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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딸 서영이' 자존심의 벽을 무너뜨릴 단 한 사람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내 딸 서영이

'내 딸 서영이' 자존심의 벽을 무너뜨릴 단 한 사람

빛무리~ 2013. 1. 20.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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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추억 때문에 소현경 작가를 특별히 아끼는 저로서는 '내 딸 서영이'라는 제목이 아주 못마땅하고 창피스러웠습니다. 왜냐하면 작년에 방송된 인기 드라마 중 '내 딸 꽃님이'라는 제목이 있었거든요. 아마도 이건 작가의 뜻이 아니라 제작사 또는 방송사 측의 압력에 의한 울며 겨자먹기식의 선택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지요. 아무리 내용은 전혀 다르다지만 제목이 얼마나 중요한데 이토록 '대놓고 따라하기'의 굴욕이라니, 작가의 입장에서는 절대 그러고 싶지 않았을 거예요. 어쨌든 드라마를 재미있게 시청하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는 제목이 조그만 가시처럼 걸려 있었는데, 37회의 엔딩을 보고는 그 찜찜한 마음을 약간이나마 달랠 수 있었습니다. 비록 구차스런 따라쟁이 형식의 제목이지만, 그안에는 작품의 주제가 온전히 녹아들어 있음을 느꼈기 때문이죠. (그래도 훨씬 더 좋은 다른 선택이 얼마든지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아버지와 딸의 찡한 가족 사랑 이야기', '가깝고도 먼 사이인 아버지와 딸의 사랑과 화해에 대한 이야기' 각종 대형 포털사이트에서 '내 딸 서영이'를 검색하면 한결같이 줄거리가 저렇게 나와 있습니다. 제목에서부터 줄거리 요약까지,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멜로드라마가 아니라 가족드라마임을 분명히 표방하고 있지요. 자연히 중심 내용은 이서영(이보영)과 강우재(이상윤)의 사랑이 아니라 서영이 아버지 이삼재(천호진)의 부정(父情)이어야 하고, 따라서 주제의 발현 또한 이삼재로부터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주인공은 이서영이고 모든 에피소드가 그녀를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주제는 생뚱맞게 다른 인물에게서 발현된다면 그 또한 이상한 설정이 아닐까 싶었지요. 그런데 이러한 의문점도 37회를 보고 나서는 어느 정도 풀어낼 수가 있었습니다.

 

 

지난 주 35회차의 리뷰 '차라리 무너져라 서영아, 그게 낫다' 에서도 언급했지만, 저는 모든 죄가 탄로난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꼿꼿한 이서영의 태도가 무척 마음에 안 들더군요. 이제껏 고난의 세월을 살아오는 동안 그녀를 버티게 해 준 단 하나의 힘이 바로 '자존심'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자신의 거짓말 때문에 깊이 상처받은 남편과 시부모를 향해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말간 얼굴로 당당하게 "죄송합니다"를 말하는 서영에게 공감하기는 어려웠어요. 전지적 시점에서 드라마를 보는 시청자들이야 그녀의 마음 속에 진심어린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지만, 눈 앞의 피해자들은 전혀 그 마음을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진정한 뉘우침이라고는 눈꼽만치도 느껴지지 않는 무미건조한 사과 한 마디를 남기고 쌩하니 짐을 챙겨 나가버린 며느리의 태도에 강기범(최정우)은 분노했습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속였습니다, 죄송합니다, 들켰으니 이혼하겠습니다? ... 당장 (이혼 서류에) 도장 찍어 내일 접수해!" 강우재는 서영에게도 무슨 사정이 있었을 거라며 애써 감싸보려 했지만 아버지의 서슬 푸른 분노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었죠.

 

 

지금 어리석게도 이서영은 '자존심' 하나를 지키기 위해 단 하나의 사랑과 모든 가족을 버리려 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싹싹 빌어 보라고 권하는 친구 이연희(민영원)에게 서영은 말했죠. "빈다는 건 용서해 달라는 뜻이고, 용서해 달라는 건 용서해 주기만 하면 그 자리에 계속 있겠다는 거잖아.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을 거니까, 빌면 안 되는 거지!" 도대체 왜... 아직도 강우재를 사랑하면서, 뿐만 아니라 시부모와 시동생에게도 깊은 가족애를 느끼고 있으면서, 그 사랑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노력 한 번 해 보지도 않고 이토록 쉽게 포기하려는 걸까요? 오히려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라며 간절히 붙잡는 남편의 손길마저 매몰차게 뿌리치는 서영의 모습은 참으로 답답했습니다.

 

"왜 속였냐고? 알고 있잖아. 당신이 생각하는 그대로야. 위너스 후계자랑 결혼하고 싶어서, 걸림돌이 되는 내 환경을 숨겼을 뿐이야!" 하지만 3년여의 결혼 생활을 통해 서영의 품성을 어느 정도 알고 있던 강우재는 그녀의 위악적인 거짓말에 속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말하면 속이 편하니? 한 번이라도 솔직하면 안 되는 거니?" 진심으로 용서하고 싶은데 기회를 주지 않는 아내 때문에 속상해서 거의 눈물을 글썽이다시피 하는 강우재의 모습이 안스럽더군요. 이서영... 사실은 자기도 용서받고 싶으면서, 그의 옆자리에 남고 싶으면서 왜 솔직히 말 못 하는 걸까요? 처음부터 속이려던 것은 아니었다고, 절대 결혼을 허락받을 수 없을 줄 알았기 때문에, 잠시 스쳐가는 사랑인 줄 알았기 때문에 별 생각없이 툭 던졌던 거짓말인데 나중에는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노라고, 서러운 눈물 펑펑 흘리며 고백하면 안 되는 걸까요? 구구절절한 변명이나 늘어놓는 건 너무 자존심 상하는 일이니까?

 

 

극 초반부터 유별나게 꼬장꼬장한 자존심은 이서영의 아이덴티티(identity, 정체성)였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동안 그것에 의지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포기하거나 부정한다면 자기 자신을 잃어버릴 듯한 두려움을 느끼겠죠. 하지만 진실은 그게 아닙니다. 자존심은 그녀로 하여금 고된 일상을 견디게 해주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뿐, 그녀의 존재 자체는 아니거든요. 예전에는 그 자존심이 서영을 지켜주었는지 모르지만, 이제는 오히려 그녀를 가두는 견고한 벽이 되었습니다. 그녀 자신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뚫을 수 없는, 자칫하면 그녀를 파멸시킬 수도 있는 인생의 거대한 장벽이 되어버린 거죠. 이제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일인데, 아버지 이삼재가 몰래 자신의 주변을 맴돌며 지켜보고 있었음을 알게 된 서영은 그 자리에 얼어붙고 말았습니다. 유만호라는 낯선 이름으로 다가왔던, 정체불명의 그 착한 아저씨가 바로 아버지였다니! 위험에 처한 강우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어 대신 차에 치이고, 은혜를 갚으려는 우재가 계속 찾아다녀도 이리저리 숨기만 하고, 어떻게든 자신의 정체를 숨기려 갖은 방법으로 애썼던 아버지의 모습들이, 이제 서영의 머릿속에는 하나 하나 떠오르겠죠. 그 모든 일은 바로 자기를 위한 것이었음을,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었다고 거짓말한 채 시집가더니 3년 동안 소식 한 점 없는 매정한 딸자식을 위한 것이었음을 깨닫게 되겠죠. 역시 마음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사랑'밖에 없음을 절감하는 순간입니다.

 

 

38회의 예고편을 보니, 이서영은 잠시 충격을 받았을 뿐 곧 마음을 추스르고 "달라질 것은 없다"면서 냉정하게 강우재를 밀어낸다지만, 그건 절대 서영의 본심이 아닙니다. 일단은 자존심을 앞세우며 담담한 태도를 보이더라도, 그 후부터는 차츰 무너져갈 거라고 저는 믿어요. 여기서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이서영의 삶은 끝내 자존심의 벽에 갇힌 채 행복으로부터 영원히 멀어지게 될 것이고, 작품의 주제조차 손상되기 때문에 이쯤에서는 반드시 무너져 주어야 하거든요. 그렇다면 남편 강우재의 진실한 사랑이 무너뜨리지 못했던 이서영의 마음 속 견고한 자존심의 벽을, 어째서 이삼재의 사랑은 무너뜨릴 수 있는 걸까요?

 

그 이유는 결자해지(結者解之)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매듭은 묶은 자가 풀어야 하고, 일은 저지른 사람이 수습해야 하는 법이죠. 이서영이 자존심 하나에 죽자사자 매달릴 수밖에 없도록 만든 사람은 바로 아버지 이삼재였습니다. 허황된 꿈에 빠져 가족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 때문에 어린 서영은 깊이 상처받았고, 더할 수 없이 고통스런 학창시절을 보내야 했습니다. 성인인 대학생이 되어서도 아버지의 빚을 대신 갚느라 허리가 휘었고, 쌍둥이 동생 이상우(박해진)의 학비를 벌어 대느라 자기 공부는 번번이 뒷전으로 미루어야 했지요. 아버지가 너무 많은 고통을 주었기 때문에 이서영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느꼈으며, 진짜로 아버지를 미워했습니다. "제가 아버지 딸이라는 게 정말, 정말 싫어요!" 그 외침은 이서영의 여과없는 진심이었죠.

 

 

"자기 근본을 부정한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가 없다!" 강기범의 말처럼, 부모의 존재는 자녀의 근본(根本, 뿌리)입니다. 뿌리는 힘써 땅으로부터 흡수해 올린 양분을 줄기와 가지와 잎으로 전달해서 풍성히 자라날 수 있게 하지요. 이와 같은 희생이야말로 뿌리가 보여줄 수 있는 명백한 사랑의 증거인데, 안타깝게도 이삼재는 그걸 보여주지 못했던 거예요. 뿌리에게서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낀) 가지는 바삭바삭 말라가다가 급기야 (살아남기 위해) 자존심의 벽을 둘러치고 자신을 보호하기 시작했지요. 옆에서 다른 나무의 싱싱한 가지(강우재)가 말을 걸어와도 그 벽 때문에 응답할 수 없었고, 진심으로 손을 잡으려 해도 그 벽 때문에 붙잡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 해결책은 무엇이겠습니까? 사실은 뿌리로부터 깊은 사랑을 받고 있었음을 깨닫고, 그 양분을 받아들여 바싹 말라비틀어진 마음을 촉촉히 적시는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이서영의 삶을 파멸로 몰아가는 견고한 자존심의 벽을 무너뜨리고 그녀를 구해 줄 단 한 사람은 그래서 이삼재입니다. 하지만 이삼재의 역할보다는 이서영 본인의 역할이 더 크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지요. 아무리 도와주려 해도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소용이 없고, 모든 싸움 중에 가장 힘든 것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니까요. 이제껏 목숨 걸고 지켜왔던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스스로 무너뜨린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용기이며 희생입니다. 하지만 이서영은 (정신적) 죽음과 맞닿는 그 공포를 이겨내고, 끝내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을 거예요. 그게 바로 이 드라마의 아름다운 여주인공이 보여주어야 할 마지막 모습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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