 잘 안 되더군요. 저는 실제로도 충분히 있을법한 김서현이나 은보미의 캐릭터가 훨씬 마음에 와 닿거든요.
그러나 제대로 포텐을 터뜨리는 천보근의 연기를 감상하니, 더 이상 오동구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9회에서 오동구는 김서현과 1:1로 맞붙는 장면이 많았는데, 이미 수많은 작품을 통해 검증된 아역 배우 김새론의 연기력이야 새삼 놀랄 것도 없었지만, 그보다 두 살이나 어리고 경력도 짧은 천보근이 조금도 밀리거나 기죽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존재감을 발산했다는 건 무척 놀라운 일이었어요. 자기보다 머리 하나 정도는 더 키가 큰 새론이 누나를 한껏 올려다 보며 "네가 마녀 앞에서 아무리 잘난 척해도 넌 그냥 겁쟁이야. 어리광쟁이, 겁쟁이!" 라고 외치는 모습이 어찌나 당돌하던지요. 충만한 감정 몰입은 물론이거니와 표정이며 눈빛이며 발음과 발성에 이르기까지, 천보근의 연기는 웬만한 성인배우들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완벽한 경지였습니다.
"너도 알잖아. 너네 엄마가 너 사랑하는 거... 100점 만점 김서현이 나 같은 꼴찌 오동구도 아는 걸 모를 리가 없잖아... 그래. 나 너네 엄마 좋다. 너네 엄마가 끓여준 찌개도 너무 맛있고, 나 보고 웃어주면 좋아 죽겠고, 오동구 하고 부르는 너네 엄마 목소리도 너무 좋아... 근데 우리 엄마 아니고 너네 엄마잖아. 그래서, 그래서 난 네가 너무 부럽다구. 너는 미워할 수 있는 엄마라도 있잖아. 근데 난 미워하고 싶어도 솔직히 엄마 얼굴도 기억이 안 나. 목소리도 기억 안 나. 우리 엄마가 날 기억하는지 어떤지도 모른다구... 그래도, 그래도 나한텐 오여사가 있어. 너네 엄마가 아무리 좋아도 나한텐 오여사 다음이야. 누가 뭐래도 오여사는 나의 오여사니까. 근데 넌 뭐야? 엄마가 좀 마음에 안 들어도 너네 엄마잖아. 좋은 엄마든 나쁜 엄마든 너네 엄마잖아, 이 멍청아!"
대사가 너무 길어서 제가 중간 중간에 생략을 했는데도 이 정도입니다. 그냥 국어책 읽듯 외우기만도 벅찼을 분량이죠. 그런데 만 10세 가량의 아역 배우 천보근은 머뭇거림 하나 없이, 저 기나긴 대사에 감정을 이입하여 일사천리로 소화해냈습니다. 화를 내야 할 부분에서는 화를 냈고, 설움에 북받쳐 울어야 할 부분에서는 아낌없이 눈물을 흘렸으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절제해야 할 부분에서는 숨을 고르며 이를 악물었습니다. 발음은 또 어찌나 좋은지 한 마디도 뭉개거나 어물어물하는 법이 없는데, 그렇다고 어색할 만큼 또박또박 힘주는 건 아니었습니다. 마치 오동구라는 캐릭터에 빙의라도 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연기였어요. 이 소년은 필시 한석규나 최민식이나 송강호 같은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겠군요.
그 나이에는 아직 몰라도 될 세상의 어둠이나 힘든 일들을 너무 일찍 체험하게 되는지라, 개인적으로는 아역 배우들을 안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아역 출신으로 지금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연기자 이민우는 토크쇼에서 말하길, 어렸을 때 물론 선배님들이 아주 잘해주셨지만 그 중에는 욕설을 하거나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등 안 좋은 행동을 보이는 분들도 계셨다고 하더군요. 지금은 30대 후반으로 수많은 후배들을 거느린 선배 연기자가 되었지만, 이민우는 어린 시절의 경험을 교훈삼아 되도록 후배들에게 말을 놓지 않고 최대한 예의를 갖춘다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설령 험한 꼴을 겪지는 않는다 해도, 연기 자체가 어디 쉬운 일이겠습니까? 웃고 울고 뒹굴고 대사 외우고... 신체적 정신적으로 엄청난 노동에 해당하는 것인데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면 안타깝지만, 이렇듯 훌륭한 재능을 타고난 아역 연기자를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오릅니다. 천보근, 저는 앞으로 그 이름을 기억하며 꾸준히 응원하고 싶군요. 부디 멋진 배우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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