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이종혁 (17)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민들레가족'의 후속으로 방송되는 주말드라마의 제목이 '글로리아'라는 것을 들었을 때 처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성가(聖歌)의 제목이었습니다. 'gloria'는 라틴어로 '영광'이라는 뜻을 지녔고, 가톨릭의 대표적인 미사곡 중 하나입니다. 저에게는 매우 익숙한 단어이지만 TV 드라마의 제목으로 접하니 좀 신기하더군요. 주인공 나진진은 앞으로 변두리 나이트클럽의 가수로 활동하게 될 것이며, 그녀가 사용하게 될 무대명이 바로 '글로리아'입니다. 어울리지 않는 듯한 이름이지만,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주인공에게 작가가 굳이 '글로리아'라는 이름을 지어 준 뜻을 저는 이미 알 것 같습니다. '글로리아'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척박한 삶을 견디어내고 있습니다. 나진진(배두나)은 나이 서른에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나..
요즘 드라마에서 악역의 위치는 예전과 같지 않습니다. 원래 악역이란 시청자들에게 미움받는 존재였으나 이제는 별로 그렇지도 않지요. 오히려 강렬한 매력과 포스를 물씬 풍기며 주인공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는 악역이 많습니다. '선덕여왕'의 미실(고현정)도 원래는 주인공 덕만(이요원)과 대칭점에 놓이는 명백한 악역이었으나 그 엄청난 존재감은 주연을 뛰어넘어 사실상 '선덕여왕'을 미실의 드라마로 만들어 버렸었지요. 저의 개인적 견해로 '추노'는 명품 사극이긴 하지만 '선덕여왕'에 비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역동적인 화면 구성이나 액션 등을 생각해 본다면 물론 '추노' 쪽이 앞선 부분도 존재하지만, 제가 가장 중점을 두고 시청하는 인물 심리면에서는 뚜렷하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큰 주모(조미..
"너는 항상 네가 나보다 낫다고 생각했겠지. 그게 바로 내가 지금 너를 죽이려는 이유다." - '추노' 공식 홈페이지, '황철웅' 인물 소개 첫 문장 '추노'에는 황철웅이라는 이름의 악역이 등장합니다. 출중한 연기력의 배우 이종혁이 서늘한 눈빛으로 열연하고 있지요. 그에게서 매력적인 악역을 보고 싶었는데, 저는 유감스럽게도 아직까지 그의 매력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분들은 그에게서 풍기는 어떤 비감한 분위기... 아무리 애를 써도 1인자가 되지 못하는 살리에르의 슬픔이랄까, 그런 면에서 적잖은 공감과 매력을 느끼시는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2인자에 머물 수밖에 없는 고통이 그렇게까지 큰 것일까 하고 저도 생각해 보았는데, 아무래도 공감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가 송태하에게 특별히 원한을 가질만한..
'추노'라는 드라마의 장르를 곰곰히 생각해 보면, 상당히 진중하면서도 무거운 주제를 담고 있는 정통 사극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되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던 노비와 하층민들의 삶이 처참한 삶이 적나라하게 배경으로 깔리고, 꼭대기에서부터 개혁을 시도하던 소현세자는 추악한 정쟁(政爭)의 희생양이 되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였습니다. 소현세자를 따르던 충신들은 초개와 같이 죽어나가거나 가문이 몰살되고 노비로 전락했으며,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부패한 권력의 핵심들은 여전히 썩은 내음을 풍깁니다. 이에 '노비당'이라는 이름으로 기습과 쿠테타를 전담하는 반란 세력이 가장 아래쪽에서부터 치솟아 올라오는 중이며, 소현세자가 남긴 마지막 혈손 이석견을 중심으로 몰락한 양반들의 세력도 집결의 움..
드라마 '추노'가 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습니다. 7회는 마치 공들여 만든 한 편의 영화와도 같더군요. 감칠맛 나는 대사와 적절히 어우러지는 가무(歌舞), 게다가 옛스러운 느낌이 물씬 나도록 중간중간에 삽입된 고어(古語)들... 그 섬세한 구성은 배우들의 자연스러운 연기와 더불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황홀함을 선사해 주었습니다. 송태하(오지호)는 스승이 살해당한 참혹한 현장에서 원수 황철웅(이종혁)과 맞서 싸우다가, 위기에 처한 혜원(이다해)이 부는 호각소리를 듣고 그녀를 구하러 달려갑니다. 소현세자의 유명을 받들고 한시바삐 원손을 구하러 가는 충신인 그가, 어찌 보면 참 한가하다 싶기도 하군요. 게다가 혜원을 잡으러 온 자들은 그녀의 오라버니가 파견한 집안의 호위무사 백호(데니안) 일행이니 실상 그..
서방님,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저를 원해서 혼인하신 것이 아니며, 앞으로도 원하지 않으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당신을 원합니다. 이 마음... 한 번도 당신께 전해 본 적 없지만, 앞으로도 말은 커녕 글로도 제대로 전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당신을 원하고 있습니다. 저는 태어나 한 번도 이 집안을 벗어나 본 적이 없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죽을 때까지 그러하겠지요?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벽히 차단된 이 공간에서, 햇빛조차 받지 못하고 서서히 시들어갈 것이 저의 운명이라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태어날 때에는 성한 몸을 지녔었다는데, 가장 행복했을 그 시절을 저는 기억할 수가 없군요. 두 살 되던 해에 급작스런 열병을 앓고 나서 이렇게 되었다던데, 두 살난 어린아이였던 제가 무슨 큰 죄를..
드라마 '추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굉장히 흥미롭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이렇게 한 명씩 뽑아 인물 탐구를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첫번째 주자는 웬만하면 주인공 대길이(장혁)로 선정하고 싶었으나, 6회까지 시청한 현재, 저의 마음을 가장 사로잡고 있는 캐릭터는 오히려 그의 반대편에 꿋꿋이 서 있는 송태하(오지호)입니다. 아마도 저의 타고난 성격과 생활 환경 때문일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정(正)과 반(反)이 존재하면 융통성 없게도 항상 정(正) 쪽으로 마음이 기울곤 합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도 '나쁜 남자' 신드롬에 물들지 않고 있어요. 물론 나쁜 남자의 매력이 상당히 치명적이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항상 제 눈에 더 밟히는 것은, 그 나쁜 남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 착한 남자의 모습이었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