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꽃보다 할배' 스페인편 최고의 재미를 선사한 엽기 일식집 본문
여행의 진짜 재미는 거창한 계획보다 작은 우연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유명한 가우디의 건축물을 관람하고 세비야 성당을 방문하고 콜럼버스의 묘를 구경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는 추억은 엉터리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속아 스페인의 골목 골목을 누비던 일일지도 모른다. 끝없이 좌회전과 우회전을 반복해서 외쳐대는 내비게이션의 낭랑한(or 뻔뻔한) 목소리는 점점 멘붕 상태가 되어가는 이서진의 표정과 시너지 효과를 일으키며 폭소를 선사했다. 이순재 할배가 혼자 길 찾느라 고생할 때는 몹시 걱정되고 속이 상했는데, 젊은 이서진의 생고생은 아주 맘 편히 감상할만한 꿀재미였다.
스페인의 전통 예술 플라멩코는 매우 열정적인 공연이었다. 집시들의 한이 담겨있는 춤과 노래와 기타연주라는데, 나의 개인적 취향에는 좀 별로였지만 강렬한 개성을 지닌 예술임에는 분명해 보였다. 한(恨)이라면 우리 한국인 특유의 정서이기도 한데, 스페인 집시들이 한을 내뿜는 방식은 우리의 그것과는 사뭇 달랐다. 한을 토해내면서도 은은한 절제의 미가 돋보이는 우리의 민요와 달리, 스페인의 플라멩코는 매우 요란하고 공격적이라 흡사 전쟁 속의 절규를 연상케 했다. 오죽하면 할배들이 무서울 지경이라고 혀를 내둘렀겠는가! 각종 예술을 접할 때 슬픔의 정서를 느껴본 적은 많았지만, 두려움의 정서를 느껴보기는 처음이라 생소했다.
세비야 성당은 전세계에서 3번째로 큰 성당이라고 했다. 그런데 가톨릭 신자로서 나의 감흥은 의외로 크지 않았다. 외적인 크기와 모양새는 훌륭할지 몰라도, 내적으로는 그만큼 충실해 보이지 않았다. 하느님을 섬기고 신자들을 감싸안는 본연의 목적으로 세워진 성당이 아니라, 오히려 외부인들에게 보여주고 자랑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일반 건축물의 느낌이 강했다. 특히 그 대성당 안에 떡하니 자리잡은 콜럼버스의 묘는 참 기막히도록 생뚱맞은 것이었다. 콜럼버스는 유명한 탐험가였을 뿐 성인도 성직자도 아니었고, 더욱이 임종의 순간까지도 가슴 속 원망과 미움을 내려놓지 못해 "죽어서도 스페인 땅을 밟지 않겠다"며 악에 받친 유언을 남긴 인물이었다. 도대체 그런 인물의 유해가 왜 스페인 성당의 내부에 안치되어 있어야 한단 말인가!
콜럼버스의 유언을 존중하고 싶었다면 유해를 스페인으로 옮겨오지 말았어야지, 머나먼 아메리카 대륙에 있던 그의 유해를 덥석 옮겨다가는 공중에 둥둥 띄워 놓고 "어쨌든 땅을 밟지 않게 했으니 유언을 지켰다"고 주장하는 건 또 뭔가? 콜럼버스의 관을 받쳐들고 있는 네 개의 조각상은 네 명의 스페인 왕을 뜻하는데, 콜럼버스의 탐험을 지원해 주었던 두 명의 왕은 당당히 고개를 쳐들고 있으며, 지원해 주지 않았던 두 명의 왕은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었다. 이거야 원 콜럼버스를 신격화하는 것도 아니고, 하필 성당 안에 그토록 이상한 구조물이 있다는 건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들은 콜럼버스의 유명세를 빌어서라도 세비야 성당을 세계에 널리 알려 유명 관광지로 만들고 싶었던 걸까? 하지만 이 모든 어색함과 부조화는 당최 어쩌라고? 더욱이 콜럼버스는 스페인 사람도 아니고 이탈리아 사람이었다는데.
할배들과 제작진의 합의에 따라 스페인 여행 중 하루는 100% 자유 일정으로 꾸며졌다. 그래서 이순재, 신구, 박근형이 세비야 성당을 관람하는 동안 백일섭은 홀로 숙소 주변의 풍경을 즐기며 유유자적하고 있었다. 물론 이서진과 나영석 PD는 세 명의 할배 팀을 따라갔고, 백일섭의 곁에는 소수의 VJ와 스태프만이 남았다. 좀 더 적극적인 자세로 여행을 즐기지 않는 백일섭을 보며 제작진이 물었다. "백일섭 선생님은 왜 여행을 가는지 모르겠다는 시청자 의견이 있던데요?" 그러자 백일섭은 웃으며 말했다. "나는 내 나름대로 즐거운 여행을 했다고 봐!" 그의 말이 백 번 옳다. 인생의 모습이 제각각이듯 여행의 모습도 제각각인 것이 당연한데, 모두 똑같은 자세로 유명한 장소를 하나라도 더 구경하겠다며 기를 쓰고 돌아다녀야 할 이유는 또 무엇인가?
잠시 후 백일섭의 나 홀로 배낭여행에서는 '꽃보다 할배'를 통틀어 내가 가장 요절복통했던 일식집 에피소드가 펼쳐졌다. 서양을 여행하면서도 언제나 한식을 고집하던 백일섭은 숙소 주변에 한식당이나 중식당이 없음을 알고 실망하는데, 이서진은 그를 위로하며 가까운 곳에 일식당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초밥이나 우동 같은 것은 드실 수 있을 거예요." 그러자 백일섭은 "좋지!" 하면서 기분좋게 웃었다. 세 명의 할배들과 이서진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러 떠난 후에도 한참이나 느긋하게 앉아 있던 백일섭은 산책하듯 슬슬 거리로 나섰는데, 적잖이 헤맨 끝에 발견한 일식당의 모양새가 심상치 않았다.
간판을 보고 반갑게 들어서니 줄줄이 늘어선 와인병들이 먼저 보인다. 한 눈에도 별로 일식집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안쪽에서 노닥이던 세 명의 직원들은 갑자기 카메라를 대동하고 들이닥치는 동양인들을 보더니 소스라치게 놀란다. 명색이 일식당을 차려 놓았지만 그들은 한 번도 동양인 손님을 받아 본 적이 없었고, 심지어 할 줄 아는 일본 요리조차 몇 가지 안 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 한 명은 망신당할까봐 두려웠던지 황급히 자리를 피하며 남아있는 직원들에게 거듭 "조심해!" 라고 당부했다. 스페인어로 쓰여진 메뉴판을 읽을 수 없던 백일섭이 "익스큐즈미~" 하고 부르자, 쭈뼛거리며 웨이터가 다가왔다. 백일섭이 "데리야키, 오케이?" 하고 묻자 그는 주방 쪽에 대고 외쳤다. "데리야키 만들어 본 적 있어?"
주방장의 대답이 부정적이었던지 웨이터는 냉큼 백일섭에게 답변했다. "데리야키, 노!" 실망한 백일섭은 몇 종류의 초밥이 완성된 상태로 부페처럼 진열된 곳에 다가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주문을 한다. 그런데 초밥에 생뚱맞은 딸기가 얹혀져 있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국수의 일종인 야키소바가 되는지를 묻자 망설이던 주방장은 간신히 오케이 사인을 던지고, 백일섭은 자리에 앉아 식사를 기다린다. 웨이터가 다가와 간장부터 따라 주는데, 큼직한 그릇에 가득 담긴 간장은 마치 머그잔에 담긴 블랙커피처럼 보인다. 백일섭과 제작진은 어이가 없어 피식 웃는데, 웨이터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방장에게 자랑을 한다. "저것 봐. 좋아하잖아!"
잔뜩 긴장했던 웨이터는 어느 순간부터 무척 즐거워진 듯, 초밥 세트를 들고 나오며 카메라 앞에서 포즈까지 취한다. 처음으로 맞이한 동양인 손님을 멋지게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에 점점 더 신이 나는 모양이다. 초밥 한 개를 입에 넣은 백일섭은 그래도 대충 먹을만 하다며 큭큭 웃는데, 자신감 충만한 웨이터는 "맛있어요?" 라고 먼저 다가와 묻기까지 한다. 대충 맛있다고 얼버무리며 야키소바를 기다리는데, 주방장 필생의 역작은 좀처럼 나오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 만들어 보는 음식인 듯, 정성껏 오렌지 데코레이션까지 하며 심혈을 기울인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 끝에 완성되어 나온 야키소바는 지나치게 짜고 맛이 없었다. "짜!" 백일섭이 외쳤다. 그러나 무슨 말인지 알 턱 없는 웨이터는 싱글벙글 웃으며 "좋다고요?" 되물었다.
동양인을 보고 당황하는 종업원들의 리얼한 반응이며, 어설프지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며, 근거 없는 자신감에 부풀어 으쓱거리는 모습들은 말할 수 없이 유쾌한 볼거리였다. 제작진 측에도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현지 통역사가 있었던 모양인데, 듣거나 말거나 자기네끼리 신나게 쑥덕거리는 대화들은 또 얼마나 우스웠던지! (자막 중에는 제작진이 추측으로 끼워넣은 내용도 좀 섞여 있었던 듯하지만) 백일섭과 제작진의 웃음이 100% 긍정적인 뜻은 아니었지만, 냅다 긍정적으로 해석하며 좋아하는 그들의 모습은 굉장히 귀여웠다. 특히 초밥 접시를 들고 모델 포즈까지 취하던 웨이터의 의기양양한 미소는 좀처럼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 스페인에서 마주친 또 하나의 인연이 가슴에 새겨지는데...
만약 백일섭이 한 발 늦추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지 않았더라면 어찌 이와 같은 체험이 가능했으랴! 기왕지사 먼 곳까지 발걸음을 했으니 촉박한 일정 중에 하나라도 더 보고 싶은 것은 인지상정이라 하겠으나, 무조건 발길을 급하게 서두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님을 백일섭은 알려 주었다. 남들에게 사진이나 보여주며 자랑하기 위해서는 유명 관광지의 화려함이 필수겠으나, 여행의 정말 소중한 추억은 마음 속에 담겨지는 것 아니겠는가? 세상 어느 곳에서든 인간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면, 그거야말로 여행의 가장 귀한 선물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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