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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킥3' 어느 가을 날, 윤계상의 일기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하이킥3-짧은다리의역습

'하이킥3' 어느 가을 날, 윤계상의 일기

빛무리~ 2011. 10. 6. 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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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늘도 홀로 지내시는 노인분들을 찾아가 영양제 주사를 놓아 드린다. 별 것도 아닌 일에 너무나 고마워하시는 어른들... 나를 보면 쇠잔한 얼굴 한가득 웃음을 띠며 맞아 주시는 어머니 아버지들... 그런데 이번에 단행된 기초생활수급자 재심사에서 많은 분들이 탈락하고 말았다. 이 노인들의 생계를 위협하면서까지 삭감된 그 복지예산은 대체 어디에 쓰여지는 걸까? 그 어디에 쓴다고 한들 이 노인들의 한 끼 밥값보다 더 가치있게 쓸 수 있다는 걸까?

참담한 마음으로 걷던 내 눈에 옆집 소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이름이 지원이라던가? 그 아이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에게 탄원서를 돌리며, 구형 휴대폰 서비스를 일방적으로 종료하려는 통신사의 결정에 항거하는 서명 운동을 벌이는 중이었다. 볼수록 참 특이한 아이다. 방과 후에는 독서실에서 공부만 하고 있을 것처럼 얌전하게 생긴 18세 소녀가, 날마다 머리칼을 휘날리며 스쿠터를 타고 다닌다. 때로는 길 잃은 아이의 엄마를 찾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오늘처럼 부당한 일에 항거하기도 한다.

나의 휴대폰은 구형이 아니지만, 소비자의 정당한 권리를 막는 통신사의 결정은 옳지 않다. 나는 독거노인이 아니지만, 그분들이 기본적으로 누려야 할 생존의 권리마저 위협받는 것을 그대로 두고 볼 수가 없다. 이 두 가지는 근본적으로 똑같은 일이다. 나는 기꺼이 그녀의 서명 운동에 동참했다. 소녀가 나를 보며 웃는다. 한창 최신형 휴대폰에 욕심부릴 나이지만, 그녀는 오래된 것이 정들어서 좋다고 말했다. 왠지 기특한 마음에 내 얼굴에도 저절로 웃음이 떠오른다.

내가 커피를 사러 갔던 1~2분 사이에, 그녀는 나무등걸에 몸을 기댄 채 잠이 들었다. 너무 순식간에 잠들어 버려서, 처음에는 나를 놀리기 위해 장난치는 줄 알았다. 어린 나이로 견뎌내야 했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던 걸까? 조그마한 얼굴에 피로가 가득했다. 손에는 낡은 구형 휴대폰이 소중하게 꼭 쥐어져 있다.

가을 바람이 제법 선선하게 불어 온다. 나는 겉옷을 벗어서 잠든 그녀의 몸에 덮어주고, 조용히 곁에 앉아 버지니아 울프의 책을 펼쳐 든다. 햇살은 부드럽게 책장을 어루만지고, 급할 것 없는 시간이 천천히 흐른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이러한 삶이었다.

외과 수술의 명의로 일컬어지는 장준혁과 함께 명인대학병원에서 근무할 때, 나는 의사도 아니었고 사람도 아니었다. 정해진 틀에 맞춰 하루종일 바쁘게 움직여야 하는 기계일 뿐이었다. 아픈 사람의 마음을 보듬어 안기는 커녕 돌아볼 겨를조차 없는 그 곳이 싫어서, 나는 모든 것을 떨치고 나왔다.

이 곳 보건소 의사로서의 여유로운 생활이 나는 참 좋다. 날마다 독거노인들을 방문하여 말벗이 되어 드릴 수도 있고, 틈틈이 더덕이나 도라지등의 천연작물을 이용하여 신약을 개발할 수도 있다. 오늘처럼 한낮의 길가 벤치에서 잠들어 버린 소녀의 곁을 지켜주며 책을 읽을 수도 있다. 며칠 전에도 명인대학병원에서 다시 연락이 왔지만, 나는 이 귀한 시간들을 몇 푼의 돈과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다.

알고 보니 그 소녀가 아끼던 구형 휴대폰은, 세상을 떠난 그녀의 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 누군가와 주고 받았던 문자들이며 찍었던 사진들이 그대로 저장되어 있다고, 그녀의 사촌언니는 말했다. 문득 안스러운 마음이 스쳐가는데, 그 때 뜻을 함께하는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소외 계층의 삶을 위협하는 복지 예산 삭감에 대해 반대하는 1인 시위를 우리 모임에서 번갈아 가며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

다음 날, 혼자 피켓을 들고 뻘쭘히 시청 앞에 서 있는데, 그 소녀가 바람처럼 달려왔다. 내가 1인 시위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면서 무작정 도우러 왔다는 거다. 그녀가 들고 있는 피켓에는 "이 아저씨 말이 옳아요!" 라고 쓰여 있었다. 나는 소리내어 웃었다. 참을 수 없이 유쾌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녀와 함께 서 있으니까 창피하지도 않았고 1시간이 금세 지나갔다.

고등학생인 그녀는 점심시간이 끝나자 다시 스쿠터를 타고 바람처럼 학교로 돌아갔다. 헬멧을 쓰고 출발하기 전에 나를 돌아보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바람에 시원하게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보는데... 조금은 울적하고 답답했던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참 묘한 아이였다. 그녀의 어린 눈 속에는 푸른 가을 하늘이 담겨 있었고, 그 하늘 속을 스치는 구름처럼 오늘도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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