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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보다 할배' 이순재의 생고생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꽃보다 할배' 이순재의 생고생이 정말 재미있었다고?

빛무리~ 2014. 3. 9.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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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7일에 방송된 '꽃보다 할배-스페인' 제1편의 반응이 나쁘지 않다. 독해진 나영석 PD 때문에 더욱 재미있어졌다는 의견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이건... 나로서는 참 놀랍기 그지없는 시청자 반응이다. 물론 나도 '1박2일-시즌1'을 시청할 때는 제작진과의 기싸움(또는 게임)에서 패배한 멤버들이 지독히 골탕을 먹거나 생고생하는 모습을 보며 재미있어 했다. '1박2일' 멤버들은 모두 혈기왕성한 젊은이들이었으니 하루쯤 쫄쫄 굶는다 해서, 한겨울에 텐트치고 야외취침쯤 한다 해서 크게 걱정할 일도 없었다. 특히 비빔밥 한 숟가락 얻어 먹겠다고 혈안이 되어 좌충우돌하던 강호동의 모습은 달콤한 꿀재미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꽃보다 할배'를 시청하면서 가장 큰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H4 어르신들이 객지에서 고생하는 모습을 볼 때가 아니라, 한껏 기분좋게 여행을 즐기는 모습을 볼 때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최소한 나는 그러했다.

 

 

하지만 '파리-스위스' 편과 '대만' 편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다시 꽃할배들을 모시고 세번째 여행을 떠나게 된 나영석 PD는 생각이 좀 다른 듯했다. 예능의 재미는 역시 멤버들을 골탕먹이고 고생시키는 데서 온다는 '1박2일'에서의 철칙을 드디어 '꽃할배'에도 적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출연자들의 연령이 조금(??) 높기는 하지만 워낙에 체력들이 좋으시니 웬만한 고생쯤은 너끈히 감당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생각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니다. 연세 많은 어르신들이라 해서 최고급 숙소와 푸짐한 식사와 리무진을 제공하며 마냥 편안하게 모신다면 그런 여행은 또 무슨 재미가 있을 것인가? 우리의 꽃할배들은 비좁은 숙소와 소박한 식사에도 만족했고, 붐비는 대중교통과 두 다리를 이용해서 외국의 낯선 거리를 신나게 돌아다녔다. 때때로 백일섭 할배가 무릎이 아프다고 칭얼거리긴 했지만 그 정도는 맘 편히 볼 수 있는 애교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좀 사정이 달랐다. 대뜸 '중급 배낭여행'을 선포한 나PD는 멤버들에게 지급할 여행 경비부터 대폭 삭감했다. 그러자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단호한 거부 의사를 밝히며 정색함으로써 나PD를 움찔하게 만들었지만, 큰형 이순재는 말없이 웃고만 있었다. 이순재가 나PD의 타깃이 되어버린 이유는 그 너그러운 미소 때문이었다. 인천공항에서 이순재를 따로이 불러낸 나PD는 다짜고짜 그에게 삭감된 경비를 전달하고, 차후 그에 관해 어떠한 항의도 하지 않겠다는 계약서(?)까지 내밀며 사인을 요구했다. 설마 음흉한 꿍꿍이가 있을 줄이야, 81세의 자신을 상대로 속임수를 썼을 줄이야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연기 경력은 반백년을 넘겼어도 리얼 예능에서는 한없이 순박한 이순재 옹이었다. 엉겁결에 사인을 해버린 이순재는 그 후 동생들을 이끌고 힘든 여행을 하게 된다.

 

 

사실 이순재가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계약서에 사인하며 돈봉투를 받아 든 것은 모두 이서진이 도착하면 그에게 넘겨줄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서진이가 다 알아서 하겠지' 하면서 맘 놓고 있던 이순재에게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서진이 스케줄 때문에 하루 늦게 합류한다는 것이었다. 짐꾼이자 가이드로서 여행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이서진의 부재는 그야말로 결정타였다. 꼼짝없이 여행 첫날은 H4의 능력만으로 환전을 하고 티켓팅을 하고 밥을 사먹고 숙소를 찾아가야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상황은 전적으로 나PD 각본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으니, 이번 여행에서 H4를 제대로 골탕먹이려(?) 작정한 나PD는 뻔히 스케줄 되는 이서진을 일부러 하루 늦게 합류하도록 계획했던 것이다. 결국 하루 동안 이서진을 대신할 가이드의 책임은 확인 없이 돈 받고 사인한 죄(?)로 맏형 이순재가 짊어지게 되었다.

 

책임감이란 사람의 어깨를 얼마나 무겁게 하는 것인가? 비행기를 타고 10시간 넘게 날아가는 동안 이순재는 한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동생들이 쿨쿨 잠자는 동안 이순재는 밤새 가이드 책과 회화책과 지도를 들여다 보며 숙소 찾아갈 방법을 연구했던 것이다. 어둡던 창 밖으로 환한 빛이 새어드는데, 81세의 이순재 옹이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한 채 눈이 빠져라 책만 들여다 보는 모습은 심히 염려스러웠다. 장거리 비행은 그 자체가 얼마나 힘든 일인데, 게다가 지금부터는 시차 적응도 해야 하는데, 신체 리듬이 깨지면 젊은 사람도 병들기 쉬운데, 그래서 여행 중에는 무엇보다 건강에 유의해야 하는 법인데, 고령의 이순재가 한숨도 못 자고 유럽에 도착했으니 그 피로감이 오죽할 것인가?

 

 

이순재는 식당에서조차 음식에는 눈길도 주지 않고 지도에 시선을 고정했다. 막중한 부담감에 밥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일흔을 넘긴 세 아우는 아무 생각 없는 철부지들처럼 모든 것을 맏형에게 의지하며 룰루랄라하는데, 여든을 넘긴 맏형은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고 동생들을 챙기는 모습이 참 뭐랄까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경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방송을 보는 내내 마음이 즐겁거나 편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물론 감동적이긴 했지만 결코 재미있지는 않았다. 이순재의 성실함과 배려심과 끝없는 열정은 그저 감탄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지만, 타인들이 의도적으로 조작한 상황 때문에 팔순 노인이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면서 고생하는 모습은 솔직히 불편했다.  

 

더구나 이순재는 출발 전부터 감기 기운이 있었다고 한다. 캐리어를 끌고 유럽의 차가운 밤 공기를 가르며 걸어가는 이순재의 모습은 척 보기에도 굉장히 지쳐 있었다. "제대로 감기 들겠어... 내일은 움직이지도 못하겠다..." 무심결에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정말 안타까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다행히 이순재가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건강한 모습으로 '감자별' 촬영에 복귀했음을 알고 있었기에 망정이지, 몰랐더라면 건강이 크게 상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왈칵 눈물이 쏟아졌을지도 모른다. 정말 그런 모습을 '재미있게' 본 사람들이 있었을까? 나만 그렇게 불편했던 것일까? 깔깔 웃어대며 재미있게 본 사람들은 부모님이 아직 젊으신가? 내 부모님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팔순 노인이 되지 않을 것 같아서, 생판 남의 일이라서 맘 편히 볼 수 있는 걸까?

 

 

물론 나이를 생각 안 하고 지금 이 순간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뿐이라는 이순재의 생활 신조는 본받을만한 것이었다. 팔십이라는 숫자는 잊어버리고 아직도 육십이라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그 활기와 열정은 부럽기까지 했다. 하지만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 해서 타인이 "아, 그러세요? 그럼 고생 좀 해보세요" 라는 식으로 나올 수는 없는 것이다. 이순재는 이와 같은 상황을 전혀 예측하지도 못했고 아무런 준비도 되어있질 않았다. 본인이 선택하고 자청한 생고생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연세 많은 부모님이 계시다면 누구나 같은 마음 아닐까? 찬바람에 감기라도 걸리시면 기침소리 한 번 들을 때마다 가슴이 쿵쿵 아프게 내려앉는 그 느낌을 모두 알지 않을까? 오늘 아무리 건강해도 내일의 건강까지 확신할 수는 없는 것이 노년의 삶이다. 본인이 활기찬 마음으로 사시는 거야 물론 좋지만, 일부러 고생길에 밀어넣을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만약에라도 객지에서 그 고생을 하다가 진짜 큰 병이라도 걸리셨으면... 정말 어쩌려고???

 

이순재는 한 번도 책임을 타인에게 미루지 않았고, 예상치 못한 힘든 상황에도 불평 한 마디 하지 않았다. 알량한 술수를 부려 자신에게 무거운 짐을 떠맡긴 나PD를 괘씸하게 여길 법도 하건만 추호도 그런 기색은 없었다. 나이 많다고 대접받으려 하기는 커녕 오히려 겸손한 자세로 솔선수범했다. 인생의 대선배로서 그런 모습을 보여준 것만으로도 이순재 옹의 스페인 여행은 대성공이다. 여행을 함께 한 동생들과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이제는 온 국민이 존경하는 마음으로 그를 본받으려 노력할 것이다. 결과가 이렇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긴 한데, 기획 자체는 상당히 무리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물론 나PD도 이순재가 그렇게까지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며 식사와 수면을 아예 포기할 거라고는 예상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나중에는 제작진도 죄송스러워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었으니, 깨달은 바가 있다면 앞으로는 좀 더 주의를 기울이겠지. 그런데 정말 남들은 이 방송을 깔깔 웃으면서 재미있게 본 걸까? 나는 여전히 그게 의문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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