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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사나이' 이상길 소대장, 그 엄격함이 좋았던 이유 본문

예능과 다큐멘터리

'진짜 사나이' 이상길 소대장, 그 엄격함이 좋았던 이유

빛무리~ 2013. 10. 21. 0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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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두새벽부터 걸그룹을 불러다가 먹고 마시며 노는 모양새가 어쩐지 좀 이상하긴 했다. 이제껏 방송된 '진짜 사나이' 모든 회차를 통틀어 가장 재미없고 작위적이었던 '수도방위사령부' 편이 드디어 끝나고, 비주얼부터 신선한 '해군'편이 새로 시작되는 날이었다. 언제 어디에서건 쉽지는 않았지만 특히 해군이라는 낯선 환경에 처음 들어가 적응해야 하는 사람들이 적절한 긴장감으로 마음의 준비를 하기는 커녕, 마치 촬영 끝내고 뒷풀이하는 것처럼 신나게 놀고 있으니 저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진짜 사나이'가 걸그룹 홍보의 장으로 변질되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곳곳에서 들리고 있는데, 보통 노래 한 곡만 부르고 홀연히 떠났던 다른 걸그룹과 달리 '투아이즈'는 아예 도시락까지 싸들고 와서 훈련소 입소를 앞둔 멤버들을 주저 앉혔다. 서로 음식을 먹여주기까지 하면서 질펀하게 웃는 모습들은 흡사 유흥가를 연상시킬 만큼 자극적이고 민망했다.

 

나중에 보니 해군 훈련소의 전설적인 교관 '이상길 소대장'과의 첫 만남을 더욱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설정이었던 듯하다. 아침부터 갑자기 들이닥친 걸그룹과 어울려 희희낙락하던 멤버들은 뒤늦게 정신을 수습하고 훈련소로 달려갔지만, 이미 시간은 입소 예정이었던 오전 9시에서 무려 10분이나 늦어버린 후였다. 훈련소 앞에는 깡마른 체구에 빨간 모자를 쓴 한 남자가 부동자세로 20분 넘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사이보그' 혹은 '터미네이터'라 불리는 전설의 교관, 1중대 1소대 소대장 이상길 상사였다. 입소 첫날부터 한참 지각한 주제에 느긋하게 발 맞춰 헛둘 헛둘 다가오는 그들을 보며 이상길 소대장은 벼락같은 목소리로 냅다 외쳤다. "빨리 뛰어 와, 뛰어 와!" 신병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그의 첫 인사였다.

 

 

"첫날부터 이렇게 한다 이거지?" 존대 따위는 없었다. 지금껏 만났던 분대장이나 선임들은 모두 병장 제대하면 즉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일시적 군인이었고 나이도 어렸던 탓인지, 30~40대에 이르는 '진짜 사나이' 멤버들에게 늘상 깍듯한 경어를 사용했었다. 멤버들이 지각을 해도 "앞으로는 반드시 시간 맞춰 준비할 수 있도록 합니다!" 정도면 끝이었고, 기합 받는 도중에 웃음을 터뜨려도 "웃깁니까? 우습습니까?" 하는 식으로 어린 교관들은 야단칠 때조차 꼬박꼬박 존대를 했다. 하지만 이상길 소대장은 엄연한 직업 군인이고 나이도 적지 않은 듯했다. 연예인이건 나이가 많건, 군기 빠진 훈련병들을 상대함에 멀렁한 자비심이나 존칭 따위는 사치였다. 얼음같은 부동 자세로 그의 말을 경청해야 할 훈병들이 손을 꿈틀거리거나 귓불을 만지는 등 제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보면 가차없는 불호령이 떨어졌다. "움직이지 마!"

 

단 한 순간도 긴장을 늦출 수 없게 하는 이상길 소대장의 카리스마는 정말 대단했다. 꼿꼿이 서 있을 때는 흡사 강철 인형을 세워놓은 듯했고, 반듯하게 각 잡힌 걸음걸이와 몸가짐은 최첨단 로봇의 정교한 움직임을 보는 듯했다. 촬영 당시는 제24호 태풍 '다나스'가 몰려오던 시점인데, '진짜 사나이'는 일부러 태풍에 맞춘 것처럼 남쪽 바닷가에서 모진 비바람을 견디며 훈련을 받게 되었으니 그 또한 기막힌 운명이라 할 것이다. (리뷰의 내용과 상관없는 개인적 에피소드를 하나만 덧붙인다면, 마침 그 때 신랑과 나는 제주도 여행 중이었다. 사정상 렌트카를 빌리지 않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던 우리 부부는 오후 2시경에 엄청난 폭풍우를 만났는데 정류장을 잘못 알고 내리는 바람에, 눈도 제대로 못 뜨는 상황에서 우비 위로 거센 물따귀를 맞으며 대략 40분 가량을 걸어가 물에 빠진 생쥐꼴로 펜션에 도착했다. '진짜 사나이' 멤버들의 고난을 보니 그 때의 기억이 생생히 떠올랐다..^^;;)

 

훈련병들은 우비를 입고 있었지만, 이상길 소대장은 단정한 군복 차림 그대로였다. "고개는 왜 숙이나? 비 온다 이건가? 일어 서!" 매서운 비바람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몸이 비틀거려지는 훈련병들을 향해 소대장은 일갈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우박이 떨어지든, 해군은 굴하지 않는다!" 그 꼿꼿한 자세를 지켜보던 손진영은 나중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소대장님은 다 젖으셨는데도 젖지 않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와도 쓰러뜨릴 수 없을 듯한 소대장의 카리스마는 등골이 서늘할 지경이었다. 그 역시 태어날 때는 연약한 피와 살을 지녔으련만, 얼마나 극강한 인내심으로 자기를 이겨내면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것일까?

 

 

해군에는 '5분 전', '15분 전'이라는 독특한 개념이 있다고 한다. '15분 전'이란 출항 경보 및 출입항 요원이 배치되고 출항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하며, '5분 전'이란 모든 집합이 완료되고 업무 시작 준비가 완료된 상태를 의미한다. 단 1분만 늦어도 배에 오를 수 없고, 전시 상황이라면 그것은 낙오 및 죽음을 의미할 수 있다. 따라서 해군의 시간 엄수는 목숨과도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진짜 사나이'는 입소 첫날부터 단체로 10분이나 지각을 했으니, 사이보그 소대장에게 제대로 찍힌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간 엄수뿐만 아니라 모든 말과 행동에서 극한의 절도를 요구하는 이상길 소대장을 보며, 신기하게도 내 가슴에는 진한 카타르시스가 차올랐다. 매우 편안하고도 든든한 느낌이었다.

 

실제로 전쟁이 일어나든 아니든 간에 우리의 국방은 반드시 튼튼해야 할 필요가 있고, 복무 중에 안마 시술소나 유흥업소를 들락거리며 흥청망청하는 군인(연예병사 포함)들의 모습에 국민의 분노가 증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에 반해 이상길 상사처럼 저절로 믿음이 가는 진짜 군인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얼마나 맘 놓이고 흐뭇한 일인가? 숨이 막힐듯한 그 엄격함과 차가움이 오히려 좋아 보인 첫번째 이유는 아마도 거기에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니 '화룡대대'의 원칙주의자 양태승 분대장을 보면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두번째 이유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회'에 있었다. 좀 심한 표현일 수도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는 사회'이며 더 나아가서는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사회'다. 100%는 아니지만 내가 보기에 80% 정도는 그러하다. 월급 인상을 구두로 약속해 놓고 사측에서 제멋대로 무시해도 힘 없는 계약직 사원은 항의할 방법조차 없다. 분명히 원고료 입금 날짜를 약속해 놓고도 어떤 회사는 번번이 어긴다. 몇 차례씩 전화를 해야만 입금하고, 때로는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는다. 늦어지는 것쯤이야 아주 당연한 일이고, 약속을 어기는 것쯤이야 대수롭지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전혀 미안한 줄도 모르고, 대답도 없이 탱자탱자 놀면서 뻔뻔하게 버틴다. 이런 게 흔히 먹혀들다니, 참 더러운 사회다. 

 


 
컴퓨터나 가전기기를 구입할 때면 철저한 AS를 약속하지만, 솔직히 내 경험상 중소업체의 경우 그 약속은 쉽게 믿을 것이 못 된다. 일단 물건을 팔고 나면 입을 씻으려 들기 때문이다. 올 여름에만도 에어컨 수리를 여러 번 요청하다 못해 내용증명까지 발송하고 나서야 AS기사가 방문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런 식이니 값이 비싸더라도 체계가 잘 잡혀 있는 대기업 제품을 이용할 수밖에 없고, 부익부 빈익빈은 점점 더 심해진다. 사회 발전이 더딘 가장 큰 이유는 약속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다. 뼈빠지게 노력해도 성공할 수 없고 점점 더 불행해지는 이유도, 우리가 약속을 지키는 사회에 살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약속을 우습게 여기는, 헛소리와 빈말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이 사회의 문화에 적응할 수 없어 마음속에 항상 불만이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마치 절대자처럼 강한 포스를 철철 풍기면서 나타나 시간 엄수를 외치는 소대장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비쳤다. 입소 첫날부터 지각해 놓고도 별로 잘못했다는 생각없이 터벅터벅 걸어오던 '진짜 사나이' 멤버들은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솔직히 나는 유쾌 상쾌 통쾌했다. 아침부터 낯선 여자들과 어울리 젓가락으로 음식을 먹여주면서 질펀하게 놀던 모습이 못마땅했던 것만큼이나, 그들이 혼나면 혼날수록 더욱 고소했다. 여기 일반 사회에도 이상길 소대장 같은 존재가 있어, 약속을 어기는 사람을 즉각 혼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다. 하지만 그 곳은 군대라는 특수 사회였고, 그들은 자발적이 아니라 강압적으로 명령에 복종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통쾌한 한편 씁쓸했다. 약속을 지키는 사회, 유토피아의 현실적 도래는 참으로 요원한 것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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