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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3' 초라한 안내상도 누군가에겐 빛이었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하이킥3-짧은다리의역습

'하이킥3' 초라한 안내상도 누군가에겐 빛이었다

빛무리~ 2011. 12. 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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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지금까지 제 눈에는 단 한 번도 곱게 보인 적 없던 인물이 안내상입니다. 그는 힘을 잃고 움츠러든 이 시대의 중년 남성들과 초라한 가장들을 대변하는 캐릭터라고 할 수 있지만, 제 마음속에는 별다른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못했습니다. 무려 30회를 넘기도록 뻔뻔스런 민폐와 진상 행각을 해대던 모습도 밉상이었지만, 최근 들어 미친 게 아닐까 싶을 만큼 급격히 변화한 모습도 그저 부자연스럽기만 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안내상이 마라톤 경기에 참가했던 회차의 방송을 보며 새삼 가족의 소중함과 아버지에 대한 연민을 느끼고 눈물까지 흘렸다는데, 저는 오히려 너무 전형적인 방법으로 억지 감동을 짜내려는 듯한 구성에 실망만 느껴졌습니다. 이건 정말 김병욱 PD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던 제가 드디어 처음으로 안내상 캐릭터에 일종의 공감과 호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에피소드가 48회에서 방송되었습니다. 뭘 알고 의도적으로 행동한 것은 아니지만, 안내상은 외로운 한 소녀의 마음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을 만큼 강하고 따스한 위로를 전해 주었던 것입니다. 배려심 깊고 잘생긴 총각 의사 윤계상도 절대 채워줄 수 없었던 그 마음 한 구석의 쓸쓸한 빈 자리를 오직 안내상만이 채워줄 수 있었습니다.

기면증이 악화되어 가는 김지원을 우려한 가족들은 그녀의 스쿠터 키를 압수하기로 결정합니다. 고집센 소녀 김지원으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모든 어른들이 만장일치로 의견을 모았을 뿐 아니라 자기를 진심으로 염려해 주는 윤계상의 단호한 설득에 더 이상 불평하지 못합니다. 그 스쿠터 키를 맡아 보관할 인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안내상이었습니다. 최근 택배 일을 시작한 안내상이 유용하게 빌려쓰면서 김지원의 통학도 시켜주는 것이 좋겠다는 윤유선의 제안에 모두가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됐어요, 아저씨. 저는 그냥 버스타고 갈게요.." 김지원은 강한 캐릭터답게 신세지고 싶지 않다는 듯 사양했지만, 안내상은 "그건 안되지, 약속한 일인데!" 하면서 아침 저녁으로 그녀의 통학을 책임지기 시작합니다. 예전의 뺀질거리던 민폐 성격은 대체 어디다 버렸을까요? 안내상은 바쁘게 일하는 와중에도 하교 시간만 되면 성실하게 꼬박꼬박 학교 앞까지 찾아와 김지원을 기다렸다가 그녀를 집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자기 딸 수정이(크리스탈)와 동갑인 김지원을 스쿠터 뒷좌석에 태우고 다니며 안내상은 심심해서 그랬는지 목청 높여 이런저런 말들을 건넵니다. 나름 유익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들이라고 그는 주장했지만, 사실상 별로 유익하지도 재미있지도 않은 내용이었습니다. 게다가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정직이라면서, 거짓말을 일삼다가 스스로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의 우화까지 들려주었던 안내상이, 고작 어묵꼬치 한 개 값을 아끼기 위해 얄팍한 속임수를 쓰는 모습에서는 예전의 뻔뻔한 캐릭터가 약간 남아 있음이 보였습니다. 아직도 그의 변화된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 저로서는 그 익숙한 모습이 약간 반갑기까지 했다지요.

그런데 어른 뺨치게 똑똑하고 사리분별력이 뛰어난 소녀 김지원은, 매번 앞뒤가 맞지 않는 안내상의 어처구니 없는 말과 행동들이 싫지가 않습니다. 꼿꼿한 성격대로라면 언행불일치의 표상과도 같은 안내상의 태도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이 정상이련만, 오히려 김지원은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을 뿐입니다. 안내상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온통 논리에도 맞지 않고 별로 웃기지도 않는 것들이었지만, 소녀는 그 이야기를 듣고 싶어서 매일 등하교 시간을 기다리게 되고 말았습니다. "아저씨. 재미있는 이야기 또 해주세요!"

김지원이 아직도 최신형 휴대폰을 구입하지 않고 거의 다 망가진 구형 휴대폰을 사용하는 이유는 죽은 아빠의 유품이기 때문입니다. 그 휴대폰을 수정이가 잠깐 구경하다가 떨어뜨렸을 때는 차분한 성격에 어울리지 않게 파르르 떨며 화를 내기도 했고, 통신사에서 구형 휴대폰 서비스를 중단한다고 했을 때는 거리에서 사람을 모아 반대시위까지 벌였습니다. 언젠가 김지원과 안수정, 두 소녀가 서로를 바라보며 자기에게 결핍된 부분을 상대방이 갖고 있음에 부러워하는 에피소드가 있었지요? 철부지 안수정은 부모님의 유산을 일찍 물려받은 김지원의 부유함을 부러워했지만, 그 때도 김지원이 간절히 부러워한 것은 오직 아빠의 존재였습니다.

수정이 아빠 안내상은 그 당시 도피자 신세라서 취직도 못하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중이었지요. 하루종일 집에서 심심해하던 그는 저녁 때 가족들이 돌아오면 한 사람씩 붙잡고 놀아달라 애원하지만, 피로한 일상에 지친 가족들은 모두 그를 귀찮아하고 외면합니다. 하지만 김지원은 딸 수정이와 장난치는 안내상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내가 학교를 마치고 돌아오기만을 하루종일 기다려주는 그런 아빠가 있다면, 나는 얼른 집에 가서 아빠와 놀고 싶은 생각에 공부도 손에 잡히지 않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아이들처럼 마룻바닥을 뒹굴며 아빠 안내상과 노는 상상을 하며 김지원은 중얼거렸습니다. "난 아빠랑 노는 게 세상에서 제일 좋아!"

지원이의 소망은 이제껏 손에 닿을 수 없는 별처럼 불가능한 일로 여겨졌습니다. 그녀의 아빠는 이 세상에, 현실 속에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텅 비어 있던 그 아빠의 자리를 부지불식간에 안내상이 채워주는 것을 보면서, 의외로 가까운 곳에 해답이 있었음을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반드시 피를 나누어야만 가족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은 것입니다. 더구나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좀처럼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던 안내상의 존재가, 다른 누군가의 영혼에 그토록 환하고 따스한 빛을 비춰줄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생각지 못한 감동이었습니다. 아무리 초라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살짝 고개를 돌려 보면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그 사람만의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그 당연한 진리를 잠시 잊고 있었나봐요.

늘 혼자 스쿠터를 몰고 다니던 외로운 소녀는 이제 엉뚱한 아저씨가 운전하는 스쿠터 뒷자리에 앉아서, 그가 건네는 실없는 농담 한 마디마다 신나게 콩닥콩닥 대꾸를 합니다. 때로는 그 아저씨와 거리의 포장마차에서 따뜻한 떡볶이와 어묵을 나눠 먹기도 합니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평범한 모습인데 어찌나 행복해 보이던지요! 부디 그녀의 소박한 행복이 오래 지속되면 좋겠습니다. 기면증이 완치된 이후까지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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