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여왕의 교실' 한국의 교육 현실에 맞는 작품일까? 본문
드라마 '여왕의 교실'에 등장하는 아이들을 보면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배우들 각각의 연기도 물론 훌륭하지만, 수많은 아역 캐릭터를 이토록 개성적이며 섬세하게 그려놓은 드라마는 이제껏 본 적이 없었어요. 언제나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재로서 어려움에 처한 친구를 보면 용감히 나서서 편을 들어 줄 줄도 아는 완벽한 김서현(김새론), 비록 공부는 꼴찌이지만 할아버지와 단 둘이 살면서도 항상 밝고 의리있는 오동구(천보근), 소심한 성격으로 학창시절 내내 은따(은근한 따돌림)를 당하며 존재감 없이 살아가는 은보미(서신애), 부잣집 외동딸의 화려함으로 주변을 사로잡는 고나리(이영유), 그리고 왕따를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력과 긍정적 마인드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심하나(김향기)까지,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는 눈을 감아도 특징이 생생하게 떠오를 만큼 입체적으로 잘 그려졌군요. 약간 과장된 부분은 있지만, 과거 학창시절을 떠올려 보면 꼭 한두 명씩은 그와 비슷한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역들의 연기가 아무리 맛깔스러워도 작품의 중심축은 명백히 마녀교사 마여진(고현정)이므로, 저는 드라마를 보는 내내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자는 것일까? 저는 마여진 특유의 교육 방침에 처음부터 동의할 수 없었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건 아니라는 생각만 더해갈 뿐이었거든요. 극 중 아이들은 마여진의 손아귀에서 점점 더 불행해져 가고 있습니다. 공부도 잘 하고 인품도 훌륭하지만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서현이는 생전 처음으로 꼴찌반장의 수모를 겪어야 했으며, 부모에게 버림받아 외할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는 오동구는 반 아이들 전체 앞에서 숨기고 싶은 가정사가 밝혀지는 고통을 겪어야 했죠.
공주병 기질은 좀 있지만 나름 괜찮은 아이였던 고나리는 장난삼아 친구 황수진(변승미)의 지갑을 잠시 훔쳤다가 돌려놓으려 했는데 (부잣집 딸인 고나리가 정말 지갑이 탐나서 훔쳤던 것 같지는 않으므로 그 부분에서는 본인의 말을 신뢰할 수 있음) 마여진이 지나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기회를 놓쳤고, 결과적으로 착한 심하나를 배신하며 왕따시키는 못된 아이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저 조용한 아이였던 은보미는 마여진의 꼬임에 넘어가 선생의 앞잡이가 되었다가, 나중엔 고나리 일파의 앞잡이가 되어 심하나를 괴롭히는데 동참했지만 결국은 가장 큰 상처를 입고 말았죠. 지금의 기억은 아마도 보미의 평생동안 상처와 자괴감으로 남지 않을까 싶은데요. 마여진은 고나리와 은보미의 잠재의식 속에 숨겨진 악하고 비열한 부분을 표면으로 끌어올린 셈인데, 이게 대체 무슨 교육 방식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천사같은 심하나의 존재가 없었다면 이 아이들에게 희망은 없었을 거예요. 김서현이야 워낙 잘난 아이라서 큰 피해를 보는 일이 없겠지만, 다른 아이들의 경우는 문제가 다르죠. 심하나가 몇 차례나 찾아와서 용기를 주지 않았다면 오동구는 마여진이 미리 준 가짜(?) 졸업장만 끌어안고 초등학교 중퇴 학력의 어른이 되어버릴 수도 있었고, 은보미는 배신을 당하고도 꿋꿋이 잘해주던 심하나의 마음에 감동하지 않았다면 얼마 후 꼭두각시가 되어 이리저리 휘둘리는 자신의 모습을 비관하여 자살해 버렸을지도 모릅니다. (보미의 소심한 성격이라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에요) 지금 한창 못된 짓에 재미들린 고나리도 나중엔 어차피 심하나의 인내심과 긍정적인 성품에 감화되어 잘못을 뉘우치고 변화되겠죠. 그래서 결국은 6학년 3반의 모든 아이들이 심하나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마녀를 상대하게 되겠죠. 그건 정해진 수순일 겁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과연 심하나처럼 밝고 용감하고 긍정적이고 강한 아이가 존재하겠는가의 문제가 남습니다. 심하나는 그야말로 공기정화식물 같은 존재라고나 할까요? 그 아이의 존재 하나만으로 산들 초등학교 6학년 3반이라는 작은 세상의 모든 악은 소멸되어 버릴 듯한 기세입니다. 못된 아이는 뉘우쳐 착한 아이가 되고, 의기소침했던 아이는 용기를 얻어 밝은 아이가 됩니다. 담임선생 마여진이라는 거대한 벽을 향해 똘똘 뭉쳐 돌진할 만큼 협동심과 단합심도 기르게 되고, 서로를 위할 줄 아는 배려심도 기르게 됩니다. 하지만 심하나가 없으면?? 이 모든 긍정적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이에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마여진의 교육 방식은 틀렸다고 확신합니다.
심하나 같은 아이는 솔직히 있을 것 같지도 않고, 있더라도 천 명 중 한 명이나 될까 말까입니다. 극심한 따돌림을 당하면 누구나 의기소침해지면서 비뚤어지거나 망가져 버리는 게 훨씬 자연스런 일이죠. 심하나처럼 물벼락을 뒤집어쓸 것에 대비하여 비옷을 입고 교실에 들어서면서도 해맑게 웃으며 인사하고, 사물함에 가득찬 쓰레기를 치우면서도 뭐 신난다고 엉덩이춤을 추고, 자기를 속이고 누명을 씌우고 텅 빈 수영장의 캐비넷에 가두고 말을 걸어봤자 대답도 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꿋꿋한 선의로 다가서려 노력하는... 고작 만 10세 정도의 어린 나이에 그렇게까지 강한 정신력을 지닌 아이가 흔하겠어요? 스무 남짓한 반 아이들 중에 심하나 같은 아이가 대충 한 명쯤은 있겠지 생각하고 마여진처럼 교육한다면, 글쎄 뒷일은 아무도 책임질 수 없을 겁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원작인 일드가 선풍적 인기를 끌게 된 배경에는 일본 특유의 교육 현실이 크게 작용했더군요. 평소 그 쪽 분야에 큰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라서 최근에야 알게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2002년부터 '유토리 교육'이라는 특수한 교육 방침이 공교육에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대략 5년간 실시되었더랍니다. 유토리 교육이란 여유있는, 비경쟁적인, 평등한 교육으로서 과도한 주입식 교육을 지양하고 창의성과 자율성 존중을 표방하며, 사고력과 표현력, 남을 위한 배려 등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덕목을 육성하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는 것이었죠. 학교 수업 시간을 줄이고 기타 체험적 학습 시간을 늘리는 방식으로 진행되었으나, 기초 학력 저하 현상 등 부작용이 극대화됨으로써 2007년 실패를 인정하고 다시 학력 강화 교육 방침으로 선회했다고 합니다. 자율성을 지나치게 강조한 나머지 교사가 적극적으로 학생들을 지도할 수 없었고, 학생들의 학습 의욕에도 개인차가 심화되는 등 그 폐해가 만만치 않았다죠.
아마미 유키 주연의 일본 드라마 '여왕의 교실'은 2005년 7월부터 9월까지 NTV에서 방송되었습니다. 유토리 교육이 실시된지 3년째 되는 해였군요. 그 무렵이면 일선 교사와 학생 및 학부모들은 대부분 유토리 교육의 폐해를 슬슬 깨닫고 있을만한 시점이죠. 유토리 교육에 대해 비판적 시각을 지닌 사람들은, 그 교육을 받은 세대가 매우 나약하고 책임감과 인내심이 부족하며 자기 개성만 존중하는 특성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원래는 평등 교육과 인성 교육을 지향해서 만들어진 방침이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기 편한 대로만 살아가려는 무책임한 인간들을 길러내게 되었다는 거죠. 그런 시각으로 보면 심하나의 캐릭터도 결코 바람직한 인간형이 아닙니다. 심지어는 지나치게 비현실적이고 이상만 꿈꾸는 오지랖?? 그렇게까지 표현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유토리 교육 실패의 반작용으로 일본에서는 과도한 감성주의를 배제하고, 평등이나 인성보다 능력 위주의 경쟁이 강조되던 보수적 가치의 교육 개념이 다시 화두로 떠올랐습니다. 언뜻 비인간적인 듯 보이지만, 참다운 인성 교육을 위해서는 오히려 보수적 방법이 효과적이라는 의견들이 힘을 얻기 시작했다죠. 일드 '여왕의 교실'이 어떤 배경에서 탄생했는지, 왜 그토록 인기를 끌었는지를 이제는 명확하게 알 수 있지 않나요? 그런데 이와 같은 일본의 특수 현실을 한국의 상황에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우리나라에서는 유토리 교육은 커녕 그와 비슷한 것도 실시된 적이 없습니다. 과도한 입시 경쟁과 성적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학창시절을 보냈던 현재의 학부모들은 과거의 자기 자신과 똑같은 입장에 처한 아이들을 보면서, 과거의 자기 부모님과 똑같은 태도로 공부하라 다그치고 있습니다. 사회 분위기가 워낙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에요. 개인적으로 아무리 남다른 교육 방침을 가져봤자, 타인들과 어울려 사는 세상 속에서 자기 아이만 뒤처지는 느낌을 받으면 누구라도 모른체 하긴 힘든 법이니 말입니다. 지금도 한국 아이들은 정규 수업 외에 각종 학원, 과외, 자율학습 등으로 꼼짝없이 공부에 매여 살고 있는데, 굳이 드라마에서까지 더 가혹한 채찍을 휘두를 필요가 있을까요?
너무 느슨해진 기강을 바로잡을 필요가 있던 일본에서는 '여왕의 교실'이라는 드라마가 매우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을 겁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일단 바꾸어 보니까 예전의 방식이 낫다는 것을 깨닫게 된 시점에, 무수히 비판해 오던 보수적 교육 방침의 좋은 점을 일깨우는 작품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한국으로 오면 상황이 달라집니다. 계속 했던 이야기를 또 하는 셈이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이야기를 또 듣는 셈이거든요. 학교에서도 공부해라, 집에서도 공부해라, 학원에서도 공부해라... 그런 와중에 드라마에서 또 공부해라 하면 식상함 그 자체일 뿐 일말의 신선함이 있겠어요? 마여진은 성적 위주의 교육뿐만 아니라 강하게 키운다는 미명하에 아이들을 상대로 온갖 가혹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인데, 한 번도 느슨하거나 너그러워 본 적이 없었던 한국의 교육 현실에는 실로 걸맞지 않는 방식이라 하겠습니다.
현재 공중파 수목드라마 3파전에서 '여왕의 교실'은 8.2%의 시청률로 꼴찌를 달리는 중이군요. ('너의 목소리가 들려' 16.4%, '천명' 9.6%) 이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은 경쟁작인 '너목들'이 예상 외의 재미로 시청자를 사로잡은 영향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인 원인을 찾는다면 '여왕의 교실'이라는 작품 자체가 한국의 현실과 맞지 않는데서 비롯된 공감의 부재라고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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