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압구정 백야' 백옥담의 두 얼굴, 더 독해진 임성한 월드 본문

드라마를 보다

'압구정 백야' 백옥담의 두 얼굴, 더 독해진 임성한 월드

빛무리~ 2015. 2. 13. 11:57
반응형



비난이든 뭐든 예전처럼 폭발적 반응을 일으키지는 못하고 있음에도 임성한 작가의 '압구정 백야'는 어김없이 연장이 결정되었다. 전작 '오로라 공주' 때는 하루가 멀다 하고 시끌시끌하긴 했지만 그만큼 대중적 관심이 높다는 증거였기에 30회 연장도 그러려니 했는데, 이번에는 밋밋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비슷하게 29회 연장을 결정했으니 아직도 MBC는 임성한 카드를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최근 황당스레 죽음을 맞이한 조나단(김민수) 때문에 임성한의 데스노트가 다시 화제를 일으켰다. 나 역시 개연성 없는 죽음으로써 등장인물을 너무 쉽게 하차시키는 임성한의 수법이 좋지 않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굳이 비난의 어조로 언급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루이틀의 문제도 아니고 어쩌면 이제 그 부분은 임성한 특유의 스타일로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입장에서도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인데, 새삼스레 충격과 상처를 받았다고 주장한다면 오히려 우스울 것이다. 


실제로 조나단 역의 김민수는 작가로부터 직접 하차 통보를 받았을 때 더 이상 출연하지 못한다는 것 때문에 섭섭하긴 했지만 스토리 진행상 불가피한 일임을 인정했기에 불만은 없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앞으로도 임성한 작가가 다시 불러준다면 언제든 그녀의 작품에 출연할 뜻이 있노라고도 말했다. 비록 허무하게 죽음으로써 하차했어도, 무명 배우의 인지도를 높여준 임성한 작가는 원수가 아니라 은인일 수밖에 없음을 증명한 셈이다. 



내가 '압구정 백야'에서 주목한 내용은 데스노트가 아니라 다른 쪽에 있었다. 임성한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인간 내면의 밑바닥에 자리잡고 있는 극도의 이기심을 그 어느 때보다도 적나라하게 보여주려 작심한 모양이다. '압구정 백야'의 세상 속에 진심으로 믿을 인간이라고는 아무도 없다. 가족처럼 지내던 사람들도, 학창시절부터 분신처럼 지내오던 친구도, 어느 날 갑자기 닥쳐 온 불행 앞에서는 철저한 남일 뿐이다. 


심지어 진짜 가족도 예외는 아니다. 아무리 악역이라고 해도 자식들을 향한 서은하(이보희)의 무정함에는 소름이 돋을 지경이다. 비록 자기 속으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어쨌든 20여년 동안 옆에 끼고 키웠던 아들인데, 조나단의 죽음 앞에서 가장 먼저 냉정을 회복한 사람은 엄마인 서은하였다. 맹장수술 후 방귀를 뀌는 장면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대사가 기막히다. "이건 하늘의 뜻이야. 야야를 우리 집에 못 들어오게 하려고!" 라든가 "부모보다 먼저 간 자식은 자식 아냐, 웬수지!" 라는 독백을 들으면 과연 그녀가 인간인지를 의심하게 된다. 



'먼저 간 자식' 중에는 조나단뿐만 아니라 백영준(심형탁)도 포함된 것으로 봐야 한다. 친자식이든 의붓자식이든 먼저 간 자식은 깨끗이 잊고 제 삶이나 살겠다는 뜻이다. 그나마 살아있는 자식에게는 좀 다를까 했지만, 조나단이 벌어 놓은 재산을 모두 백야(박하나)에게 주겠다는 조장훈의 말에 발끈하는 것을 보니 역시 모정보다는 제 욕심이 우선이다. 거듭된 불행에도 마음을 비우지 못하고 생모를 향한 복수심만 바득바득 불태우며 남편 없는 시집살이를 자청한 백야도 섬뜩하지만, 모전여전이라 둘 다 똑같을 뿐이다. 


백야를 향한 사랑을 뒤늦게 공표하며 결혼하겠다고 나선 장화엄(강은탁)은 그 우유부단함 때문에 아직까지 별 매력을 발산하지 못하고 있지만, 아무튼 불행에 빠진 백야를 외면하지 않고 끌어안으려 한다는 것만으로도 거의 유일하게 진실한 캐릭터로 보인다. 그런데 백야를 한가족처럼 대해주던 대해그룹 사람들이 단 한 명도 빠짐없이 장화엄과 백야의 결혼을 반대한다는 사실은 좀 뜻밖이다. 백야가 조나단과 결혼식까지 올린 후 생과부 처지가 되었으니 부모와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겠지만, 단지 백야를 형수라고 부르기 싫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동생 장무엄(송원근)의 반응은 당혹스럽다.



 

장무엄은 백야의 단짝친구인 육선지(백옥담)와 결혼을 앞두고 있다. 솔직히 홀어머니 슬하에 집안도 보잘것없는 육선지가 아무런 반대에 부딪히지 않고 대해그룹의 막내며느리로 받아들여진 것이 뜻밖이긴 햇다. 유명 화가 육선중(이주현)의 여동생이라는 점 때문에 플러스 요인이 되었던 걸까? 아무튼 그렇게 편견없고 욕심없고 따뜻한 사람들도 천애고아에 생과부 신세인 백야를 맏며느리로 받아들일 의사는 전혀 없는 형편인데, 이 와중에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명색이 절친이라는 육선지의 반응이다. 


중학 시절 왕따를 당해 죽음의 위기까지 몰렸던 육선지를 백야가 구해 준 이후로 백야와 육선지는 단짝이 되었다. 친자매보다도 가깝게 붙어다니는 그 둘은 마치 샴쌍둥이 같았다. 갈 곳 없어진 백야의 올케 김효경(금단비)를 오빠 육선중의 화실에 공짜로 머물 수 있게 해 준 사람도 육선지였다. 엄마 오달란(김영란)은 천금같은 아들 육선중이 예쁜 과부 김효경과 한 공간에 있다가 말썽이 생길까봐 극구 반대했지만, 육선지는 자기 생명을 구해 준 백야에게 그 정도도 해줄 수 없느냐며 엄마와 맞섰던 것이다. 


그토록 친구 백야를 끔찍히 생각하던 육선지였는데, 결혼 문제를 앞두고서야 적나라하게 내보인 진심은 그야말로 소름이 끼쳤다. 가엾은 백야가 정말 행복해지기를 바란다면 장화엄과의 결혼을 반대할 이유가 없건만, 단지 친구를 형님이라 부르며 손윗동서 대접하기가 거북하다는 이유로 실쭉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도대체 그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리 단순치가 않다. 이제껏 친구의 이름으로 백야에게 친절을 베풀면서도 육선지의 마음속에는 일종의 우월감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다.  



"천애고아인 너보다야 그래도 내가 낫지!" 그런 생각으로 한 계단쯤 내려다보던 사이인데, 백야가 장화엄과 결혼하면 서로의 위치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손윗동서 대접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대해그룹의 후계 구도에서도 육선지는 백야와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다. 장화엄은 장남인데다가 능력을 인정받는 PD이고, 장무엄은 그런 형 밑에서 잔심부름이나 하며 놀러만 다니던 막내아들이기 때문이다. 영락없이 두 계단쯤은 올려다보게 생겼으니, 배알이 뒤틀린 육선지는 마구 어깃장을 놓기 시작한다.


자기 엄마 앞에서 그토록 백야를 편들던 육선지가 180도 달라졌다. 이제는 엄마와 한통속이 되어 백야의 뒷담화를 한다. "선지 : 예비 시주(시아주버니)가 글쎄 야야를 좋아한대. / 달란 : 어머, 말도 안 돼. 그 부모들 어떡해? ...너한테는 어떻게 되는 거야? 잘 된 거야? / 선지 : 뭐가 잘 돼? 야야가 내 손윗동서로 들어오면 서로 불편하지. / 달란 : 형님 대접 해야 되고! 어우, 증말 걱정일세... 아니 장안에 내노라 하는 집안 딸들 맘대로 고르겠구만 집도 절도 없는 고아... / 선지 : 거기다 이젠 과부! / 달란 : 대해그룹 장남이 면사포 썼던 과부랑 결혼을 하겠다니 상상이나 했겠어?" 


사랑은 붉은색이라 바래기 쉽고, 순결은 흰색이라 더럽혀지기 쉽지만, 우정은 무색이라 영원하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친구는 마땅히 그런 존재라야 한다. 상황에 따라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마음을 어찌 우정이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갈수록 삭막해지는 세상 속에서, 어느 덧 진정한 우정은 씨가 말라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요즘 사람들에게 있어 우정의 의미란 백야를 대하는 육선지의 마음 - 이기심을 기반으로 자라났기에 하찮은 질투심조차도 이겨낼 수 없을 만큼 허약한 - 처럼 꼭 그 정도 수준인지도 모르겠다. 



결혼식을 올리자마자 과부가 되어버린 백야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사람은 올케 효경과 운명의 연인 장화엄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백야의 박복함에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 불행이 자신들의 것이 아니라 남의 것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장화엄의 부모는 백야를 며느리로 맞이하면 그 박복함이 아들에게까지 전염될까봐 몸서리를 친다. 비정한 생모는 자식의 죽음 앞에서도 돈이 우선이고, 하나뿐인 친구는 혹시라도 백야가 자신의 윗자리에 서게 될까봐 경계하며 그 와중에도 달콤한 자기 행복에 빠져 있다. 


임성한의 세상은 한층 더 독해졌다. 전작들에서도 언제나 인간 심리의 밑바닥을 보여주곤 했지만, 허울좋은 우정의 얄팍한 속내까지 이토록 가차없이 파헤치는 작품은 처음이다. 그런데 이건 상당히 현실적으로 느껴져서 꽤 아프다. 다른 황당한 설정들은 그저 드라마인가보다 하며 스쳐지나겠는데, 육선지의 두 얼굴은 마치 내가 믿고 있던 친구의 속내를 보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한편으로는 만약 내가 육선지라면 그녀와 다른 반응을 보인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을 던져준다. 인간의 삭막한 내면을 너무 적나라하게 들여다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다. 넘치는 막장 속에서도 임성한의 드라마가 유난히 거센 비난에 휩싸이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반응형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