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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나거나 미치거나' 가혹한 운명 속에 스며드는 사랑의 빛 본문

드라마를 보다

'빛나거나 미치거나' 가혹한 운명 속에 스며드는 사랑의 빛

빛무리~ 2015. 2. 12.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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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고운 작가의 원작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빛나거나 미치거나' (이하 '빛미') 라는 제목이 고려 제4대 임금 광종에게서 비롯된 것임은 알고 있다. 현재 '빛미'에서 장혁이 열연하고 있는 남주인공 캐릭터 '왕소'가 바로 훗날의 광종이다. 광종은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도 시행 및 관복 제정 등 여러가지 빛나는 업적을 세웠으나, 재위 중반부터 시작된 공신과 왕실에 대한 피의 숙청으로 인해 성군(聖君)보다는 오히려 광기(狂氣)의 왕이라 평가되곤 한다. 



960년부터 975년 광종이 죽기 직전까지 무려 15년 동안이나 이어진 피의 숙청은 많은 폐단을 낳았다. 노비가 주인을 고발하고 아들이 아비를 참소하는 등 온갖  참소와 무고가 난무했으며, 감옥은 턱없이 모자라고 죄없이 살육당하는 자가 꼬리를 물었다. 숙청의 손길은 왕실 내부에까지 번져 광종은 선왕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을 무참히 살해했고, 말년에는 자신의 아내인 대목왕후와 외아들 왕주(훗날의 경종)마저 의심의 눈초리로 보았다고 한다. 


이처럼 잔혹한 측면에 집중한다면 광종은 말 그대로 미친 왕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국가가 세워진 후에는 반드시 그 뒷수습을 맡아 할 수성(守成)의 군주가 필요했다.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운 개국공신들의 세력은, 건국 이전까지는 한편이었으나 건국 이후에는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가 된다. 따라서 왕권을 확립하고 나라를 안정시키기 위해서는 공신 세력을 제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제2대 혜종과 제3대 정종이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비참하게 죽어간 이유도 개국공신 및 호족들의 강력한 힘을 제어하지 못할 만큼 취약한 왕권 때문이었다. 두 형의 최후를 지켜본 광종으로서는 그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수성의 군주가 되기를 자청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광종은 준수한 외모에 영리하고 부드러우면서도 기회 포착력이 강한 외유내강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인물이 스스로 악역을 자청하여 피에 물든 살인마가 되기까지, 그 마음속의 고뇌가 얼마나 거세게 소용돌이쳤으랴! '빛나거나 미치거나'는 이 비극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선택하여, 가혹한 역사의 운명 속에서도 애틋한 사랑이 있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제법 그럴듯하게 풀어내고 있다. 여주인공 신율(오연서)은 가상 인물로서 멸망한 발해의 마지막 공주로 설정되었는데, 실존 인물인 왕소의 앞날이 이미 결정되어 있으니 그들의 사랑이 해피엔딩을 맞이하기는 아마도 어렵지 않을까 싶다. 


신율의 비극적 운명은 그녀의 유모인 백묘(김선영)과의 대화에서 극명히 예고된다. 8회에서 왕소는 공신 세력의 수장인 왕식렴(이덕화)의 자객과 맞붙어 싸우다 칼에 맞아 중상을 입는다.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곁에 있던 신율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신율은 죽어가는 왕소를 살리기 위해 만병초(萬病草)를 씹어 그 즙을 왕소의 입에 넣어준다. 만병초는 만병에 특효약이라 할만큼 염증 치료에 효과적이지만, 잎 뒷면에는 독성이 있어 오랫동안 냉독(冷毒)에 시달려 온 신율에게는 치명적일 수도 있는 것이었다.



 

왕소의 목숨을 구하고 상단으로 돌아온 신율은 곧바로 혼절하여 심하게 앓아 눕는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 곁을 지키던 백묘는 신율이 정신을 차리자 그녀에게 말한다. "아가씨, 내가 그 놈을 왜 미워하는 줄 아세요? 아가씨 몸 속에 냉독 있는 거 아시잖아요. 그 냉독을 품고 겨우겨우 이렇게 살고 있는데... 아가씨 그 놈만 만나고 오면, 자갈밭에 짚신 닳는 것마냥 아가씨 목숨이 닳잖아요!" 백묘의 대사가 매우 의미심장하다. 자갈밭에 짚신이 닳는 것처럼, 왕소를 만날 때마다 신율의 목숨은 그렇게 조금씩 닳아 없어지는 것이다. 


"안 보면 보고 싶고, 눈앞에 있으면 가슴이 뛰고, 내가 대신 아파서라도 고쳐주고 싶은 걸 어떡해... 나 걱정돼. 그 사람이 걱정돼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아!" 친엄마같은 백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미 눈먼 사랑에 빠진 신율은 그렇게 슬픈 운명 속으로 한 발짝씩 걸어 들어간다. 파군성(破軍星)을 사랑하게 된 자미성(紫微星)의 운명이란 원래 이런 것일까? 



또 하나의 자미성인 황보여원(이하늬, 대목왕후)의 앞날도 어딘가 순탄치 않아 보인다. 남동생 왕욱(임주환)을 왕위에 올리기까지 적당히 이용하려던 남편 왕소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예정에 없던 사랑 때문에 그녀의 행보가 비틀어지기 시작한다. 


"형님이 황자 격투대회에 참가하든 말든, 살든 죽든 이젠 상관없습니다!" 신율을 짝사랑하는 왕욱은 노골적으로 왕소를 적대시한다. 권력 자체에는 욕심이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혹은 소유하기) 위해서라면, 치열한 권력 다툼을 불사하더라도 왕위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열정적인 사내다. 권력 다툼에서도 사랑 싸움에서도 강력한 적수로 자리잡은 왕소의 존재는 당연히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연히 자기 편을 들어줄 줄 알았던 누나 여원이 다른 소리를 한다. "난 상관있다. 그 사람이 왕집정의 약점을 쥐고 있는 것이 분명해진 이상, 난 그 사람을 내 손안에 넣어야겠구나!" 



왕식렴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라는 핑계는 그저 변명일 뿐이다. 어느 덧 사랑에 빠진 황보여원은 왕소라는 남자를 갖고 싶어진 것이다. 허울뿐인 남편이 아니라 진짜 남편으로 소유하고 싶어진 것이다. 하지만 고려 태조의 왕녀로서 가장 강력한 호족 가문을 외가로 두고 금지옥엽 자라난 황보여원의 운명도 몰락한 발해의 공주 신율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 남편은 그녀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을 것이고, 훗날 그녀의 친정은 피비린내 나는 숙청에 풍비박산이 되고 말 것이다. 심지어 친아들까지도 의심의 광기어린 눈초리로 바라보는 남편의 서슬 앞에 숨죽이며 살다가 세상을 떠나야 할 것이다. 


"그 사람과 함께 있었구나... 그 사람을 치료해 준 이가 너였어!" 가혹한 운명은 이미 결정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속절없이 스며드는 사랑은 처연한 빛을 발한다. 자나깨나 왕소의 안위를 걱정하는 신율의 눈물도, 그녀를 질투하는 여원의 서늘한 눈빛도 그저 서글프게만 느껴진다. 왕소의 호통과 너털웃음 한 번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게 될 그녀들의 인생이 애틋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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