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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추적자', '황금의 제국', '펀치'로 이어지는 박경수 작가의 묵직하면서도 신선한 작품 세계에 적잖이 매혹당했던지라 그의 신작인 '귓속말'을 꽤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 게다가 믿고 보는 여배우 이보영의 원톱 주연이라기에 더욱 기대가 컸는데, 한편으로는 박경수 작가가 과연 얼마나 매력적인 여주인공을 그려낼 수 있을지 우려되는 마음도 있었다. 워낙 선이 굵고 남성적인 작품 세계를 구현하는 작가이다 보니 상대적으로 여성의 섬세한 내면을 표현하는 부분에서는 좀 부족하다고 느껴왔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의 전작들은 모두 남주인공 원톱이었고, 여주인공들은 상대적으로 무척 비중이 적었을 뿐 아니라 충분히 매력적이지도 못했었다. 막상 뚜껑이 열리니, 나의 우려가 좀 들어맞는 것 같기도 하다. 이보영의 연기력은 예상대로..
약간 촌스러운 사랑 이야기라도 나쁘진 않았다. '첫사랑과의 재회' 스토리가 식상해질 때도 됐지만 아직은 괜찮았다. 하지만 '로미오와 줄리엣'은 이제 질렸다. 제발 그만 우려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 줄 모르고 사랑에 빠졌는데 알고 보니 상대의 부모가 내 부모를 죽인 원수였다는 이야기, 하긴 갈등의 최고점을 찍기엔 더 이상의 소재가 없을 것이다. 웬만한 장애물쯤은 너끈히 극복할 수 있을 만큼 사랑한다 해도 제 부모를 죽인 원수의 자식이라면 쉽지 않을 테니까, 어쩌면 그것은 연인들 사이에 설정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이다. 하지만 설정하기는 쉬워도 풀어나가기는 무척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을까? 솔직히 그런 경우 깔끔한 해결책은 한쪽이 (또는 둘 다) 죽어버리거나 헤어지는 것뿐이다. 하지만 작가들은..
솔직히 말하면 권순규 작가의 전작이 '무사 백동수'라고 해서, 처음부터 아예 볼 생각이 없었던 드라마입니다. 초반에는 상당히 흥미진진했으나 가면 갈수록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것인지 알 수 없던 '무사 백동수'의 그 황망한 전개를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까닭이죠. 전광렬 최민수 등 중견배우들의 묵직한 연기와 국민남동생 유승호의 매력적인 다크포스로도 감당할 수 없었던, 점차 산으로 가는 대본의 위력은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신뢰를 갖게 할만한 다른 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작가의 필모그래피가 (드라마로는) 달랑 그 '무사 백동수' 하나뿐이니, 동시간대에 다른 채널에서 '추적자 THE CHASER'로 신드롬을 일으켰던 박경수 작가의 신작 '황금의 제국'이 방송되는 이상 '불의 여신 정이' 쪽으로 시선을 ..
중반부터 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스토리가 굉장히 독특하게 진행되길래, 엽기적일 만큼은 아니어도 약간은 특이한 엔딩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내심 있었더랬습니다. 그토록 엷은 기대감마저 민망해질 만큼 식상한 엔딩... 어찌 보면 동화에 가깝다 싶을 만큼 작위적인 해피엔딩에 조금은 어처구니가 없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등장인물이 약속이나 한 듯 너그러운 마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중년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저마다의 꿈을 이루고, 외로움에 시달리던 청춘들은 또 저마다의 짝을 찾고... 저는 다만 이삼재(천호진)가 죽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주인공 서영이(이보영)가 너무 불쌍해지지 않기만을 바랐을 뿐인데, 이건 행복해도 너무 행복해져 버렸으니 염려했던 마음조차 뻘쭘해지네요. 현실 속에서라면 어느 한쪽에서는..
모든 일이 기적처럼 잘 풀려가던 참이었습니다. 끝내 꺾이지 않을 것 같던 이서영(이보영)의 자존심도 끝내 아버지 이삼재(천호진)의 사랑 앞에서는 허물어지고 말았네요. 최근 아버지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이서영의 차가운 마음은 조금씩 녹아들고 있었죠. 그러다가 3년 전 자기의 결혼식에 아버지가 하객 대행 아르바이트를 하러 왔었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면서 이서영은 결국 무너져 내립니다. 아버지에게 해도 너무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죄책감, 그런데도 내색하지 않고 참고 견디며 묵묵히 행복을 빌어주었던 아버지의 사랑, 그리고 예전 아버지의 잘못된 행동들도 사실은 자식들을 위하는 마음 때문에 무리한 것이었다는 깨달음 등, 이서영은 뒤..
이서영(이보영)은 참 복이 많은 아이입니다. 모나고 못나고 비뚤어졌지만, 그녀를 위해 기꺼이 고통을 감내하고 자기 삶의 방향도 변화시킬 수 있을 만큼,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참 행복한 서영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행복한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이해받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누구나 가족을 사랑하지만, 사랑하면서도 타인을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니까요. 그런데 참 운 좋게도, 이서영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나고 못나고 비뚤어진 그녀를 마음 깊이 이해해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서영의 주변 인물들은 모두 그녀를 진심으로 염려하며 그녀가 행복하기만 바라고 있는데, 여전히 독불장군처럼 '나 혼자'를 외치는 이서영의 모습은 참 못나고 이기적입니다. 하지만 그녀 스스로는 잘못되었다는 ..
드럼 학원에서 차지선(김혜옥)에게 접근해 왔던 마술사 배영택(전노민)의 정체는 안타깝게도 좋은 친구가 아니라 사기꾼이었습니다. 위너스 그룹의 하청업체를 운영하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르다가 회장 강기범(최정우)에게 축출당한 안사장이 앙심을 먹고 일부러 배영택 부부를 사주해서 차지선을 이용하려 했던 것이지요. 가뜩이나 외로움 많이 타고 심기가 약한 차지선에게 최근 불어닥치는 시련들은 참으로 모질기만 하군요. 사랑하는 막내아들 강성재(이정신)가 남편 강기범의 혼외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믿었던 며느리 이서영(이보영)이 엄청난 거짓말을 하고 시집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었는데, 이제는 제비한테 당해서 억울한 누명까지 쓰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남편의 비서 윤소미(조은숙)에게 속고, 며느리에게..
엔딩은 점점 다가오는데,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어가는 스토리를 보고 있자니 당혹스러웠습니다. 자존심이 아무리 소중해도 사랑보다 앞선 가치는 아니라고 생각했기에, 저는 이서영(이보영)이 한 번쯤은 자존심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너무 자기 방식대로 강압적이었던 강우재(이상윤)의 사랑 방식도 올바른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속임수 없고 진실했던 강우재에 비한다면 시종일관 엄청난 비밀을 숨긴 채 그를 기만하며 살아왔던 이서영이 훨씬 더 잘못한 거라는 생각만 했습니다. 게다가 이서영은 남편과의 상의도 없이 3년 동안이나 몰래 피임약을 먹으며 임신을 거부해 왔던 잘못까지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 속이고 또 속인 셈이니 강우재가 어떻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어떻게 그녀를 이해..
개인적인 추억 때문에 소현경 작가를 특별히 아끼는 저로서는 '내 딸 서영이'라는 제목이 아주 못마땅하고 창피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방송된 인기 드라마 중 '내 딸 꽃님이'라는 제목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이건 작가의 뜻이 아니라 제작사 또는 방송사 측의 압력에 의한 울며 겨자먹기식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아무리 내용은 전혀 다르다지만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토록 '대놓고 따라하기'의 굴욕이라니, 작가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어쨌든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제목이 조그만 가시처럼 걸려 있었는데, 37회의 엔딩을 보고는 그 찜찜한 마음을 약간이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구차스런 따라쟁이 형식의 제목이지만, 그안에는 작품의 주제가 온전히 녹아..
드라마 '내 딸 서영이'에는 정말 깜찍하게 주변 사람들을 속여 온 두 명의 여성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남동생이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고아라고 거짓말한 채 강우재(이상윤)와 결혼해 3년 동안이나 속이며 살아 온 여주인공 이서영(이보영)이고, 또 하나는 상사 강기범(최정우)의 아들 강성재(이정신)를 낳아 업둥이로 위장해 몰래 생부의 집에 들여보낸 후 20여 년 동안이나 자기 정체를 숨긴 채 그 주변을 맴돌며 살아 온 여비서 윤소미(조은숙)입니다. 두 여자 모두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을 저질렀지만, 굳이 비교한다면 윤소미가 이서영보다 훨씬 더 뻔뻔하지요. 진심으로 뉘우치거나 사죄하는 태도는 눈꼽만치도 없이 그저 건성으로 "죄송합니다" 맘에도 없는 사과의 말 한마디만 던진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