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여왕의 교실' 몹시도 불편했던 용서의 강요 본문
당신은 '여왕의 교실' 8회를 보고 감동을 받았나요? 도둑질과 몰카와 왕따 사건의 주동자였던 고나리(이영유)가 반 친구들과 화해하고 제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며 가슴이 따뜻해졌나요? 친구의 잘못을 쿨하게 용서하고 다시 받아주는 아이들의 순수하고 따뜻한 동심을 보며, 그래도 이 세상이 아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에 흐뭇해졌나요? 그런가요, 그게 맞는 건가요?
저는 그 장면들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너무 불편하다 못해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토록 괴롭힘을 당했으면서도 나리를 용서해 주자고 앞장서서 반 아이들을 설득한 심하나(김향기)는 물론 착한 아이였죠. 하지만 저는 심하나의 착한 행동이 (이번 경우에는) 기특하기보다 오히려 짜증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제가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여왕의 교실'에서 표현하는 아이들의 사회가 어른 사회의 축소판이기 때문입니다. 잘못한 어린애를 끝까지 벌주어야 한다든가 쉽게 용서하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모진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보면 볼수록 화가 났습니다. 그 동안 고나리의 못된 행동 때문에 심하나가 겪어야 했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죠. 나리는 자기 잘못을 덮어 주려던 하나의 호의를 이용해 지갑 도둑의 누명을 씌웠고, 진실이 드러날까봐 점점 더 하나를 괴롭히며 왕따로 만들었습니다. 나리의 속임수에 넘어간 아이들은 걸핏하면 심하나의 사물함에 쓰레기를 가득 채웠고, 책상을 외딴 창고로 치워놓은 후 찾으러 온 하나에게 물벼락을 끼얹기도 했습니다. 수영장에서 고나리는 심하나의 휴대폰을 훔쳐 황수진(변승미)이 샤워하는 모습을 찍은 후 하나에게 몰카 누명까지 덮어 씌웠고, 분노한 황수진과 그 패거리는 심하나를 텅 빈 수영장의 캐비넷에 가두고는 하나의 옷까지 풀장에 던져버렸습니다. 이렇게 고나리가 주도한 왕따는 꽤 오랜 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아이들이 심하나를 괴롭히는 갖가지 수법은 점점 더 잔혹해졌죠.
고나리의 만행은 어처구니 없는 사건으로 만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라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요. 빈 교실이나 한적한 공원 등의 외딴 장소도 아니고 사방이 트인 복도 한가운데에서, 고나리는 심하나에게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며 자기가 저질렀던 일들을 모두 제 입으로 실토하고 말았네요. "억울하냐? 억울하면 가서 일러! 지갑 도둑은 사실 고나리다, 몰카도 고나리가 찍은 거다, 하고 일러바치란 말야!" 그런데 마침 그 복도 위의 계단에는 6학년 3반 아이들이 모두 옹기종기 모여서 그 대화를 듣고 있었지 뭡니까?
순식간에 고나리는 공공의 적이 되었고, 속임수에 넘어갔던 아이들은 모두 배신감에 치를 떨며 고나리를 손가락질했습니다. 당연한 결과였죠. 그런데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하고 이성을 잃은 고나리는 한밤중에 교실에 들어가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지르려다 발각되자 만류하는 교사 마여진(고현정)에게 커터칼을 휘둘렀고, 그 칼을 붙잡은 마여진은 손에 큰 부상을 입게 됩니다. 방화 미수와 교사 상해... 아무리 어린 나이지만 고나리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을 만큼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고 말았네요. 나리 엄마(변정수)는 아프지도 않은 나리를 급히 병원에 입원시키고 외국으로 유학 보낼 준비를 시작합니다.
유학을 보내기 전, 나리의 스펙에 조그만 오점이라도 남기고 싶지 않았던 나리 엄마는 변호사까지 대동하고 학교에 찾아와 협상을 하는데 피해 당사자 마여진은, 자신에게 입힌 상해에 대해서는 고발하지 않겠으나 지갑 도난 사건과 왕따 주동 사건에 대해서는 고나리의 생활기록부에 그대로 기재하겠다 선언하는군요. 흥분하는 나리 엄마에게 교장(윤여정)은, 아이의 충격받은 마음을 다독여 주는 것이 유학이나 생활기록부 문제보다 우선이라며, 엄마로서 더 중요한 역할부터 하라고 돌려 보냅니다. 그건 맞는 말이었습니다. 엄마로서 자식을, 어른으로서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은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였죠.
하지만 고나리가 입원한 병실까지 찾아가 위로하는 심하나의 모습을 보는 순간, 제 마음은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심하나는 어른이 아니라 고나리와 똑같은 어린아이고, 나리의 악행으로 피해를 입은 당사자였습니다. 사과를 하거나 위로를 해야 하는 입장은 분명 고나리였는데, 심하나가 먼저 찾아가서 손을 내미는 모양새가 저는 불편했어요. 고나리는 제 발등을 찍어서 잘못이 탄로난 것뿐인데, 자기가 당한 일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데, 심하나는 오히려 고나리가 불쌍하다며 매일같이 걱정을 했습니다. 그렇게 혼자만 착하면, 다른 아이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곳곳의 교실에서는 왕따가 일어나고 있으며 그 피해자가 있겠죠. 짐작컨대 왕따 피해자의 99%는 심각한 내면적 상처와 피해의식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며, 자기를 왕따시킨 주동자에게는 죽을 때까지 용서하고 싶지 않을 만큼 깊은 분노를 느끼고 있을 겁니다. 제가 보기엔 그게 정상적이고 평범한 반응이에요. 심하나의 반응은 굉장히 특이한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심하나가 잘못한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하는 모습이 방송을 탔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죠. 비록 드라마에 불과하지만, 심하나는 고나리가 제대로 뉘우치기도 전에, 사과도 하기 전에, 아무런 불이익도 받기 전에, 아무 조건 없이 미리 용서했습니다. 이건 뭐 공자나 맹자가 살아 돌아온다 해도 쉽지 않을 정도의 성현같은 행동인데요, 자기는 그토록 심한 고통을 받았으면서, 상대가 고통받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말입니다. 이런 모습을 한껏 아름다운 감동으로 포장해서 보여주면 그 방송을 시청하는 아이들은, 특히 왕따 피해자가 되어 본 적 있거나 현재 왕따를 당하고 있는 아이들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무조건 용서하기를 강요받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겠어요? 이건... 명백한 또 하나의 폭력입니다.
유학을 떠나기 전, 사물함을 정리한다는 핑계로 교실에 들른 고나리는 반 아이들에게 한꺼번에 "미안해" 라고 사과를 합니다. 물론 사과를 안 한 것보다야 낫지만, 그 한 마디로 지난 시간의 모든 상처를 씻어내기엔 악행의 정도가 너무 심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말이죠. 그 사과를 마지막으로 고나리는 유학을 떠났어야 합니다. 낯선 곳에 가서 지독한 외로움도 겪어 보고, 치사스런 인종 차별도 좀 겪어 보고, 그렇게 직접 체험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진짜로 깨닫기 힘들거든요. 고나리는 타고난 성격에 엄마의 잘못된 교육과 부유한 집안의 배경까지 삼박자가 골고루 갖춰진 상황이라, 일시적으로 뉘우쳤다가도 금방 원래대로 돌아오기 십상입니다.
그런데 "얘들아, 나리... 그냥 이렇게 보낼거야?" 라는 심하나의 제안에 따라 반 아이들은 고나리를 붙잡기로 하고 동영상을 찍어 보냅니다. 지난 일은 싹 잊어줄 테니까 다시 오라고, 잘해줄 테니까 그냥 오라고, 아까 사과한 거 멋있었다고, 너는 평생 친구니까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온갖 닭살스런 멘트가 담겨 있는 친구들의 동영상을 보며 고나리는 펑펑 울음을 터뜨렸죠. 유학을 가지 않기로 한 나리는 엄마의 차를 타고 산들초등학교로 돌아오는데, 혹시라도 나리가 뻘쭘할까봐 그랬는지 6학년 3반 아이들은 모두 운동장까지 마중을 나와서 환영하며 끌어안고 생난리를 치는군요. 참 내..;;
고나리의 속임수에 넘어가 심하나를 괴롭혔던 그 아이들은, 진심을 담아 하나에게 사과 한 마디씩이라도 했던가요? 곁에 있는 피해자는 본체만체하면서 오히려 돌아온 가해자에게는 폭죽을 터뜨리며 환영식까지 해주는 그 모습이 보기 좋던가요? 듣자 하니 성폭력 가해자가 법정에서 선고받는 징역 형량은 평균 7년 정도라고 하더군요. 물론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피해자의 인생에 아로새겨진 엄청난 상처에 비해 가해자 처벌이 지나치게 가볍다는 것은 성폭력 관련 뉴스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입니다. 반드시 성폭력 사건이 아니더라도 가해자에겐 솜방망이 처벌을 하면서 오히려 피해자에게 책임을 묻거나 용서를 강요하는 것은 그리 드문 경우가 아니죠. 어른 사회의 축소판인 '여왕의 교실' 속 아이들의 사회에서조차 그런 모습을 보게 되니, 감동은 커녕 울화통이 치밀어 견디기 어려웠답니다.
'용서'란 참으로 풀기 어려운 화두입니다. 이정향 감독의 영화 '오늘'에서 여주인공 송혜교는 '잘못된 용서'의 굴레에 갇혀 이중삼중의 엄청난 고통을 겪게 됩니다. 목숨처럼 사랑한 약혼자를 오토바이 뺑소니 사고로 잃은 다혜(송혜교)는 가해자가 아직 미성년자라는 사실을 알고 일부러 탄원서까지 써 주면서 그 아이를 용서해 주었죠. 죽은 약혼자의 가족들은 그런 다혜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했지만, 다혜는 자신의 용서로 인해 무사히 풀려난 그 아이가 착하게 살고 있을거라 믿으며 마음의 평온을 얻었죠. 하지만 그 믿음은 무참히도 산산조각나고 말았습니다. 지독한 문제아였던 그 소년은 잘못을 뉘우치기는 커녕 점점 더 심한 비행을 저지르더니, 급기야 같은 학급의 친구를 찔러 죽이고 살인자가 되었던 겁니다.
사람을 치어 죽이고 도망쳤으면서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고 풀려났으니, 그 아이가 무엇을 진심으로 깨닫고 뉘우쳤겠습니까? 다혜는 오직 선의로 베풀어준 용서였지만, 그 결과는 참혹했습니다. 찔려 죽은 피해자 학생은 달동네 판자집에서 병든 아버지와 단 둘이 살던 소년이었습니다. 어려운 형편에서도 열심히 공부하여 수석을 놓치지 않던 모범생이었고, 나중에 성공해서 아버지 병도 고쳐 드리고 편안히 모시겠다며 꿈을 키우던 효자였습니다. 그런 아이가 별 이유도 없이 동급생에게 찔려 죽고 말았던 거죠. 피해자 소년의 집을 방문한 다혜는, 돌아오지 못할 아들을 기다리며 혼자 누워 앓고 있는 아버지를 보게 되고, 이 모든 비극을 불러온 사람이 자기라는 생각에 절규합니다. 자기가 너무 쉽게 용서했기 때문에 이 착한 소년이 죽었고, 단순 뺑소니범에서 그칠 수도 있었던 그 아이는 이제 오갈 데 없는 살인자가 되었으니까요.
용서의 결과는 언제나 아름다울까요? 피해자 본인이 자발적으로 용서했으면 아무 문제 없을까요? 이 경우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욱이 피해자의 마음은 아직 상처로 꽁꽁 싸매어져 있는데, 남들이 나서서 용서하라고 강요하는 식의 상황은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에요. 물론 심하나는 피해 당사자로서 기꺼이 용서한 것이지만, 드라마를 보는 사람들의 입장은 또 다르죠. 시청자들 중 과거 또는 현재에 왕따를 경험했던 사람들이 있다면, 억지 감동을 자아내려던 그 장면들은 자기에게 막무가내로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이 몹시 불편했는데, 당신은 어떠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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