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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의 제국' 최성재의 일기 - 1994년 어느 여름 날 본문

종영 드라마 리뷰 /황금의 제국

'황금의 제국' 최성재의 일기 - 1994년 어느 여름 날

빛무리~ 2013.07.23 06:42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어쩌면 나는 지금까지 혼자 안개 속을 헤매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누가 뭐래도 최동성은 나의 아버지였다. 내 앞에서 그 사람의 이야기를 할 때면 가끔씩 엄마의 두 눈에서는 증오의 푸른 불꽃이 일곤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나에게 그는 아버지였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청마건설 사장 배영완보다, 내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25년 동안 지켜보며 언제나 따뜻하게 안아 주고 사랑해 준 성진그룹 회장 최동성이 내 마음 속에서는 더 진실한 아버지였던 거다. 엄마가 시키는 대로 생부의 기일마다 그의 무덤을 찾아가 절하며 나는 빌었다. 제발 엄마의 증오를 잠재워 달라고, 엄마와 나를 이토록 사랑했으니 지금의 내 아버지를 부디 용서해 달라고... 하지만 죽은 생부의 가슴 속에 맺힌 원한도 엄마 만큼이나 차갑고 깊었던 걸까? 아무리 빌어도 그는 나의 소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아버지가 뇌종양과 치매 판정을 받게 되자, 성진그룹에는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서윤 누나를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큰형 원재와 사촌형 민재는 그에 불복하고 그룹의 주인이 되려 했다. 정윤 큰누나는 아버지가 떼어 주겠다고 약속하신 골프장 지분이 성에 안 찼는지, 원재 형과 한 편이 되어 서윤 누나를 압박했다. 그 와중에 엄마는 25년 동안 차분히 모아 온 현금과 주식을 이용해 그들의 뒤통수를 치고 최후의 승자가 되겠다며 꿈에 부풀었다. 내 손에 성진그룹을 움켜쥐는 그 날, 우리는 최동성의 비명소리를 들으며 이 집을 나서게 될 거라고 엄마는 말했다. 나에게 선택의 여지 따위는 없었다. 나의 생부가 좋아했다던 청마 유치환의 시 '깃발'의 한 구절처럼 소리없는 아우성으로 지나 온 엄마의 25년 세월을 알고 있기에, 나는 아무리 괴로워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가족회의가 끝나면 우리가 누구인지를 모두들 알게 될 테니 그 전에 아버지와 서윤 누나에게 작별인사를 하라고, 어젯밤에 엄마는 말했다. 쟁반에 약과 물을 담아서 아버지께 가져다 드리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젖어 왔다. 이 순간이 지나면 다시는 나를 향해 미소짓는 저 주름진 얼굴을 볼 수 없는 걸까? 하루 하루 시들어가는 아버지의 뇌혈관은 나를 언제까지 기억해 줄까? 그러자 아버지는 "사내놈 눈에 물기가 많아서 어쩌누" 하면서 내 손을 잡아 앉혔다. 어렸을 때 놀러갔던 성북동 김회장네 집을 보며 뒤뜰의 연못과 그네가 좋으니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고 내가 그랬던가? 그 말을 기억한 아버지는 이제 그 집을 나에게 줄테니, 결혼하면 그 연못가에서 아내와 차를 마시고 아이의 그네를 밀어 주며 그렇게 살라고 말했다.

 

 

나는 간신히 울음을 삼키며 대답했다. "제가 결혼하고 아이 낳으면, 아버지 이야기 많이 할게요." 엄마에겐 미안하지만, 내 아이들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 준다면 그 주인공은 배영환이 아니라 최동성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아버지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흉이나 보지 말어... 서윤이하고는 지금처럼 잘 지내라. 네가 져야 할 짐, 서윤이 지게에다가 올려 놨어. 힘들고 무거울 거야." ... 내가 져야 할 짐을 서윤 누나 지게에 올려 놨다니, 원래 아버지가 생각한 후계자는 서윤 누나도 원재 형의 아들 명훈이도 아닌, 바로 나였다는 뜻일까? 가슴에 뜨거운 것이 울컥 치밀어 흘낏 엄마를 보았더니 "너를 안아주는 그 손이 네 아버지를 죽였어!" 차디찬 눈으로 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푸른 눈빛이 보이지 않는 듯 말을 계속했다. "결혼하면 성북동 집에서 네 엄마랑 살아. 추위 많이 타는 사람이니까 아래층에 햇볕 잘 드는 방에다가 위풍 안 들게 하고..." 나에게 당부한 후, 아버지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렀다. "100살까지 천천히 살다 와... 보고 싶어도 참을 거니까, 오래 오래 재미나게 살다 와." 마치 유언처럼 남기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엄마가 모르는 두 가지 사실을 명확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엄마의 속마음을 모두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것을 알면서도 엄마와 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 나는 목 멘 소리로 아버지에게 대답했다. "오래 오래 ... 기억할게요!" 

 

서윤 누나는 여전히 나를 꼬맹이라고 불렀다. 외롭다거나 힘들다는 말 대신, 이틀에 한 번이라도 자기와 대화를 나누며 한 시간씩 보내 달라고 했는데, 나는 약속을 할 수 없어서 가슴이 아팠다. 하지만 누나는 그저 웃으며 내일의 가족회의에서 발표할 중요한 내용을 나에게 알려 주었다. 성진건설 유상증자에 납입한 돈은 모두 사라질 거라고, 아버지와 서윤 누나에게 맞섰던 사람들은 모두 빈털터리가 되어 쫓겨날 거라고...

 

 

그렇게 말하며 나를 보던 서윤 누나의 눈빛은 아직도 맑기만 했다. 엄마와 내가 다른 꿍꿍이를 지녔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한 채, 그저 마음 속 이야기 털어놓을 꼬맹이 하나 옆에 있다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나를 경계하지 않는 서윤 누나가 부지불식간에 흘린 그 정보 덕분에, 엄마는 정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고 25년간 확보한 재산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이 집에서 떠나지 않게 된 것이, 아버지가 숨을 거두는 날까지 곁을 지킬 수 있게 된 것이 기뻤다.

 

드디어 오늘, 운명의 그 날이 왔다. 큰형과 큰누나와 자형은 똘똘 뭉쳐 서윤 누나를 압박했고, 그들에게 홀로 맞서는 서윤 누나의 가냘픈 어깨는 더욱 애처로워 보였다. 하지만 이번 판의 승리자가 누구인지를 알고 있던 엄마와 나는 보유하고 있던 장학재단과 성진학원의 건설 주식을 서윤 누나에게 넘겼다. 우리의 배팅은 이미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음 순간, 생각지도 않은 지뢰가 터졌다. "성재 넌 빠져. 우리 식구들 일이야!" 갑자기 들려 온 앙칼진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정윤 큰누나가 한 쪽 입꼬리를 올리고 비웃는 시선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여자는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 2년도 안 돼서 들어왔어. 그래도 아빠 맘 편하라고 웃어줬어. 엄마라고 불러줬어. 그것뿐이야. 근데. 진짜 엄만 줄 아나봐. 진짜 동생인 줄 아나?" 그랬다. 어쩌면 이게 진실이었다. 아버지와 서윤 누나의 손길이 아무리 따뜻해도, 결국 엄마와 나는 이 집안 식구일 수가 없는 거였다. 25년 동안 한 번도 내색하지 않던 정윤 누나의 속마음을 알게 된 순간, 나는 엄마의 판단이 옳았음을 깨달았다. 이렇게 무서운 사람들 틈에서 나는 치기어린 소년의 감성으로 정을 떼지 못해 눈물이나 흘리고 있었던 거다.

 

  

엄마와 나의 정체를 알게 된 후에도 서윤 누나는 지금처럼 따뜻한 눈길로 나를 보아 줄까? 아니, 그녀도 별로 다르지 않을 것임을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덮어주고 지켜주던 아버지의 존재가 사라지는 순간, 엄마와 나는 가차없이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가족과 가족 아닌 자의 경계는 소름끼치도록 뚜렷했다.

 

늙은 호랑이의 마지막 포효는 일단 풍랑을 잠재웠다. 병원에 간다던 아버지는 차를 돌려 회사로 향했고, 사촌형 최민재가 주도하고 있던 사장회의는 삽시간에 아버지에게 제압당했다. 민재 형은 그 자리에서 아버지의 병세를 폭로하며 내일이면 금치산자 판결이 내려질 거라고 했지만, 수십 년간 평생토록 최동성 회장과 동고동락해 온 늙은 중역들은 끝내 아버지를 따랐다. 사장들의 계열사 지분은 모두 새로운 지주회사로 선정된 성진시멘트로 이동했고, 성진건설은 껍데기뿐인 유령회사가 되어 침몰했다. 성진건설 유상증자에 사활을 걸고 참여했던 사람들은 그렇게 몰락했고, 서윤 누나는 스물 아홉 어린 나이에 성진그룹 대표가 되었다.

 

 

어차피 나에게 주려던 짐을 서윤 누나의 어깨에 지운 거라면, 내가 가져온다 해도 아버지의 뜻을 거역하는 건 아닐 것이다. 분명히 최동성 회장은 막내아들인 나 최성재에게 모든 것을 주고 싶어했으니까, 내가 성진그룹의 주인이 되는 것은 내 어머니 한정희의 평생 소원이고, 낳아 준 아버지의 원한을 푸는 길이며, 길러 준 아버지의 뜻을 받드는 일이다. 그런데 욕심이 없노라며 엄마의 강요를 속으로 부담스러워하고, 아버지와 서윤 누나의 따스함에 기대고만 싶어했던 나는 얼마나 바보였을까? 이제 자욱한 안개가 걷히고 나니 뚜렷한 운명의 길이 눈에 보인다. 그 길 끝에 나의 집, 황금의 제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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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당시만 해도 스물 다섯의 청년 최성재(이현진)는 성진그룹 내부에서 유일하게 순수한 마음을 지닌 인물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리알처럼 깨지기 쉬운, 결코 오래 지속될 수 없는 마음이었죠. 가족회의 중에 대놓고 그를 외인 취급하던 장녀 최정윤(신동미)의 한 마디가 순수한 최성재의 마음에는 큰 상처와 균열을 입혔을 것이고, 그 충격은 최성재의 내부에 잠자던 욕망을 각성시켰을 겁니다.

 

아마도 최성재는 그 날 이후로 미지근한 태도를 버리고 어머니 한정희(김미숙)의 뜻에 따라 적극적으로 후계 전쟁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물론 최동성(박근형) 회장이 눈을 감기 전에는 겉으로나마 숨 죽이고 있겠지만요. 최민재(손현주)와 손잡고 침몰한 성진건설을 다시 일으킨 장태주(고수)는 3년 후 재기에 성공하여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서른이 못 된 어린 나이로 성진그룹의 회장이 된 최서윤(이요원)은 그 벅찬 자리를 어떻게 버티고 있는지, 오늘 밤 8회의 내용이 더욱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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