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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참 오랜만에 극장에 가서 영화를 봤다. '부산행'... 한국형 좀비 영화라고 해서 내 취향은 아니겠다 싶었지만, 그래도 모처럼 외출이나 해보자 싶어서 개봉일에 맞춰서 갔다. 그런데 예상했던 것보다는 재미있게 볼만했다. 스토리는 평범하지만 기차 안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사투와 탈출의 과정 등이 제법 긴박감 넘치게 그려졌고, 새롭지는 않아도 절실한 주제의식이 한층 뚜렷이 드러났다. 냉정한 워커홀릭 펀드매니저 석우(공유)는 아내와 별거 중이며 유치원생인 딸 수안(김수안)과 홀어머니(이주실)과 함께 살고 있다. 그런데 수안이가 자기 생일 선물로 부산에 있는 엄마를 꼭 만나게 해달라며 조르기 시작한다. 아빠가 바쁘면 자기 혼자서라도 기차를 타고 갈 수 있으니 허락만 해달라는 딸의 애원에 미안해..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인간의 생각과 느낌은 점차 변해간다. 그 변화가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는 판단하기 어렵다. 오직 분명한 것은 변했다는 사실뿐이다. 엄홍길 산악대장이 '무릎팍 도사'에 출연했을 때가 2007년이었으니 대략 8년 전이다. 방송에서, 그것도 오락 프로그램에서 처음 접하는 산악인의 모습 자체가 매우 신선했고, 살면서 한 번도 접해본 적 없었던 고산등반가들의 생생한 경험담 또한 그 치열함 만큼이나 흥미진진했다. 죽음의 위협이 항상 도사리고 있는 그 곳을 번번이 스스로 찾아나서는 그들의 마음을 왠지 이해할 수 있을 듯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근 개봉한 영화 '히말라야'를 감상한 후 내 마음속에 드는 느낌은 8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눈 덮인 에베레스트에서 ..
불과 1회가 방송된 후 세트장에서 발생한 화재 사고로 스태프 1명이 목숨을 잃는 등 큰 피해를 입고 방송을 중단했던 JTBC 사극 '하녀들'이 슬픔과 충격을 딛고 심기일전하여 대략 한 달만에 다시 방송을 시작했다. 1회만으로도 상당히 괜찮은 작품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는데, 워낙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한지라 방송 재개 여부조차 불투명했기에 가슴 아프면서도 못내 아쉽던 터였다. 부디 제작진과 출연진이 최선을 다하고 힘을 합쳐 '하녀들'을 최고의 명작 드라마로 탄생시킬 수 있다면, 안타깝게 순직한 스태프의 영혼에도 가장 큰 위로와 선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리뷰에 앞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어쩐지 원작 소설이 있을 듯해서 찾아보니, 극본을 쓴 조현경 작가는 드라마작가 겸 소설가라고 한다. 그래서 소설..
최근 '연애의 발견' 뉴스를 보다가 누군가 써 놓은 댓글을 발견했다. 하진(夏盡)은 여름이 다했다는 뜻이고 태하(太夏)는 큰 여름, 즉 영원한 여름이라는 뜻이니 결국 '한여름'은 '남하진'을 떠나 '강태하'에게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내용이었다. 과연 정현정 작가는 그런 의미를 담고 캐릭터의 이름을 지었던 것일까? 꽤나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는데 종영을 하루 앞둔 15회에서 끝내 남하진(성준)과 결별하는 한여름(정유미)의 모습을 보니 왠지 더욱 확신이 생긴다. 사실 나는 드라마가 시작된 초반부터 한여름이 강태하(에릭)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유는 같은 여자로서 한여름이 행복해지길 바랐기 때문이다. 깜찍한 여우짓이 얄밉긴 했지만 그래도 여자가 불행해지는 건 싫었다. 물론 현재 연인인 남하진도 ..
드라마 '연애의 발견'이 전파를 타기 시작한 이후 가장 뜨거운 화제를 일으킨 것은 여주인공 한여름(정유미)의 러블리한 매력이었다. 살아있는 아기 토끼를 소품처럼 함부로 다루는 바람에 동물 학대 논란도 제법 일었으나, 소수의 애묘인들을 제외하면 그 부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아주 컸다고는 보기 어렵다. '연애의 발견'이라는 키워드에 연관된 대부분의 기사들은 여주인공 한여름의 캐릭터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것을 표현하는 배우 정유미의 연기가 얼마나 훌륭한지를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초반부터 한여름이라는 여자의 캐릭터가 전혀 사랑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실제인 듯 자연스럽고 편안해 보이는 정유미의 연기는 칭찬할만했으나, 캐릭터 한여름에게는 도대체 무슨 장점이 있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남주인..
일단 재미가 없지는 않다. 기본 구도는 식상한 4각관계지만 세부적 설정과 에피소드가 참신해서 식상한 느낌을 없애준다. 특히 현재 남자친구인 남하진(성준)의 맞선 자리에 몰래 쫓아 나갔던 한여름(정유미)이 하필 그 자리에서 전 남친 강태하(에릭)과 마주쳤을 때,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쫄깃한 찹쌀떡처럼 맛있었다. 난데없이 전 여친에게 물벼락까지 맞고 당혹스러울만한 상황에서도 여유롭게 그녀의 입장을 이해하며 적절한 말들로 받아쳐 주는 강태하의 센스가 압권이었다. 그 와중에 "보고 싶었어!" 하고 깨알같은 진심을 털어놓을 때는 또 어찌나 콩닥거리던지! 강태하의 캐릭터는 상당히 매력적으로 잘 만들어져서, 만약 이 드라마가 좋은 시청률을 낼 수 있다면 에릭 문정혁의 연기 인생에는 획기적 전환점이 될 것 같..
취향에 맞지 않아서 평소 안 보던 프로그램이라도 개인적으로 좋아하거나 관심있는 연예인이 출연한다면 가끔씩 채널을 고정하게 된다. 또한 그 프로그램의 성격과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사람이 출연한다면 호기심 때문에라도 몇 번쯤 보게 된다. 배우 남궁민이 '우리 결혼했어요'에 출연한다는 것은 정말 뜬금없고 황당한 소식이었는데, 설상가상 그 상대역이 트로트 가수 홍진영이라니 헉 소리가 날 지경이었다. 2003년 시트콤 '대박가족'에서부터 남궁민의 팬이었던 나는 이후 그의 출연작을 거의 빼놓지 않고 보았는데, 드라마뿐만 아니라 시트콤과 예능에서조차 나직한 목소리로 진지한 캐릭터를 유지하던 남궁민이, 도통 어울릴 것 같지 않은 4차원 캐릭터의 홍진영을 상대하며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말들을 할까 좀처럼 상상이 ..
요즘 안방극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수준 높고 괜찮았던 작품 '제왕의 딸 수백향'을 조기종영하면서까지 하루빨리 방송하고 싶어했던 드라마라면 어느 정도는 기대를 걸어봐도 좋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역시 오산이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 여주인공 서윤주 역을 맡은 탤런트 정유미를 좋아하는 편이라 그녀 때문에도 제발 괜찮은 작품이기를 바랐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한 조각 희망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 모르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식상한 설정들, 이제껏 각종 한국 드라마 속에서 마르고 닳도록 수없이 보아왔던 이야기... 1~2회만으로 평가할 때 '엄마의 정원'은 한 마디로 클리셰의 집합소라 할만하다. 주연 배우들의 이미지는 상큼하고 연기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앞으로의 전개가 어떻게 되어 나갈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세자빈 화용(정유미)인지, 그 여동생 부용(한지민)인지, 아니면 또 다른 궁녀인지 알 수 없는 한 여자가 300년 전의 조선 왕궁에서 연못에 빠져 죽었습니다. 비록 한창 젊은 나이의 서글픈 죽음이었지만, 그래도 연못에 떠다니던 연꽃들과 평화롭게 노닐던 물고기들은 자기들만의 노래와 언어로 그녀의 죽음을 애도해 주었겠지요. 하지만 300년 후의 대한민국 서울에서 가냘픈 몸뚱아리를 사정없이 자동차에 받힌 후 내동댕이쳐진 박하... 그녀가 풍덩 빠져버린 저수지에는 누가 살고 있었을까요? 그 이름도 살벌한 공룡저수지에는 향그러운 연꽃 한 송이 떠다니지 않고, 각박한 서울 생활에 지쳐버린 물고기들은 밤낚시꾼들의 속임수를 피해 꽁꽁 숨어버리지 않았을까 싶네요. 박하의 곁에 다가와 위로의 노래를 불러주는 친구는 아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