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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2012년 '추적자 THE CHASER'의 신선한 충격은 박경수 작가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와 기대를 한껏 높여주었다. 비록 2013년 '황금의 제국'은 전작만큼의 화제성과 시청률을 확보하지 못했으나, 인간의 내면을 무섭도록 냉정하고 끈질기게 파헤치는 작가의 묵직한 필력은 매니아들을 충분히 만족시켰다. 그 후 1년여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4년도 막바지에 이른 겨울, 드디어 고대하던 '펀치'가 방송되기 시작했다. 공중파와 케이블을 통틀어 100편이 넘는 드라마가 제작되었으나 그 중 깊은 인상을 남긴 수작은 1~2편에 불과했던 2014년의 혹독한 드라마 기근에 '펀치'는 과연 단비로 내려줄 수 있을까? 첫방송을 시청한 소감을 말하자면,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전형적인 구도를 지니고 있어 신선함은 느낄 수 없..
겨우 2회가 방송되었을 뿐인데 '열애'의 속도감이 대단하다. 양태신(주현) 회장의 죽음이 멀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토록 빨리 닥쳐올 줄은 몰랐다. 강문도(전광렬)가 악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매서운 발톱을 꽁꽁 숨긴 채 인내하며 지내 온 시간이 얼마인데 이토록 쉽게 속내를 드러낼 줄은 몰랐다. 장인이 비록 악성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았지만 아직은 시퍼런 눈빛으로 살아 있는데, 그 앞에서 두려움 없이 본색을 드러내는 강문도의 모습은 핏빛처럼 섬뜩했다. 그 태도는 살인을 결심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장인의 말 한 마디면 이제껏 쌓아 온 공든탑이 단숨에 무너지고 모든 판도가 뒤집힐 거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 그런다는 건, 그 순간 이후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도록 장인의 목숨을 ..
예상보다는 다소 이른 시기에 한정희(김미숙) 여사의 비밀이 밝혀졌습니다. '황금의 제국' 5회에서 한정희는 24년 동안 숨겨왔던 원한과 욕망을 남김없이 드러내었군요. 후계 다툼에 관심이 없는 아들 최성재(이현진)를 설득하기 위해 그의 생부가 어떻게 죽었는지, 또 어미인 자신은 어떻게 해서 원수의 아내가 되었는지를 낱낱이 털어놓는 형식이었습니다. 그 옛날 한정희는 청마건설 사장 배영완의 아내였고, 최동성(박근형)은 청마건설에 시멘트를 납품하던 업자였죠. 그런데 불량 시멘트가 원인이 되어 청마건설이 짓고 있던 아파트가 공사중에 무너져 내리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그 책임을 지게 된다면, 맨손으로 10년 동안 일구었던 기업은 그대로 날아가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상황이었죠. 때마침 최동성과 함께 성진 시..
아무래도 주인공을 악역으로 설정한 것은 치명적 패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본인이 그렇게 살지는 못해도) 드라마의 주인공을 통해서나마 대리만족을 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주인공이 나쁜 놈으로 그려지면 절대 몰입할 수가 없거든요. (혹시 "저 나쁜 놈... 그런데 보면 볼수록 나랑 비슷하네. 그러니까 응원해야지" 이러면서 몰입할 사람도 있을까요? ㅎㅎ) 물론 주인공도 악한 행동을 할 수 있으나, 그 행동에 충분한 이유가 주어지고 보편적으로 이해 가능한 수준이 되어야만 몰입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입봉작이라 할 수 있었던 '추적자'의 호평과 성공에 너무 들떴던 게 아닐까요? 주인공을 악역으로 만들고 그에 합당한 동기 부여마저 쿨하게 넘겨버린 박경수 작가의 용감함은 언뜻 과도한 자신감으..
'추적자 THE CHASER'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박경수 작가가 1년만에 신작 '황금의 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추적자'는 한국 드라마의 고질적 폐단이라 할 수 있는 '뒷심 부족'이 전혀 드러나지 않은 보기 드문 수작이었죠. 그래서 반가운 마음으로 기다려 온 차기작인데, 아무래도 평온한 마음으로 즐겁게 시청하기는 그른 듯 싶군요. 홈페이지를 둘러 본 느낌부터 쎄하더니 첫 방송을 시청한 후에는 더욱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하긴 돌이켜 보면 '추적자'도 맘 편히 볼 수 있는 드라마는 전혀 아니었죠. 볼 때마다 가슴을 쥐어짜는 듯 답답하고 고통스러우면서도 왠지 모를 이끌림에 빠져들게 되는 묘한 작품이었습니다. 너무도 가감없이 표현되는 잔혹한 현실은 차라리 눈 감은 채 살아가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여..
사랑이 깊어갈수록 오수(조인성)의 고통은 더해만 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뇌종양이 재발한 오영(송혜교)은 삶의 의욕을 잃고 남아있는 시간이나마 짧은 행복을 누리겠다고 했지만, 차마 그렇게 보낼 수 없었던 오수는 눈물과 회유와 협박 등 갖은 방법으로 애걸복걸해서 간신히 마음을 돌려 놓았더랬죠. 수술받지 않겠다는 오영을 설득하기도 힘들었지만, 그녀를 위해 좋은 의사를 소개하는 일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오수는 자기 목숨을 담보로 잡고 비아냥거리는 조무철(김태우) 앞에 기꺼이 무릎을 꿇었고, 영이의 뇌 사진을 보고 가망 없다며 고개젓는 의사 조선(정경순)을 설득하기 위해 또 한 차례 절규해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천신만고 끝에 양측의 동의를 얻어내고 수술 날짜가 잡히기를..
세상 누구인들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인간이 있을까요. 이 문장에 굳이 의문형 부호를 붙이지 않은 이유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때로는 이제껏 후회할 일 하나 없이 살아왔다고 말하는 오만한 사람과도 마주치지만, 그들의 깊은 속내를 들여다 보면 오히려 더 후회할 일이 많지 않을까 싶기도 하군요.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볼 때 가장 후회스런 일들은 지나친 오만으로 저질렀던 실수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우리는 부족한 인간이기에 모두 실수를 저지르고 후회를 하며 살아갑니다. 그 누구도 이 문제에서 예외일 수는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현재 tvN에서 방송중인 드라마 '나인'은 우리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비록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임을 알고 있지만, 원래 드라마를 비롯한 모든 예술작품은 판타지에서 비롯된 ..
예상대로 오영(송혜교)의 극심한 두통은 뇌종양이 재발한 결과였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그녀를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헤매게 만들었던 그 병이 다시 목을 죄어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내 최고의 의료진도 그녀의 뇌 사진을 보고는 가망 없다며 고개를 가로저을 만큼 오영의 상태는 심각합니다. 최초 발병이 아니고 재발이기 때문에 그녀가 삶을 되찾을 수 있는 가능성은 더욱 희박한 상황입니다. 이제 그녀의 나이 스물 일곱... 생각해 보면 이렇게 불행한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또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오영의 삶은 비참 그 자체였네요. 부모가 이혼해서 엄마를 잃고 오빠와 헤어졌을 때 오영은 겨우 여섯 살에 불과했는데, 그 이별의 아픔이 채 가시기도 전에 찾아온 뇌종양으로 죽음의 공포를 겪고, 그 충격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
제가 보기에 '그 겨울, 바람이 분다' 8~9회는 다소의 시간 끌기(또는 쉬어가기)가 아니었을까 합니다. 한국의 주중 미니시리즈는 기본이 16회니까 어떻게든 그 분량은 채워주어야겠는데, 이 작품은 원래 기본 스토리가 간략해서 웬만큼 살을 붙이고 옷을 덧입혀도 그만큼 채우기는 빠듯하리라 생각되거든요. 일본 드라마가 거의 그렇듯 원작인 '사랑따윈 필요없어, 여름'도 10부작으로 종영했고, 문근영 김주혁 주연으로 리메이크 했던 영화는 더구나 총 2시간도 못 되는 분량이었습니다. 그런 것을 16부작으로 늘려 놓으려면 대략 두 가지 방법이 있겠죠. 등장인물과 에피소드를 왕창 늘려서 지루할 틈이 없도록 하되 원작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작품으로 재탄생시키거나, 아니면 주어진 얼개 안에서 등장인물들의 섬세한..
오늘은 그 남자, 오수(조인성)의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처음엔 돈을 목적으로 오영(송혜교)에게 접근했지만 어느 사이엔가 이용하려던 대상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그 남자... 짧은 시간이라도 마음껏 사랑하고 싶지만 오빠라는 이름으로 다가갔기에 다른 관계의 가능성은 애초부터 차단되어 있는 갑갑하고 슬픈 운명... 그 누구보다도 가감없는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기에 오수가 느끼는 공포와 불안, 슬픔과 두려움은 남들보다 훨씬 더 크고 생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10년 전에 죽은 옛사랑 문희주(경수진)를 잊지 못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는 마음까지 짊어지고 살아가니, 오수 이 녀석의 인생도 참 고달프기 짝이 없군요. 아무런 꿈도 목표도 없이 살아 왔지만 이제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서 모처럼 사람답게 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