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ISTORY 2014 우수블로그
TISTORY 2012 우수블로그
TISTORY 2011 우수블로그
TISTORY 2010 우수블로그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관리 메뉴

빛무리의 유리벽 열기

'유령' 죽음을 넘어선 페이스오프, 비극적인 싸움이 시작되다 본문

드라마를 보다

'유령' 죽음을 넘어선 페이스오프, 비극적인 싸움이 시작되다

빛무리~ 2012. 6. 1. 08:00
반응형

 

 

'유령'은 상당히 특이한 드라마입니다. 보통 새로 시작하는 드라마는 1회에 총력을 기울이고 2회부터는 슬슬 힘을 빼는 법이죠. 그래야 첫방송에서 시청자를 사로잡기가 수월하니까요. 최근 시작된 '추적자'와 '각시탈'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숨막힐 듯 진행이 빠르고 역동적이던 1회에 비해, 2회는 현저히 늘어지고 약간은 지루한 느낌마저 들었지만 그래도 실망하지는 않았어요. 원래 그게 당연한 거니까요. 그런데 '유령' 만큼은 예외였습니다. 1회는 첫방송치고 임팩트가 부족하다 싶을 만큼 평이하고 잔잔하더니만, 오히려 2회가 상상초월 대박이군요. 저는 편안히 누워서 보다가 중반 이후부터는 벌떡 일어나 가슴을 졸이며 손에 땀을 쥐고 시청했습니다. 드라마든 영화든, 이렇게까지 완벽 몰입해 본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네요.

 

처음부터 좀 의아하긴 했습니다.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할 주인공 김우현(소지섭)의 매력과 존재감이 고작 특별출연에 지나지 않는 박기영(최다니엘)에게 밀리고 있었거든요. 게다가 홈페이지의 인물소개조차 김우현보다 박기영에게 더욱 많은 분량을 할당해 주고 있었습니다. 특별출연이라면 길어봤자 초반에 몇 회 정도 출연하고 물러날텐데, 뭣하러 박기영의 캐릭터를 이렇게까지 매력적으로 어필하나 싶었습니다. 자유로운 천재성과 더불어 유쾌한 성품과 올곧은 신념까지 지닌 박기영의 완벽한 캐릭터가 곁에 있으니, 틀에 갇힌 듯 고지식하고 성격마저 까칠한 김우현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알고 보니 작가의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군요. 이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김우현이 아니라 박기영이었습니다.

 

주인공 역할을 맡은 배우가 소지섭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수사 과정에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한 김우현을 대신해서, 그의 친구이자 살인사건의 목격자였던 천재 해커 박기영이 '김우현의 모습으로 얼굴을 바꾸고' 그 자리를 채우게 되었으니까요. 물론 꼼꼼히 따지자면 말이 안 된다 싶은 부분도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동료형사 유강미(이연희)가 치과 기록을 바꿔치기함으로써 순간의 위기는 넘길 수 있겠지만, 끝까지 발각되지 않는다는 것은 수긍하기 어렵거든요. 두 사람의 몸은 혈액형을 비롯해서 모든 특징이 생판 다를텐데, 샅샅이 부검하고서도 그 시체가 누구인지를 아무도 모르고, 1년 이상 병원에 입원해서 온갖 치료를 받았는데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무도 모르다니,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죠. 하지만 그 정도의 디테일쯤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을 만큼, '유령' 2회의 전개는 너무나도 긴박하고 흥미로웠습니다.

 

 

저는 '각시탈'을 먼저 선택했기 때문에 '유령' 1회는 본방사수를 하지 못했습니다. 첫방송 이후 여주인공 이연희의 발연기를 성토하는 내용의 리뷰와 댓글들이 인터넷에 가득한 것을 보고, 대체 얼마나 못하기에 반응이 이럴까 한숨을 쉬었지요. 그런데 1~2회를 한꺼번에 몰아서 본 제 느낌으로는 이연희의 발음과 연기가 크게 거슬리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봐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예상했던 것보다는 그런대로 괜찮더군요. 물론 좀 더 연기 잘하는 여배우가 저 역할을 맡았다면 드라마의 전체적인 임팩트가 얼마나 더 살아났을까 생각하면 아쉽긴 하지만, 저는 가능한 한 예쁘게 봐주려고 합니다. 여주인공 유강미 캐릭터는 그 분량도 많고 역할의 중요성도 대단한데, 계속 이연희 때문에 신경이 거슬린다면 결국 이 좋은 드라마를 볼 수 없게 될 테니까요. 가뜩이나 한가인 때문에 '해를 품은 달' 시청을 중간에 포기한 것이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이연희는 그렇게까지 몰입을 방해하는 여주인공은 아닌 것 같습니다.

 

'유령'에는 김은희 작가의 전작인 '싸인'의 그림자가 곳곳에서 비춰집니다. 고위층과 연관되어 있는 의문의 살인사건, 포기하지 못하고 그 사건을 계속 수사하다가 끝없이 위험에 처하는 남녀주인공, 사건의 정체가 뚜렷이 드러날수록 점점 더 그들을 둘러싼 올가미는 조여져 오고,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상대방의 막강한 힘 앞에 조금씩 절망하게 되고, 그 와중에 옴니버스 형식으로 다른 사건들을 끼워넣어 소소한 재미를 더하는 것까지, 분위기도 그렇고 유사점이 많아서 앞으로의 전개를 대략은 짐작할 수가 있군요. 다만 두려운 것은 결말 부분입니다. 어쩌면 '유령'은 '싸인'보다 더 가슴아픈 새드엔딩일 듯한 예감이 들어서요.

 

거대한 악의 힘을 상대하고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싸인'의 주인공 윤지훈(박신양)이 선택한 최후의 방법은 스스로 목숨을 바치는 것이었습니다. 살신성인의 자세가 아름답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은 생각도 들었지요. 그 방법으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강서연(황선희)의 덜미를 잡을 수는 있었지만, 그녀 한 사람의 손발이 묶인다 해서 세상의 범죄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거대한 악의 세력이 무너지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차라리 윤지훈처럼 정의롭고 능력있는 법의학자가 좀 더 오래 살아서, 좀 더 많은 사건을 해결하고 좀 더 많은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을까 싶어서 허무하기도 했지요. 어쨌든 '싸인'은 주인공의 죽음으로 비장한 새드엔딩을 맞이했는데...

 

 

'유령'의 초반 분위기는 '싸인'과 비슷하게 음산하면서도 그보다 훨씬 비극적입니다. 중심축이 되는 사건의 본질부터가 '싸인'보다 훨씬 심각하지요. 애인의 집착 때문에 살해당한 남자의 사건은 오직 한 개인에 국한된 일이지만, 고위층의 성접대 요구에 시달리다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여자 연예인의 사건은 척 보기에도 덩어리가 매우 크군요. 게다가 그녀는 고위층 내부에서 발생한 살인사건을 목격했고, 그것을 빌미로 신분높은 남자를 협박하다가 살해당했음이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고위층 살인사건에는 김우현 수사관도 연루되어 있었는데, 그 일 때문에 결국 김우현은 죽음을 맞이하고 함께 있던 박기영은 중상을 입게 되지요. 이렇게 살인사건이 꼬리를 물고 이어질 뿐만 아니라, 연관된 고위층 인사들의 숫자도 꽤 많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싸인'의 윤지훈은 강서연의 아버지 한 사람을 상대하기도 버거워서 결국은 목숨을 바쳐야 했습니다. 막대한 돈과 권력을 손에 쥔 고위층 인물은 한 사람만 있어도 충분히 골리앗의 역할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 인물들 몇몇이 모여 힘을 합친다면, 박기영의 능력이 아무리 천재적이고 그 집념이 대단하다 하더라도 상대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해요. 이런 상황에서 최후의 선택이라면, 죽음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게다가 박기영은 친구 김우현에 대한 마음의 부채까지 짊어지고 있습니다. 물론 잘못한 것은 김우현이었지만 그 자리로 불러낸 것은 자신이었고, 진심으로 뉘우치는 모습을 보였는데 바로 다음 순간에 비참하게 죽어 버렸으니, 그것을 눈앞에서 목격한 박기영의 마음이 어찌 편하겠습니까? 죽은 김우현의 가면을 쓰고 그의 자리에 앉아 그의 이름으로 행세하면서, 비록 한을 풀어주려는 뜻에서 시작한 일이라 해도 미묘한 죄책감은 항상 박기영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그런 심리상태를 감안한다면, 골리앗 연합을 상대하여 단 한 번이라도 불가능한 승리를 이루어 내기 위해, 박기영이 스스로 목숨을 버릴 가능성은 매우 높겠지요. 아마도 그를 사랑하게 될 어리버리 유강미는 슬픔에 잠기겠지요. 만약 그들을 기다리는 운명이 슬픔이라면, 부디 이번에는 허무한 슬픔이 아니라 꽉 찬 슬픔이기를, 그래서 '유령'이 '싸인'을 능가하는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길이 남을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반응형
Comments