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사남일녀' 김우빈, 엄마 손을 꼭 잡고 글썽이던 눈빛 본문
'사남일녀'라는 프로그램은 어찌 된 셈인지 초반부터 제목과 어긋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 1~4회까지는 명실상부 '4남1녀'였으나 게스트가 초대된 5회 이후부터는 '4남2녀' 또는 '5남1녀'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기획 단계부터 이렇게 할 생각이었다면 제목을 '사남일녀'라고 지어서는 안 되는 거 아니었을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제목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게 되면서부터 신뢰를 잃었다. 프로그램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고 기존 멤버들의 캐릭터가 명확해질 때까지 기다려서 간헐적으로 게스트를 활용했다면 이렇지는 않았을텐데, 시청률이 기대했던 수준에 못 미쳐서 마음이 급했던지 너무 일찍부터 게스트 카드를 꺼내는 바람에 정체성을 포기한 셈이 되고 만 것이다. '막내동생' 컨셉의 젊은 게스트가 매 회마다 빠짐없이 등장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사남일녀'는 결코 '사남일녀'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첫번째 막내 동생은 걸그룹 에이핑크의 멤버 정은지였고, 두번째 막내동생은 출중한 가창력의 개그우먼 신보라였다. 막내 여동생들이 등장하면서 홍일점이자 원래 막내딸이었던 이하늬는 자연스레 '큰딸' 컨셉으로 변경되었다. 기존 멤버의 캐릭터가 자리를 잡기도 전에 균형을 무너뜨리는 중구난방식의 이런 진행이 나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막내딸' 컨셉으로 등장한 게스트가 어떤 활약을 보여줄 것인지는 그냥 안 봐도 훤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내가 아직은 늦둥이 막내딸의 애교를 보면서 즐거워할 만큼의 연배가 못 되어선지 별로 끌리지도 않았다. 그런데 한참이나 안 보던 이 프로그램에 갑자기 채널을 맞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정은지와 신보라에 이어 세번째로 섭외된 게스트는 배우 김우빈이다. 이번에는 애교쟁이 막내딸이 아니라, 눈썹 시커멓고 키가 멀대같은 막내아들이다.
아무리 봐도 막내보다는 장남의 이미지인데, 썩 어울리지 않을 듯한 그 포지션을 김우빈이 어떻게 소화해낼지 궁금해졌다. 내가 김우빈을 처음 본 것은 8부작 드라마 스페셜 '화이트 크리스마스'에서였다. 가뜩이나 강렬한 비주얼에 머리까지 빨갛게 염색하고 '미친 강미르'를 연기하던 그 모습은 잊혀지지 않을 만큼 충격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 이후 김우빈은 '신사의 품격'에서 김하늘의 제자로, '학교 2013'에서 장나라의 제자로, '상속자들'에서 임주은의 제자로 등장했는데 모두 불량기 가득한 고등학생 캐릭터였다. 연기 스펙트럼을 넓힐 수 있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기에, 따지고 보면 결코 운이 좋았다고는 볼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최고의 캐릭터 '박수하'를 거머쥐며 단숨에 하늘로 비상한 절친 이종석과 비교해도 현저히 억울한 케이스다.
하지만 천편일률적인 캐릭터를 연기하면서도 김우빈은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았다. 매 순간마다 자신이 맡은 배역에 진심으로 몰입하는 그의 연기는 이상할 만큼 진한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학교 2013'을 보았던 사람들이라면, 왜 누명을 쓰고도 한 마디 항의조차 못 한 채 끌려가느냐고 붙잡는 이종석에게 "내가 막 살았으니까!" 라고 외치며 절규하던 김우빈의 핏발 선 눈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고작 열 여덟 나이에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그토록 깊은 회한에 잠기다니, 평소에는 거의 공감할 수 없었던 빗나간 청소년들의 내면적 고통이 김우빈의 연기를 보는 순간 뼈져리게 느껴졌다. "너는 왜 꼭 이런데서 자냐? 지켜주고 싶게..." 편의점 앞 테이블에 엎드려 잠든 박신혜를 보며 중얼거리던 김우빈의 모습을 '상속자들'의 시청자였다면 모두 기억할 것이다. 오글거리는 대사를 전혀 느끼하지 않게 짜릿한 설렘으로 표현해내던 김우빈의 능력은 참 대단했다.
본의 아니게도 일진 고교생의 테두리에 갇혀 있던 26세의 청년 김우빈에게 어쩌면 '사남일녀'는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캐릭터로, 그 동안 꽁꽁 감춰져 있던 '사람 김우빈'의 진짜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였을 것이다. 날카로운 외모와 달리 굉장히 친절하고 따뜻한 사람이라며 이곳 저곳에서 소문이 들려오긴 했지만, 실제로 보고 듣지 않고서야 어찌 실감할 수 있을까? 일전 '해피투게더'에 출연한 홍석천이 전화를 걸었을 때 바쁜 일정 중에도 흔쾌히 받아주며, MC들의 짖궂은 장난과 막무가내식 출연 요청에도 일일이 자상하게 응하던 김우빈의 목소리에는 듣기만 해도 기분이 좋아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평소 안 보던 '사남일녀'에 채널을 맞춘 이유는 그런 김우빈을 보기 위해서였다.
김우빈과 '신사의 품격'을 함께 촬영해서 친분이 있던 김민종을 필두로 이하늬, 김재원, 서장훈, 김구라까지 차례차례 춘천행 기차에 오르며 '오남일녀'(?)의 일정이 시작되었다. 낯선 멤버들을 만나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하는 김우빈의 모습은 약간 내성적인 듯하지만 어색함 없이 자연스러웠다. 시골 집에 도착하니 4박5일 동안 엄마 아빠로 모시게 될 부모님이 자그마한 체격에 주름진 얼굴로 등장하신다. 평생 손발이 닳도록 얼마나 일을 하셨던지, 어머니의 엄지 손가락은 부르트고 갈라져 있었다. 상처가 있으면 자꾸 만지게 되는 인간의 습성에 따라 어머니는 계속 엄지 손가락을 돌리며 통증을 자각하고 계셨는데, 피가 섞이지는 않았어도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 가슴 안 아픈 자식이 누가 있었으랴!
첫 인사를 나누고 집 안으로 들어가 방을 보여주실 때도 어머니는 습관처럼 손가락을 돌리시는데, 마침 곁에 서 있던 김우빈은 안타까이 바라보다가 어머니의 손을 꼬옥 잡았다. 메마르고 갈라진 엄마의 한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포옥 감싼 채 얼굴을 드는데, 얼핏 두 눈에는 글썽하게 눈물이 고인 듯했다. 어떻게든 아픔을 덜어드리고 싶지만 손 잡는 것 외에는 당장 해드릴 수 있는 게 없어서 슬펐던 걸까? 그 깊은 눈빛을 보는데 갑자기 내 눈에서도 눈물이 쏟아졌다. 말하지 않아도 전달되는 김우빈의 진심이 나를 울리고 말았던 것이다.
엄마 아빠가 평생토록 해 오셨다는 '올챙이 국수' 만드는 일은 퍽이나 힘든 노동이었다. 요즘 같은 인스턴트 시대에 아직도 이렇게 우직한 방법으로 음식을 만드는 분들이 계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오남일녀는 제각각 최선을 다해 부모님을 도왔고, 특히 김우빈은 막내답지 않은 듬직함과 묵묵함으로 큰 역할을 담당했다. 막내가 일을 잘한다면서 엄마의 주름진 얼굴에도 함박웃음이 떠올랐고, '뽀얀 악마' 김재원은 우빈이가 오니까 자기가 할 일이 없다면서 장난스레 투덜거렸다. 손짓만으로도 엄마의 아픔을 알아차리고 진심으로 따스하게 손 잡아 주던 막내아들 우빈이가 엄마의 기억 속에는 아주 오랫동안 남아있게 될 것이고, 나 역시 글썽이던 그 눈빛을 아주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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