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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현정의 '고쇼', 솔직함과 천박함의 경계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고현정의 '고쇼', 솔직함과 천박함의 경계에서 무엇을 선택했는가?

빛무리~ 2012. 4. 8.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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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고쇼는 우아하고 품위있는 고품격 토크쇼가 되겠습니다...

 근데 이러면... 너무 재미없지 않겠어요, 여러분?"

 

자신의 이름을 걸고 런칭되는 토크쇼 '고쇼'의 첫방송에서 여배우 고현정은 "대놓고 최선을 다해 천박해질 것"을 선언했습니다. 우아하고 품위있게 하면 재미없으니까, 할 수 있는 만큼 천박하고 품위없게 만듦으로써 재미를 추구하겠다는 선포였죠. 저는 다른 일을 하느라고 처음부터 시청하지 못했는데, 보는 동안 내내 "어쩌면 토크쇼가 이렇게까지 천박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고현정이 처음 무대에 나와서 했던 인삿말을 나중에 듣는 순간 모든 의문이 풀리더군요. 

 

천박함을 위한 노력, 그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데뷔 시절부터 지금까지 '올곧음'과 '품위'의 상징처럼 느껴졌던 조인성마저, '고쇼'의 게스트로 앉아 있는 동안은 마치 다른 사람 같았던 겁니다. 먹물통에 들어가면 모두 다 새카매지는 것처럼, 모든 사람의 내면에 많든 적든 조금씩은 숨겨져 있는 천박함을 최대한 끌어내서, 가능한 한 천박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고쇼'의 특징인 듯합니다.

 

여배우가 MC로 나섰던 토크쇼가 오래 전에도 있었지요. '이승연의 세이 세이 세이'와 '김혜수 플러스유' 였는데, 저는 그 두 개의 프로그램을 매우 좋아했습니다.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보았던 예쁜 여배우들이 생각지 못한 입담과 예능감을 드러내면서, 약간은 어색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풋풋하고 리얼하게, 제법 그럴싸하게 토크쇼를 진행해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했어요.

 

이렇게 여배우가 진행하는 토크쇼에 좋은 기억을 갖고 있지만, 고현정의 '고쇼'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물'로 연기대상을 받던 그 날의 기상천외한 수상소감과 그 이후 일어난 파문에 대처하는 방식 등을 지켜보면서, 고현정이라는 인물은 저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새로 시작하는 프로그램에 대한 호기심으로 일단 첫방송을 시청했는데, 과연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군요.

일단 토크쇼 메인 MC로서 고현정의 자질은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보조 MC 윤종신과 정형돈의 틈바구니에서 고현정은 그저 게스트 중 한 명처럼 보일 뿐이었죠. 남자들로 가득한 스튜디오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고현정은 등장하면서부터 마치 패션쇼라도 하는 것처럼 화려한 의상을 수차례나 갈아입었고, 시종일관 '여자' 냄새를 풍기면서 '여자'임을 티냈습니다. 토크쇼의 MC가 남자인지 여자인지가 그렇게 중요한가요? 굳이 여성성을 감추려고 노력할 필요까지는 없다 해도, 이건 너무나 민망한 수준이었습니다.

 

여자 MC가 남자 게스트에게, 그것도 이혼녀이며 두 아이의 엄마인 여자 MC가 막내동생뻘인 총각 게스트들에게 시종일관 유혹하는 듯한 눈빛과 말을 건네고, 보조 MC들은 고현정에게 두 남자 중 누가 더 이상형에 가까운지를 묻고... 도대체 이게 무슨 토크쇼인가요? 고현정이 '선덕여왕'의 '미실'로 열연할 당시, 색기가 철철 넘쳐흐르던 그 모습은 훌륭한 연기라고만 생각했었지요. 그런데 토크쇼의 MC로서 게스트와 패널들을 이끌며 중심을 잡아야 할 위치에서, 다시 '미실'에 빙의한 것처럼 색기를 드러내는 모습은 참으로 당혹스러웠습니다.

 

무엇보다 방송의 컨셉 자체가 그러했습니다. '나쁜 남자'를 캐스팅하는 오디션이랍시고, 출연자들에게서 가장 나쁜 부분만을 쏙쏙 뽑아내며, 더욱 나쁜 모습이 보일 때마다 열광하며 박수를 쳐대니, 남성 게스트들은 행여 질세라 자신들의 '나쁜 행각'을 자랑스레 늘어놓았습니다. 길(길성준)은 낚시에 심취한 나머지 여자친구를 이틀 동안이나 차에 방치해 두었고, 천정명은 여자친구가 빗속에서 울고 있는데 자기는 젖기 싫어서 한참을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하더군요. 특히 여자친구가 힘들어할 때면 절대 위로를 하지 않고 대신 충고를 해준다는 조인성의 이야기는 정말 실망스러웠습니다.

'선위로 후분석'이 어떻겠느냐고 정형돈이 좋은 의견을 제시했지만, 조인성은 꿋꿋이 "내 스타일"이라고 말하면서 전혀 고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하더군요. 그러나 훈계를 줄줄이 늘어놓는 것은 개나소나 할 수 있는 쉬운 일이고, 진심어린 위로야말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해줄 수 있는 힘든 일입니다. 참을성 있게 상대의 말을 들어주고, 어렵더라도 애써 이해하며 위로해 주는 것은 사랑하는 마음이 없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죠. 본인의 스타일이랍시고 위로를 거부하는 태도는 그저 쉬운 사랑만 하겠다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긴 조인성쯤 되면 아쉬울 게 없으니, 굳이 어려움을 참고 노력해 가면서 여자를 만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군요.

 

이것이 솔직하고 화끈하고 속시원한 토크일까요? 저는 조금도 그렇게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 생각에 정말 '솔직하고 화끈하고 속시원한' 토크쇼는 최전성기의 '무릎팍 도사'였죠. '무릎팍 도사'의 게스트들은 핵심을 콕콕 짚어주는 MC 강호동의 푸쉬를 받아 진짜 솔직한 이야기를 풀어냈고, 자신이 지닌 모습들 중 최대한 좋은 모습을 끌어내어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릎팍 도사' 출연 이후에는 비호감에서 호감으로 돌아선 연예인이 무척 많았지요. 하지만 '고쇼'는 게스트로부터 하필 가장 안 좋은 모습만을 이끌어내니, 줄곧 호감이었던 사람마저 급격히 비호감으로 만듭니다.

 

저는 '고쇼'의 첫방송을 보고 나서 갑자기 '김승우의 승승장구'가 그리워졌습니다. 메인 MC 김승우의 약간 어눌하면서도 점잖은 카리스마가 이수근, 탁재훈, 이기광의 통통 튀는 기질들을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진행되는 '승승장구'가 얼마나 우아하고 품위있는 토크쇼인지를 새삼 절실히 깨달은 거죠. 우아하고 품위있는 토크쇼는 재미가 없나요? 그것은 고현정과 '고쇼' 제작진의 착각일 뿐입니다. 저를 비롯해서 '승승장구'의 잔잔한 재미를 만끽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하지만 역시 사람마다 생각과 느낌은 다른 법이니, 솔직함을 핑계로 천박함을 추구하는 것이 이 시대의 진정한 대세라면 '고쇼'는 성공을 거두게 되겠죠. 사람이란 그 추구하는 바에 따라서 지킬박사가 되기도 되고 하이드가 되기도 하는 법인데, 선량하고 우아한 것은 재미없다고 비하하며, 솔직함이라는 미명하에 천박함과 나쁜 기질을 동경하는 이 사회의 분위기는 그저 씁쓸할 뿐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 순간도 조금씩 하이드가 되어가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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