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김혜은 (8)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지금껏 오혜원(김희애)의 삶에 순수란 없었다. 오직 생존을 위한 치열한 몸부림이 있었을 뿐이다. 그녀라고 처음부터 그렇게 살고 싶었던 것은 아닐진대, 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설명되지 않았다.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초라하게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의 욕망 때문이었는지, 음대 재학 시절 촉망받는 피아니스트 재원이었던 오혜원은 건초염 악화로 꿈을 접으면서부터 예고 동창 서영우(김혜은)에게 달라붙어 그 집안의 시녀가 되었다. 서한그룹 회장인 아버지 그늘에서 보호받으며 안하무인으로 살아 온 서영우는 걸핏하면 오혜원의 뺨까지 때리면서 모욕하지만, 그런 것쯤이야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길 만큼 혜원의 가슴은 무디어진지 오래다. 상처받기 쉬웠던 예술가의 여린 감성은 어느 새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오혜원..
백과사전에 의하면 '운명론'이란 세상 만사가 미리 정해진 필연적 법칙에 따라 일어난다고 여기는 사상이다. 운명론의 특징은 이 세상의 모든 일에 논리적인 인간관계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점에 있다고 한다. 운명이 전능의 힘을 가지고 인사(人事) 일체를 지배하기 때문에, 예컨대 한 사람이 어떤 날에 죽도록 운명지어지면 사전에 아무리 많은 노력을 기울여도 그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이제 보니 임성한 작가는 운명론을 광적으로 신봉하는 것 같고, 샤머니즘(무속신앙)에 끈질긴 애착을 갖고 있으며, 환생 등의 몽환적 개념도 철석같이 믿고 있는 듯 싶다. 전작들에서도 그런 경향이 적잖이 드러났지만, 특히 '오로라 공주'는 임성한의 머릿속을 지배하는 각종 신앙과 사상과 개념들의 총결산이라 할 수 있..
드디어 설설희(서하준)의 일편단심 사랑이 결실을 맺었다. 오로라(전소민)는 설설희의 병이 낫든 아니든 상관없이 평생 그의 아내로 살아갈 것을 서약하며 흰 옷을 입고 그의 곁에 섰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응답받지 못한 외사랑으로 오랫동안 힘겨워했던 설설희가 이제 오로라의 진실한 응답을 받아 생애 최고의 순간을 맞이했다. 그의 병이 완치되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무사히 천수를 누리게 된다면 가장 좋겠으나, 그렇지 못하다 해도 가장 열렬한 소망을 이루었으니 여한은 없을 터이다. 이제 그들에게서 아이가 태어난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 외아들에게 닥친 병마로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좌절을 맛본 설국(임혁) 회장과 안나(김영란) 여사에게도 그보다 더한 위로는 없을 것이다. 결혼식의 축가를 부르는 사람은 록그룹 '부활..
황마마(오창석)의 캐릭터에 치를 떨기 시작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오로라 공주'라는 작품을 통해 임성한 작가에게 극도로 실망하게 된 것도 그 무렵이다. 세간의 따가운 눈총과 논란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그녀의 작품을 호의어린 시선으로 즐겨 보던 나였지만, 도저히 이 작품은 기분 좋게 보아낼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그런데도 계속 보고 있는 이유를 묻는다면 솔직히 무어라 콕 집어 말하기 어렵다. 일종의 중독일까? 그냥 무심히 보고 있을 뿐 더 이상 실망할 것도, 더 이상 할 말도 없을 줄 알았다. 스트레스를 못 견딘 오로라가 양주 한 병을 혼자 다 비우고 미친듯이 "What can I do~"를 부르며 시누이들에게 술주정하던 장면에서도 그저 기막혀 웃었을 뿐 더 이상 할 말은 딱히 없었다. 그런데 1..
오로라(전소민)과 황마마(오창석)의 결혼이 확정되자, 이른바 '욕하면서 보던' 막장 러브라인이 일단은 종결된 셈이라 급격히 흥미가 떨어진 느낌이다. 원래대로 120회에서 마무리될 예정이었다면 더 이상의 변수는 기대하기 어렵겠지만, 무려 30회나 연장하는 바람에 앞으로도 50회를 넘기는 분량이 남아 있으니, 이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아무리 드라마 속 일이라도 행복한 결혼식을 보면 덩달아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게 인지상정이거늘, 신랑 신부가 행복하게 웃을수록 못마땅해지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 동안 이 신혼부부의 염치없는 행위들을 바라보며 꼬여버린 심정은 저절로 또 다른 태풍을 기대하게 된다. 메인 스토리가 제1막을 내리며 한숨 돌리는 요즘, 주변인들의 이야기가 한창 물이 올..
만약 '주군의 태양'에서 그 멋진 소지섭이 찌질남으로 변신한다면 시청자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그 해맑은 이종석이 스토커로 변신하여 싫다는 이보영을 지긋지긋하게 쫓아다녔다면 시청자는 용서할 수 있었을까? 어느 정도의 못난 모습, 인간적으로 봐줄 수 있는 차원이라면 용납 가능하겠지만 이건 아니다. '오로라 공주' 공식 홈페이지 대문에는 아직도 오로라(전소민)와 황마마(오창석)를 주인공으로 한 포스터가 걸려 있다. "너무 다른 두 완벽 남녀의 운명적 사랑 스토리!" 라는 표제도 아직은 유효한 모양이다. 그러나 황마마는 이미 주인공으로서의 자격을 잃었다. 설설희(서하준)의 등장 이후로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을 걸어 왔지만 그래도 한 가닥 희망은 남아 있었는데, 74회에서 최후의 마..
막장 드라마를 쓰는 작가들 중에서도 대중들로부터 가장 심하게 욕을 먹는 작가는 단연 임성한이 아닐까 싶은데요. 그래도 저는 이제껏 임성한 작가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편이었습니다. 그녀에게 쏟아지는 무수한 비난들이 별로 타당하다 여겨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제가 그녀의 작품을 재미있게 즐겨 보았기 때문이죠. 그런데 이번 작품 '오로라 공주'를 보면서 제 마음은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것 같네요. 사실 2007년 이후의 작품은 예전만한 재미가 없었기 때문에 좀 시들해지기도 했지만, 이번 작품은 특히 못마땅합니다. 초반에 비호감 여주인공을 내세우기에 어쩌려고 이러나 했더니, 요즘은 아니나 다를까 예전처럼 노골적인 여주인공 감싸기 모드에 접어들었군요. 아마도 작가는 "이런 여자가 탄산..
아니나 다를까, 저는 또 방황을 시작했습니다. '각시탈'에서는 시원한 액션으로 원수를 무찌르는 히어로의 활약을 맘껏 즐길까 했더니, 어머니와 형은 비참하게 죽고, 단짝친구는 변절해서 원수가 되고, 어린 시절의 연인은 서로를 못 알아보는 등 비극만 계속되고 있습니다. '유령'은 조현민(엄기준)의 등장 후 그와 연결된 새로운 악역들이 속속 늘어나며 아리송한 미스테리가 중첩되고 있는데, 솔직히 저는 머리가 좀 아프더군요. 너무 복잡하다 싶은 느낌도 들고, 주인공이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역동적인 스릴을 느끼고 싶은데, 좀처럼 미스테리는 풀릴 기미가 안 보이니 답답하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생각해 보니 요즘 인기를 끄는 드라마 '각시탈'과 '유령'과 '추적자'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상대하기에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