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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어쩌면 태종 이방원(유아인)을 주인공으로 한 '육룡이 나르샤'는 처음부터 내가 몰입하기 힘든 작품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영현 작가의 사극이기 때문에 방영 전부터 큰 기대를 걸었지만, 높은 시청률과 대중의 호평에도 불구하고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였다. 작품 전체에 담긴 근본적 메시지는 훌륭했지만, 주인공 이방원의 캐릭터는 지독히 잔인하고 냉정하며 자기중심적인 욕망으로 가득찬 인물이었다. 그러니 심약한 나로서는 이방원을 중심으로 흘러가는 스토리에 호흡을 맞추며 몰입하기가 버거웠다. 드라마에 푹 빠져있던 혹자들은 이방원의 캐릭터를 두고 '겉으로만 잔인할 뿐 속마음은 여리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내가 보기에 이방원이 흘린 모든 눈물은 악어의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대장금'의 장금(..
'대장금'과 '서동요' 이후 김영현 작가의 사극에 매료된 나는 '선덕여왕'과 '뿌리깊은 나무'를 시청하며 그녀의 필력을 극도로 존경하기에 이르렀다. 역사적 사실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았으나, 다큐멘터리가 아니라 엄연한 창작물이기에 그 정도는 충분히 용인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다르겠지만 요즘 시대에 영화나 드라마의 내용을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고, 작품을 감상하다가 실제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긴다면 다른 경로를 통해서 공부하면 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외국에 수출될 경우는 좀 더 오해의 소지가 많겠으나, 방영 전에 자막으로 '이 작품은 허구와 상상력이 가미된 창작물로서 역사적 사실과는 차이가 있음'을 분명히 밝힌다면 큰 문제는 되지 ..
비극일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그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지독한 비극으로 '뿌리깊은 나무'는 막을 내렸습니다. 역사적 실존 인물을 제외하고 허구로 창조된 인물들은 모두 죽음을 맞이했지요. 지난 번 리뷰에서 제가 예상했던 대로 소이(신세경)가 가장 먼저 죽음을 맞이했지만, 어차피 강채윤(장혁)의 목숨도 그리 길게 남아 있지는 않았습니다. 소이가 죽어가면서 치맛자락에 남긴 훈민정음 해례를 가슴에 품고 그녀의 유언에 따라 반포식장으로 달려온 강채윤은,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하여 세종(한석규)의 목숨을 지켜내고 소이가 그토록 원했던 반포식을 끝까지 지켜본 후 눈을 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오늘 리뷰의 스크롤 압박은 제 블로그 역사상 최대치입니다. 이건 뭐... 한 편의 소설이네요;;) 돌궐의 위대한 전사이며 천..
가슴이 아픕니다. 우리 전하, 우리 임금님이 너무나 가여워서 볼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프니까 눈물도 나지 않습니다. 누구보다 부왕 세종(한석규)의 뜻을 깊이 이해하고, 한글 창제 사업의 오른팔로서 든든한 역할을 해주던 효자 광평대군(서준영)은 결국 밀본에 의해 처참히 살해당하고 말았습니다. 싸늘하게 식은 아들의 시신을 품에 안고서도 차마 믿을 수 없다는 듯, 축 늘어진 그 손을 자꾸만 들어올려 자신의 뺨에도 대어 보고, 아비를 한 번만 안아 달라는 듯 자꾸만 자신의 몸에 걸쳐 보는 세종의 모습은 보는 이의 가슴마저 갈갈이 찢어지게 만들더군요. (쓰다 보니 리뷰가 너무 길어졌네요. 스크롤 압박이 장난 아닐 듯하여 미리 사과드립니다..;;) 홀로 편전으로 돌아온 세종은 허깨비처럼 휘청이며 이리저리 맴돌기 ..
14회까지는 거의 단역에 지나지 않았던 광평대군(서준영)의 존재감이 15회에 이르러 극대화되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세종대왕의 다섯째 아들인 광평대군은 부왕 못지 않게 학문에 힘써 사서삼경 등에 능통하였고 국어, 음률,산수에도 밝았으며, 서예와 격구에도 능하였다 합니다. 또한 성품이 너그럽고 용모마저 아름다웠으나, 안타깝게도 2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는군요. 그는 이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유일한 왕자로서 부왕의 한글 창제를 적극 돕고 있습니다. 1. 호랑이 아들 광평대군의 신념과 기개 사대부의 거센 반발을 일단 잠재우고자 한글 연구 자료들을 몰래 옮기려던 광평대군(서준영)과 궁녀 소이(신세경)은 밀본에 의해 납치를 당하지만, 다행히도 강채윤(장혁)의 손에 구원을 받았습니다. 세종(한석규..
이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그 누구 하나 행복한 사람이 없습니다. 백성들도, 신하들도, 임금도... 저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끌어안고 날마다 눈물 속에 살아갑니다. 보통은 그 눈물이 꽁꽁 싸매어져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나, 때로는 봇물 터지듯 한꺼번에 흘러나올 때가 있지요. 12회에서는 특히 그들의 감춰져 있던 슬픔이 겉으로 드러나면서 보는 이의 눈물샘을 자극하는 장면이 많았습니다. 1. 강채윤의 절규 (똘복이와 담이의 재회) 궁녀 소이(신세경)는 강채윤(장혁)이 붙인 벽보를 보고 어린 시절에 헤어졌던 똘복 오라버니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되었습니다. 복(福)이라는 글자의 수를 놓다가 훔쳐낸 금실이 모자라서 획수를 빠뜨리고 새길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탄생하게 되었던 기묘한 틀린..
드디어 베일에 싸였던 밀본의 수장, 본원 정기준의 정체가 밝혀졌습니다. 그 동안 수많은 추측 속에서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던 반촌의 백정 가리온(윤제문)이 바로 그였습니다. 오히려 너무 강력히 추측되는 인물이므로 뻔한 전개를 피하기 위해서는 그를 후보에세 배제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별다른 반전은 없었습니다. 아무튼 정기준은 현재까지 세종(한석규)과 강채윤(장혁)을 완벽히 속이는 데 성공했습니다. 가리온의 정체를 꿈에도 모르는 세종은 그를 소중한 인재로 아끼며 자신의 사업에 동참시키려는 중이고, 강채윤은 천민의 설움을 겪는 그를 통해 죽은 아비 석삼의 모습을 발견하며 지극한 연민을 품게 되었습니다. 적들로부터 경계심이나 악의가 아니라 오히려 완벽한 믿음과 호의를 얻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정기준은..
"내가 대체 뭘 그리 잘못했느냐? 나는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내 신하들은 지금도 모두 모여서, 내 뜻을 거스를 모의를 한다더구나. 그래, 생각해 보면 항상 그랬다. 중국의 책력이 아닌 우리의 책력을 만든다 할 때도, 천문기기를 만들기 위해서 중국에 사람을 밀파할 때도, 세법 가부조사를 할 때도, 노비 장영실에게 관직을 주려 할 때도... 대행 대왕의 뜻을 거스를 수 없사옵니다, 국고가 낭비 되옵니다. 신분 질서가 어지럽혀 지옵니다... 지랄들 하고는... 결국엔 자기들의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 것이면서, 온갖 공맹의 도리를 들이대면서 말이다! 공자께서 언제 자국의 책력을 만들면 안된다 하셨느냐? 맹자께서 언제 백성의 소리를 직접 들으면 안된다 하셨어? 나는 단지 조선을 세우고 싶을 뿐이었는데, 대..
"네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진다. 흔들리지 마라..." 국가의 지존이신 임금 세종(한석규)이 한낱 궁녀에 불과한 소이(신세경)에게 내린 어명입니다. 세종의 마음속에 소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크게 자리잡고 있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입니다. 강력한 절대군주 세종이 나약한 궁녀 한 사람에게 이토록 마음을 의지하고 있다니, 생각해 보면 참 묘한 일이지요? "네가 흔들리면 나도 무너진다..." 도대체 이렇게까지 말할 만큼, 세종에게 소이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임금 또한 사내이니, 세종이 소이를 여인으로 바라보며 사랑하고 있다는 추측도 가능하긴 합니다. 하지만 제가 판단하기에 그건 아닌 듯 싶습니다. 앞으로 세종과 소이, 그리고 강채윤(장혁)의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어 갈지는 모르나, 지금까지의 분위기를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