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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 공익 캠페인 같다 본문

종영 드라마 분류/대물

'대물' 손발이 오그라드는 민망함, 공익 캠페인 같다

빛무리~ 2010. 10. 28.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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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의 유토피아를 꿈꾸는 드라마 '대물'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심상치 않은 포스를 풍겼습니다. 현실과 아슬아슬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에피소드들은 최고의 스릴을 선사했고, 평범하던 여성의 변화가 시작되는 모습은 앞으로의 기대에 설레게 했습니다. 그러던 '대물'이 불과 3주만에 무너져가고 있군요. 저는 처음부터 현실과 허구의 경계선이 허물어질 경우에 대한 위험을 지적했었지요. ('대물' 현실과의 아슬아슬한 데자뷰, 성공할 수 있을까? ) 그 위태로운 경계선을 삽시간에 허물어뜨린 힘이 내부에서 작용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작용했는지는 모르나, 예상보다 그 때는 너무 빨리 찾아왔습니다.

'대물' 7회를 보면서 저는 계속 손발이 오그라드는 느낌에 시달렸습니다. 작가와 감독이 바뀐 후에는 계속 그랬지만, 이번에는 너무 심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명색이 15세 이상 관람가인데, 제가 보기에는 오히려 15세 미만 관람가로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초 · 중등생을 위한 교육드라마라고나 할까... 골통 검사 하도야(권상우)는 그 행동과 말투가 너무 거칠어서 약간 부적합하지만, 세상의 권력에 맞서 홀로 정의를 외치는 주인공 서혜림(고현정)의 모습은 아이들 교육용으로 딱 그만이다 싶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타협할 줄 모르는 원칙주의자이고, 뜨거운 가슴이 불타오르는 정의의 사도입니다. 엉겁결에 그들과 한편이 되어버린 공성조 지청장(이재용)과 왕준기 실장(장영남)을 합치면 4명이고, 어디선가 1명만 더 나타나면 '독수리 5형제'를 결성해도 되겠더군요. 그들은 불새가 되어서 어두운 하늘을 날으며 이 지구를, 아니 대한민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일개 검사인 하도야가 정권의 실세인 조배호(박근형)를 배짱 하나로 아주 쉽게 물먹이는 것을 볼 때부터 저는 불안했습니다. 아무리 허구지만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가진 것 없이도 원칙과 배짱만 내세워서 권력에 맞설 수 있고 나아가 승리할 수도 있는 세상, '대물' 속에 나오는 그 세상은 우리가 모르는 세상입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원래 서혜림은 산호그룹을 등에 업은 김현갑 후보에게 꼼짝없이 패배할 상황이었으나, 강태산(차인표)으로부터 그 사실을 전해 들은 대통령 백성민(이순재)이 나서서 산호그룹의 지원을 막는 바람에 겨우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또한 별로 현실감 있는 설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거기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진심을 담아 호소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오랫동안 간척지의 모기떼에 시달려 온 한 지역의 주민들에게는 충분히 어필할 수도 있겠다 싶었거든요. 어쨌든 그녀를 성원하던 사람들의 축하를 담뿍 받으며 서혜림은 마침내 정계에 입문하게 됩니다.

민우당 국회의원들의 회의 자리에서도 서혜림은 원칙주의자와 도덕군자의 면모를 과시합니다. 그녀는 진행자의 말 한 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손을 들며 "잠깐만요, 왜 그래야 하죠?" 라고 이의를 제기하는군요. "우리 국회의원들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당의 이익보다는 국민의 이익을 더 우선시해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국민이 뽑아 주어서 이 자리에 섰습니다. 당을 위한 거수기 노릇은 하고 싶지 않습니다." 역시 그녀의 말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습니다. 너무 완벽해서 '배달의 기수'를 보는 것 같습니다.


그런 설정이 왜 나쁘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할 말은 없습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그녀처럼 외롭고 용감한 싸움꾼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는 않으니까요. 그러나 드라마 상에서 표현된 것이라고 하기에, 서혜림의 행동은 너무나 직접적이고 단순했습니다. 원래 현실 속의 사건에는 기승전결도 없고 인과관계도 없는 경우가 더 많지만, 드라마 속의 사건에는 기승전결과 인과관계가 꼭 필요합니다. 모순이지만 그렇게 만들어야 더욱 현실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현실에서처럼 아무 낌새도 없이 갑자기 만나고 갑자기 헤어지고 뜬금없이 사랑한다면, 아무도 그 드라마를 보지 않을 거예요.

언제나 무작정 맨몸으로 부딪히는 서혜림과 하도야의 방식은 아무리 보아도 억지스럽습니다. 현실에서는 혼자 막무가내로 그래봐야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용인되고 있으니까 황당할 뿐입니다. 만약에, 만약에... 국회에 입성한 서혜림이 '어떤 사건'을 계기로 수십명 동료 의원들의 마음을 감복시키게 되었다든가 하는 에피소드가 하나라도 첨가되었다면 어땠을까요? 이를테면 모기가 난무하는 간척지 체험을 계기로 주민들의 신뢰를 얻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랬다면 국회 내에서도 일부나마 서혜림을 지지해 줄 토대가 마련된 셈이니, 회의장에서 그녀의 용감한 발언이 그렇게까지 뜬금없게 느껴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혜림은 독불장군처럼 홀로 불의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국회의원들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악의 무리'입니다. 어차피 그녀가 날리는 정의의 주먹에 나가떨어질 운명을 타고난 '파란해골 13호'입니다. 수백명에 달하는 악의 무리가 아무리 소리 높여 외치고 그녀를 규탄해 봤자, 초선의원 서혜림은 눈 하나도 깜박이지 않습니다. 아주 멋집니다.


민망함의 최고봉은 TV 연설이 끝난 후의 반응이었습니다. 먼저 고현정의 연기력을 잠시 언급한다면, 역시 대단하더군요. 서혜림의 '회초리 연설'에 감동받은 사람이 많은 모양인데, 솔직히 저는 그 내용만 보면 대략 식상하다고 느껴질 뿐이었습니다. 무슨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말 같기도 하고, 특별한 감동은 아니었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저는 그 연설을 듣다가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한 방울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고현정의 연기력 때문이었습니다. 고현정은 서혜림이라는 캐릭터에 완전 동화되어 있었고, 울먹이는 그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습니다. 말의 내용 자체는 그저 그랬으나, 그 목소리에 담긴 진심이 제 가슴을 울렸던 것입니다. 똑같은 악보에서 나오는 멜로디라도 혼신의 힘을 기울인 연주와, 대충 뱉어놓는 연주는 감동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고현정의 목소리를 음악처럼 들으며 감동의 눈물과 더불어 연설은 끝났습니다. 하도야와 왕실장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혜림을 아끼고 그녀의 편이 되었으니까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특정 다수의 모든 청중들이 일어나 박수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순간 제 눈에서는 눈물이 쏙 들어갔고 손발은 사정없이 오그라들었습니다.


이를테면 현실의 '100분 토론' 같은 프로그램이었는데, 한 사람이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며 부모가 어떻고 자식이 어떻다는 둥 온갖 비유를 들면서, 냉철한 이성적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아니고 눈물 콧물까지 흘려 가면서, 그렇게 긴 시간 동안 발언을 하도록 사회자가 제지하지 않았다는 것부터가 우선 말이 안되지요. 하긴 얼마 전에 종영한 '나는 전설이다'에서는 법정 증거자료를 제출하라고 했더니 생뚱맞게 신혼여행 비디오 테잎을 틀어 놓고는 전남편을 향해 수십분간 지나간 사랑을 들먹이며 눈물을 흘리는 원고도 있었지만 말입니다. 드라마가 다 그렇지 뭐, 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저는 굉장히 이상하게 느껴지더군요.

어찌어찌 해서 그 연설을 마쳤다고 한들, 미리 약속한 것도 아닌데 모든 청중이 일제히 기립박수를 친다는 것은... 그 민망함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요? 정치는 예술이 아닙니다. 그들은 한 자리에 앉아서도 저마다 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며, 아무리 올바르고 감동적인 연설을 들었다고 해도 그들의 마음은 절대 하나로 일치되지 않습니다.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 뿐만이 아닙니다. TV를 보고 있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권의 향방에 따라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해득실이 달라지는데, 도덕교과서에 나오는 듯한 원칙을 내세우며 눈물 콧물을 짜는 여성 국회의원의 짧은 연설을 들었다고 모두 하나같이 감동해서 눈물을 글썽이겠습니까? 

이러한 설정은 오직 국회의원을 비롯한 정치가들만을 '악의 무리'로 규정하고, 절대 다수의 국민과 청중들은 모두 '침묵하는 양심'으로 규정한 데서 비롯된 동화적 오류입니다. 서혜림은 국회 내에서 외톨이였지만, 일단 밖으로 나오면 모든 국민은 그녀의 편이었던 것입니다. 정의를 무기로 삼은 서혜림은 애써 지지기반을 마련할 필요도 없습니다. 개연성이고 뭐고 다 필요 없습니다. 이런 분위기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그녀는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쉽죠잉?


하여튼 저는 너무나 민망하고 오글거려서 더 이상은 이 드라마를 못 볼 것 같습니다. 마치 아주 어렸을 적에 극장에서 보던 반공 캠페인 같습니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성우들의 과장된 목소리로 울려퍼지던 전형적인 멘트들이 어렴풋이 기억나는군요. 이제 '대물'은 '올바른 정치'를 주제로 해서 만든 공익 캠페인일 뿐, 드라마라고 하기는 좀 어렵게 되어버리지 않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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